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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역사와 소설의 관계는 어떠할까? 뜬금없는 질문처럼 들린다면 역사와 역사소설의 관계는 어떠할까? 소설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 질문이 영 관계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거대한 것이다. 그 거대함에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다.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일어났고 혁명의 주세력이 부르주아라는 것만 알 수 있지 특별한 관심이 없는 한 그 안의 민중들이 어떻게 혁명에 참가하고 그것을 이루어냈는지는 관심 밖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물론 ‘미시사’라는 영역이 있어 역사에 대한 미세한 부분을 연구하는 분파가 있지만 아직 대중들이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역사소설이 할 일이 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민중들의 삶을 가까이 느낄수 있는 기회를 역사소설은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허구’라는 방식을 빌리고 있지만 그 점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가? 이 소설 또한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일단 배경은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하지만 배경지식이 없어도 이 소설은 쉽게 읽힌다. 좋게 말하면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쓰여진 것이고(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이 소설에서 역사라는 것은 단지 주인공들의 ‘배경’으로만 그 역할을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거기서 이 소설의 가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줄거리를 따라간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소설은 눈물샘을 건드리며 흐느낌을 자아낸다. 우리가 슬픈 TV 드라마를 보고, 연애소설을 보며(시한부 인생을 사는 주인공이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죽는 결말 등) 우는 것은 그 내용이 무슨 심오한 뜻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감정이야말로 가장 주관적이며 공감성을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영역 아닌가. 복귀와 아내 가진, 딸 봉하와 아들 유경의 가족사는 어쩔수 없이 슬프다.
실컷 고생만 하다가 가버린 가진,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린 봉하, 헌혈하다가 어이없게 죽어버린 유경. 이들의 이야기는 다소작위적인 면도 엿보이지만 가슴 한곳이 저려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소설 앞부분에서 노름하다가 돈을 날려버리는 이야기야 주위에 널린 흔한 이야기이지만, 좀 행복하려고 하면 다시 불행해지고, 불행한 상황이 좀 지나가면 자그마한 행복이 오는 이야기 전개는 우리의 감정을 능숙히 조절한다.
그렇게 소설은 불행을 향해 치닫는다. 양념처럼 행복이 감질나게 오는 인생사 속에서 결국 복귀는 노인이 되어 혼자 남는다.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그를 떠나간다. 마치 ‘가을의 전설’에서 트리스탄의 곁을 모두가 떠난 것처럼. 그의 옆에는 늙어빠진 소 하나만 남아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
어쩌면 작가 ‘위화’는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민중의 낙천성에 대해 말이다. 신경림이 말한 갈대나 농무처럼, 아무리 자신들을 할퀴고 뜯어버리는 역사의 손아귀 안에서도 그저 ‘살아나가는’ 민중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역사의 거시성에 대해 너무 절망해버린 민중들에 대해서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역사소설에는 역사에 대한 사명이 존재한다.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미시적인 관점,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살아간다는 것’ 또한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민중의 삶 또한 거대한 역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소중하다면 역사에 상처받아가며 살아가는 ‘복귀’ 또한 분명한 역사의 주체이다. 비록 ‘살아간다는 것’에서 다루어지는 역사가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는다고 이 책을 역사만 분리해내서 ‘눈물빼는 소설’로만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싫든 좋은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민중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