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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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내 것이면서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수많은 대답이 나오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몸'이다. 자신의 몸. 아마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내 몸으로 걸어다니고, 내 몸으로 생활하며, 내 의지로 몸을 움직인다. 이러한 몸이 내 맘대로 할수 없는 것이란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재 나의 몸은 과연 나만의 주체적인 의지로 존재하는 것인가? 자신이 하고 있는 다이어트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소위 '이상적인' 몸의 모양을 왜 부러워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남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몸을 '못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현재 가장 뜨거운 화두인 '몸'. 아름답고 날씬한 몸을 가진 사람이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되고, 몸에 따라 개인의 가치와 이미지까지 '단번에' 평가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날마다 다이어트에 대한 기사와 광고들이 우리를 유혹하며, 대중매체에서는 날씬한 몸을 가진 배우들과 모델들이 미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한번쯤은 "왜?" 라는 물음을 던져볼 만도 하다. '몸-숭배와 광기'는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된다.

2. 본론

이 책은 일단 문화적·역사적 맥락과 사회 심리학적 맥락에서 아름다움을 해석하고 있다.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본 아름다움의 내용은 문화와 역사에 따라 각각 다른 아름다움의 기준을 보여주면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과거 루벤스의 명화나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에서 보이는 미인들의 특징이 '풍만함'이었음에 비하여 현재 미인은 마르고 탄탄하면서 여성적인 매력을 잃지 않는 몸을 가진 여성이 미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미인의 기준은 특히 현대사회에서 미용산업, 유행과 함께 사회적 기반을 탄탄하게 지니고 있다.

미인의 기준이 되는 '몸'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은 노력한다. 이러한 여성들을 위해 미용산업은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한다. 열흘만에 10킬로그램을 뺄 수 있다는 약, 땀흘리지 않고 편하게 살을 빼준다는 운동기구, 늘어진 주름을 말끔히 없애줄 수 있다는 주름방지용 크림. 이러한 물품 앞에서 한번쯤 망설여보지 않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덕분에 미용산업은 전세계적으로 한번의 불황도 겪은 적 없이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늙고 주름이 생기며 몸 또한 그러하다. 계속 지속적으로 운동을 땀흘려 하지 않는 이상, 여기에다 엄격한 식사조절을 더하지 않는 한 이상적인 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자신에게 투자한다는 생각에 여성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몸에게 시도하고, 도전하고, 절망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알수도 있고, 모를수도 있다. 아니면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 심리학적 맥락에서 본 아름다움에서는 이 부분을 파헤친다.
한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또다른 사람들, 대중매체는 복잡한 매커니즘을 이루며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사회화 과정에서부터 인간은 관습의 위력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아름다움의 기준이 정해져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칭송한다면, 사회속의 인간은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화 과정에서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고, 특히 딸을 키워내는 어머니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아름다움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이 어떻게 전해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 딸에게 살을 빼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가진 미의 기준을 딸은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만약 어머니가 미에 대한 다양한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대중매체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수많은 광고, 영화, 드라마에서 제시하는 획일화된 미인들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미디어의 사회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특히 청소년기에 각종 미디어가 끼치는 영향은 무시할수 없을만큼 위력적이다. 미의 기준이 되는 배우들이나 모델들 또한 미디어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이러한 환경과 과정 속에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성들은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이상적인 몸을 가질 수는 없다. 몸은 각자 체질을 가지고 있다. 체질은 개인마다 다양하고 일생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전적인 요소가 있다면 마른 사람은 끝까지 마른 경우가 많고 살이 찌는 사람은 아무리 공들여서 살을 빼도 요요현상이 일어나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미용산업의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몸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미용산업 및 유행을 주도하는 기업들은 앞의 사실을 은폐하고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며 여성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주위에서 살이 찐 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느니, 게으르다느니 하는 말로 공격당하는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부정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이 과연 '아름다운' 기준이 존재하는 현실일까? 현재의 몸의 기준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이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만드는 기준이라면 과연 그 기준은 옳은 것일까? 그리고 그 기준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이러한 기준들은 이제 남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얻는 남성들은 잘 다져진 근육질 몸매나 꽃미남 스타일이 대부분이다. 아직은 인기있는 남성들의 이미지가 다양하지만, 곧 여성처럼 획일화될지도 모른다. 이제 사회에서는 남성들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획일화된 미의 기준은 굳이 여성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룰수 없는 허상을 제시하며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

