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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다
연두 지음 / 가하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내게 있어 의자란 특별히 따로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저 앉는 수단 혹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 디자인이 독특하고 예쁜 의자를 보면 ‘그저 예쁘구나!’하는 감상에서 끝나는…… 그렇게 의자에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다>를 읽고 나서 주변의 의자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의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인터넷 서핑으로 디자인이 독특한 의자까지 찾아보게 될 정도로. 글 속의 챕터 중간 혹은 마지막에 등장했던 독특한 의자들의 드로잉 실물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의자의 신세계, 의자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의자를 보고 만지고 만드는 그녀와
의자를 평가하고 사고파는 그가
앉고 싶은 의자를 만났다.
문제는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앉고 싶어 한다는 것
문제가 그가 그녀를, 그녀가 그를 안고 싶어 한다는 것
가구에 대한 애착이 강한, 탁월한 재능 또한 지닌 가구디자인학도 ‘돌멩이’, 스물세 살의 유석과 전통을 지닌 가구 회사의 부사장으로 가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사업수완을 가진 ‘장군멍군’, 서른세 살의 우진.
3년 전 유석이 신입생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던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가에타 페세의 ‘뉴욕의 황혼’을 앞에 두고. 황혼의 느낌을 담은 의자를 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새벽을 느꼈던, 그렇게 통했던 두 사람은 3년 뒤 다시 재회한다. 우진의 동생 우영이 좋아하는 동기이자 친구로, 우영의 형으로. 우진, 그를 자극하는 유석에게서 그는 3년 전의 그녀가 유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까 처음 만났던 장소를 맴돌게 만들었던 여자가…….
출중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가구 디자인을 하는 것도, 생활을 하는 것도 빠듯한 유석을 위해 형의 도움을 빌리려 했던 우영으로 인해 우진은 유석을 오해한다. 유석을 조롱하고 무시하면서도 유석에게 끌리는 우진과 못 오를 나무라는 것을 알기에 피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우진을 좋아하게 되고만 유석,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끌림에 굴복하고 만다.
“의자는 누군가가 앉아주었을 때 비로소 의자가 되죠.”
p10 中 유석.
유석을 향한 우진의 말에서, ‘앉고 싶다’라고 들리지만 ‘안고 싶다’라는 그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어 앉고 싶은, 안고 싶은 존재. 서로를 끊임없이 원하고 자극하는, 그로인해 살아있음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하는 존재의 의미. 위험하게 시작된 강렬한 사랑! 두 사람의 끝은 과연 어떨까?
의자를 하나의 욕망으로 표현한 것, 의자를 매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참 독특했다. 어느 하나 의자랑 관련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이야기가 의자에 연관되어 있다. 서로를 자극할 때도, 두 사람이 처음 하나가 되었을 때도 그들 사이에는 의자가 존재했다. 그들의 마음을, 욕망을 여러 의자에 빗대어 전하는 방법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키스를 빼앗듯이 가져간 우진에게 유석이 선물한 미니어처 의자, ‘혀 잘 쓰라’며 가시 박힌 메시지를 담은 ‘Tongue’와 우진을 도발한 ‘Odalisque’. 유석을 구속하고 싶다는 우진의 마음이 담긴 카라뱅 의자와 허무하게 가버리고 만 그들의 아이와 유석을 위로하긴 위한 의자 ‘둥지’ 등 두 사람이 주고받고 언급됐던 의자들은 전부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글과 두 사람의 마음과 절묘하게 매치되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너랑…… 엮이기 싫어.”
“나랑 닮아서…… 싫어. 내가 아는 누구랑 닮아서…… 싫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고, 욕심 부리고, 눈치보고, 급기야 다른 걸 희생시켜서라도 가지려 하는 그 탐욕스러움이 싫어.”
“나는 그래서…… 당신이 이해되고 좋아졌는데.”
“이해하려 들지도, 좋아하려 들지도 마. 그냥 내가 원할 때 안기기나 해줘.”
p147 中 우진과 유석.
우진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학업이나 아르바이트로 힘든 유석인데, 그런 그녀를 몰아붙이며 강탈해놓고 제 욕심을 채우려는 모습이.
점점 유석을 사랑하게 되고 힘든 과정이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그녀와의 미래를 생각했으면서 표현하지 않고 상처 줬던 그가.
어쩌면 사랑에 있어서 그는 서툴렀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누리는 자리에서 군림하는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와 술집에서 일했던 생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아픔을 지닌 유년과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삶 아래, 그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답지도, 진실 되지도 않은 것. 그래서 우진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생모를 떠올리게 하는 유석에게 잔인했다.
그럼에도 그의 뜨겁고 서투른 사랑이 좋았다. 때때로 보여주는 부드러움이, 떠난 유석을 붙잡기 위해 그가 했던 방법이. 이런 섹시한 구애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유석에게 적나라하고 독특한 느낌의 의자를 주문하면서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도발하는 우진, 유석의 주변 남자들을 질투하는 그. 강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닳고 닳은 것 같으면서도 순수한 우진이 매력적이었다. 그를 자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 아버지 장 회장에게 무릎 꿇지 않고 유석과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놓고 과감하게 떠나는 그의 모습은 특히 믿음직스럽고 좋았다.
유석 또한 매력적인 여자였다. 사물을 보는 센스도 좋고 그녀가 지향하는 삶도 좋았다. 적당히 자존심을 지킬 줄 알고,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우진에게 지지 않는 그녀의 강함이 좋았다.
가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비슷한 아픔을 지녔다는 것, 지지 않으려는 성격 등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은 만큼 잘 어울렸다.
뇌쇄적이고 강렬한 글이다. 어떻게 보면 전체적인 틀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데 풀어간 방식이나 의자를 소재, 매개로 했다는 점이 독특했고,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었다는 점이 만족도를 높였다. 의자를 소재로 어설프게 글을 풀어 나가지 않았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 의자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감성이 잘 어울러졌고, 작가가 직접 드로잉한 독특한 의자 일러스트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볼거리 중 하나. 정말 만족스러웠다. 사랑의 색깔과 구도는 로맨스소설의 전형성을 띠지만 작가의 특유의 필력과 재치로 감각적으로 참 잘 표현된 글이다.
솔직히 로맨스소설들에서 비슷하고 전형적인 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의자’라는 신선한 소재를 매개로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만든 <의자에 앉다>처럼, 글의 구도는 전형성을 띠더라도 신선한 소재나 작가 고유의 필력을 통해서 글을 매력적으로 승화하는 글이라면 독자들도 식상하다고 비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창작이라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안다. 러브스토리를 주(主)로 하는 로맨스소설의 범주 안에서 글의 틀이나 소재의 한정성은 작가나 독자들 사이에서 항상 대두되는 문제다. 하지만 <의자에 앉다>처럼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이라도 표현의 방법에서 차이를 두고 작가만의 감각을 불어 넣는다면 독자들은 분명 그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특별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속의 다리 없는 두개의 의자를 서로 안긴 모양으로 겹쳐 설 수 있게 만든 것을 보면서 의자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완전하지만 함께 이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지탱하기에 땅을 딛고 일어서 살아갈 수 있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흔들림 없이 지지되기 위해 다리가 긴 의자의 다리를 다른 의자의 짧은 다리에 맞추어 조금 자르듯, 때때로 자신을 희생하며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사람. 상처가 있지만 상처가 있기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랑. 사람이 앉을 수 있게,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데 가장 의미를 두고 만들어진 의자처럼 누군가에게 쉬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