3. 결론

앞의 얘기를 다 읽고 나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이쁜 게 죄야? 솔직히 날씬하고 얼굴 예쁘면 보기 좋잖아!"
물론 좋은 일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움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 덕분에  수많은 예술의 탄생이 가능했다.(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기준은 예술가마다 다 달랐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척도가 단지 한가지가 되고,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맞춰야 하고, 그 기준에 미달되면 비난을 받는 현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다양성을 존중할 때 존재한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비록 조금 살이 쪘다고, 피부가 조금 더 거칠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지 말자. 결국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안식처가 아닌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남의 눈을 통해 확인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확인하자. 자신에게 조금의 애정과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혹시 앞의 말이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 는 상투적인 말로 들리는가? 그리고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외면을 긍정하는 방법부터 배우는 것이 좋다. 결국 같은 얘기니까.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다양함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을 배운다는 것. 외면적·내면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얻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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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황금빛 유혹 다빈치 art 9
신성림 지음 / 다빈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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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화가들과 그림이 있다. 선사시대의 뜻 모를 벽화까지 그림으로 간주한다면 아마 우리가 봐야 할 그림들은 너무 많아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미술교육은 꿈 많은 학생들을 그림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림을 골라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미술학도가 아닌 이상, 그림을 선택하는 하나의 기준은 소위 '유명화가'이다. 미술사를 장식한 '무슨무슨 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 피카소나 고흐, 고갱 등은 그 방면에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씩은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클림트는 어떤 범주에 들어갈까? 아마 그는 그림이 너무 유명한 나머지 이름은 그다지 알려질 수 없었던 그런 화가가 아닐까. 그의 대표작「키스」는 너무나 유명해서 그를 모르는 사람도, 그림의 제목을 잘 기억해내지 못한 사람도 그림을 한번 보면 "아 그 그림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사람을 끄는 데가 있다. 화려한 색상과 달콤한 주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그림'의 의미(자고로 그림은 화려해야 하고 색채가 좋아야 하며 큼직해야 한다)에 가장 합당한 그림인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그의 그림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환상적이면서 음울한 배경들, 화려한 문양, 불분명한 대상의 윤곽, 여성들의 에로틱한 자세와 표정 등 그의 그림들은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몰고 다녔다. 여기에 여성을 단지 성적인 의미로만 묘사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공격까지 가세되어 새로운 논란을 놓았다.
 

어디에 답이 있을까? 미술처럼 애매한 영역에 답이 있을리 없다. 각자의 의견만 남을 뿐이다. 신성림의『클림트, 황금빛 유혹』은 그 의견 중의 하나이다. 단지 읽어보고 참고만 하시고 자세한 것은 그림을 '뚫어지게 보시길' 권한다.

클림트의 그림은 많다. 풍경화도 있고, 저택을 장식한 벽화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뺀 이유는 클림트의 특징은 여인들을 그린 그림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클림트의 개성이 단지 '에로틱'으로만 축약될 수 있고,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클림트와 그의 그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키스」의 이미지에 반한 수많은 사람들이 클림트의 다른 그림들에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거라고 확신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림만큼 감정적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영역도 없다. 세세한 눈으로, 애정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인 전제가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눈으로 보되, 그것을 보는 자신의 주관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처음엔 가이드가 필요할 것이고, 주위의 소개도 필요할 것이다. 훌륭하다고 공인된 작품만 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매이지는 말자.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들이 공인한 작품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림을 보는 관람객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좋은 그림만은 아닌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에도 다양한 시각과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되, 거기에 너무 빠지거나 광신하지는 말자. 결국 그림을 보는 것은 관람객 우리 자신이 아닌가.
 

클림트만은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좋아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클림트도 어느 사람에게는 "우와!" 하는 탄성을 내지르게 할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뭐야 이거!" 하는 불만의 소리를 토해내게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지는 않다, 다 맞는 얘기가 아닌가. 다만 한 화가와 그림에만 너무 빠지지 않는, 하나의 견해에만 너무 치우치지 않는 그런 자유로움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양함을 겪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의 작은 토대로,『클림트, 황금빛 유혹』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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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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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소설의 관계는 어떠할까? 뜬금없는 질문처럼 들린다면 역사와 역사소설의 관계는 어떠할까? 소설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 질문이 영 관계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거대한 것이다. 그 거대함에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다.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일어났고 혁명의 주세력이 부르주아라는 것만 알 수 있지 특별한 관심이 없는 한 그 안의 민중들이 어떻게 혁명에 참가하고 그것을 이루어냈는지는 관심 밖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물론 ‘미시사’라는 영역이 있어 역사에 대한 미세한 부분을 연구하는 분파가 있지만 아직 대중들이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역사소설이 할 일이 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민중들의 삶을 가까이 느낄수 있는 기회를 역사소설은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허구’라는 방식을 빌리고 있지만 그 점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가? 이 소설 또한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일단 배경은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하지만 배경지식이 없어도 이 소설은 쉽게 읽힌다. 좋게 말하면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쓰여진 것이고(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이 소설에서 역사라는 것은 단지 주인공들의 ‘배경’으로만 그 역할을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거기서 이 소설의 가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줄거리를 따라간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소설은 눈물샘을 건드리며 흐느낌을 자아낸다. 우리가 슬픈 TV 드라마를 보고, 연애소설을 보며(시한부 인생을 사는 주인공이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죽는 결말 등) 우는 것은 그 내용이 무슨 심오한 뜻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감정이야말로 가장 주관적이며 공감성을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영역 아닌가. 복귀와 아내 가진, 딸 봉하와 아들 유경의 가족사는 어쩔수 없이 슬프다.

실컷 고생만 하다가 가버린 가진,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린 봉하, 헌혈하다가 어이없게 죽어버린 유경. 이들의 이야기는 다소작위적인 면도 엿보이지만 가슴 한곳이 저려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소설 앞부분에서 노름하다가 돈을 날려버리는 이야기야 주위에 널린 흔한 이야기이지만, 좀 행복하려고 하면 다시 불행해지고, 불행한 상황이 좀 지나가면 자그마한 행복이 오는 이야기 전개는 우리의 감정을 능숙히 조절한다.

그렇게 소설은 불행을 향해 치닫는다. 양념처럼 행복이 감질나게 오는 인생사 속에서 결국 복귀는 노인이 되어 혼자 남는다.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그를 떠나간다. 마치 ‘가을의 전설’에서 트리스탄의 곁을 모두가 떠난 것처럼. 그의 옆에는 늙어빠진 소 하나만 남아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

어쩌면 작가 ‘위화’는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민중의 낙천성에 대해 말이다. 신경림이 말한 갈대나 농무처럼, 아무리 자신들을 할퀴고 뜯어버리는 역사의 손아귀 안에서도 그저 ‘살아나가는’ 민중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역사의 거시성에 대해 너무 절망해버린 민중들에 대해서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역사소설에는 역사에 대한 사명이 존재한다.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미시적인 관점,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살아간다는 것’ 또한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민중의 삶 또한 거대한 역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소중하다면 역사에 상처받아가며 살아가는 ‘복귀’ 또한 분명한 역사의 주체이다. 비록 ‘살아간다는 것’에서 다루어지는 역사가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는다고 이 책을 역사만 분리해내서 ‘눈물빼는 소설’로만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싫든 좋은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민중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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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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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판타지 소설이나 SF는 제외하자. 여기서 말하는 짜릿함은 말초적인 그것뿐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싹싹 긁어주는 시원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는 기쁨과도 일맥상통한다.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은 이를 다 가진 책이다.

부제가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이다. 엑스 리브리스는 '~라는 책에서'라는 뜻이다. 이 책은 그가 읽은 책에서의 문장에서 그가 받은 느낌과 사회현상전반의 문제점을 연결시켜 논한, 그만의 날카로운 비판감각과 문체를 즐길 수 있는 '철학책'이다. 책의 머리말에서처럼 고상하고 정신적인 철학이 아니라 차라리 광대가 되어 질펀하게 싸움질하는 실천적인 철학. 그안에 자유로운 인간인 진중권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사상 중의 하나는 국가가 우리에게 행사하고 있는 무언의 압력과 폭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주민등록증 제도, 각종 신고제도 같이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해서 가차없이 화를 내고, 이를 받드는 조선일보같은 거대언론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한다. 물론 그 외에도 성(性), 공동체, 지식인 등 다양한 테마에 대해서도 그의 날카로운 메스는 쉴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서든지 그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상을 포기하지 말라고 끓임없이 독자를 설득한다. 짧으면서도 날카로운 유머를 담은 성찬을 내밀며 말이다.

전작 <시칠리아의 암소>보다 다소 이 책은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의 이른바 '똥침을 날리는' 비판과 자유로운 그의 생각을 살살 따라가기만 한다면 어느새 진중권의 팬이 되어있을테니까.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상하게 잘 돌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의문과 비판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와 이 책이 원하는 것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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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재 동문선 현대신서 41
아티크 라히미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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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리내어 울고 싶을 정도로 감정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무리 슬퍼도 그저 속으로만 삭혀야 하는 것이지요. '흙과 재'에서의 다스타기르의 슬픔은 후자에 해당되는 듯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살아갈 터전을 잃었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손자 야씬은 귀가 멀어서 할아버지의 슬픔을 받아줄 수가 없지요.

이 책은 명분도,내용도 없는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다스타기르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원망하고,가족을 그리워하고,손자를 안타까워합니다. 이 모든 것을 속으로만 뇌까리며,그는 이 참담한 소식을 탄광에 일하러 간 아들에게 전하러 가야합니다. 살아남은 자의 처절한 형벌이지요.

우리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위로를 건넵니다. 그래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처참하게 죽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살아남아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며,처참했던 전쟁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정신대의 할머니나 히로시마의 원폭투하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안은채 평생을 괴로워합니다. 혹은 육체적 상처로 괴로워하고, 혹은 정신적 상처로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고통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게다가 평생을 갈 정도의 고통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요.

우리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그저 겉만 보고 '괜찮을 거야'라고 짐작해버리지요. 하지만 다스타기르의 독백을 따라가다보면,야씬의 '왜 소리를 다 삼켜버린거지?'라는 얘기를 듣다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감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겪어보지 못한 전쟁의 아픔이 아무리 추상적이어도 말이지요.

이 책을 읽다보면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벌써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비관적인 설정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아들에게도 일종의 배신을 당한채 터덜터덜 걸어나가는 다스타기르의 뒷모습을 응시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결국 우리는 희망을 찾아야만 할것 같습니다. 가스타기르의 처참한 모습에서라도, 야씬의 처량한 모습에서라도. 그것이 아무리 말라붙은 한조각의 희망이라 해도.

결국 우리는 살아나가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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