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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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들어가는 말
내 것이면서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수많은 대답이 나오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몸'이다. 자신의 몸. 아마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내 몸으로 걸어다니고, 내 몸으로 생활하며, 내 의지로 몸을 움직인다. 이러한 몸이 내 맘대로 할수 없는 것이란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재 나의 몸은 과연 나만의 주체적인 의지로 존재하는 것인가? 자신이 하고 있는 다이어트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소위 '이상적인' 몸의 모양을 왜 부러워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남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몸을 '못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현재 가장 뜨거운 화두인 '몸'. 아름답고 날씬한 몸을 가진 사람이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되고, 몸에 따라 개인의 가치와 이미지까지 '단번에' 평가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날마다 다이어트에 대한 기사와 광고들이 우리를 유혹하며, 대중매체에서는 날씬한 몸을 가진 배우들과 모델들이 미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한번쯤은 "왜?" 라는 물음을 던져볼 만도 하다. '몸-숭배와 광기'는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된다.

2. 본론

이 책은 일단 문화적·역사적 맥락과 사회 심리학적 맥락에서 아름다움을 해석하고 있다.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본 아름다움의 내용은 문화와 역사에 따라 각각 다른 아름다움의 기준을 보여주면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과거 루벤스의 명화나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에서 보이는 미인들의 특징이 '풍만함'이었음에 비하여 현재 미인은 마르고 탄탄하면서 여성적인 매력을 잃지 않는 몸을 가진 여성이 미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미인의 기준은 특히 현대사회에서 미용산업, 유행과 함께 사회적 기반을 탄탄하게 지니고 있다.

미인의 기준이 되는 '몸'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은 노력한다. 이러한 여성들을 위해 미용산업은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한다. 열흘만에 10킬로그램을 뺄 수 있다는 약, 땀흘리지 않고 편하게 살을 빼준다는 운동기구, 늘어진 주름을 말끔히 없애줄 수 있다는 주름방지용 크림. 이러한 물품 앞에서 한번쯤 망설여보지 않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덕분에 미용산업은 전세계적으로 한번의 불황도 겪은 적 없이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늙고 주름이 생기며 몸 또한 그러하다. 계속 지속적으로 운동을 땀흘려 하지 않는 이상, 여기에다 엄격한 식사조절을 더하지 않는 한 이상적인 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자신에게 투자한다는 생각에 여성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몸에게 시도하고, 도전하고, 절망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알수도 있고, 모를수도 있다. 아니면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 심리학적 맥락에서 본 아름다움에서는 이 부분을 파헤친다.
한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또다른 사람들, 대중매체는 복잡한 매커니즘을 이루며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사회화 과정에서부터 인간은 관습의 위력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아름다움의 기준이 정해져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칭송한다면, 사회속의 인간은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화 과정에서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고, 특히 딸을 키워내는 어머니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아름다움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이 어떻게 전해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 딸에게 살을 빼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가진 미의 기준을 딸은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만약 어머니가 미에 대한 다양한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대중매체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수많은 광고, 영화, 드라마에서 제시하는 획일화된 미인들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미디어의 사회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특히 청소년기에 각종 미디어가 끼치는 영향은 무시할수 없을만큼 위력적이다. 미의 기준이 되는 배우들이나 모델들 또한 미디어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이러한 환경과 과정 속에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성들은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이상적인 몸을 가질 수는 없다. 몸은 각자 체질을 가지고 있다. 체질은 개인마다 다양하고 일생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전적인 요소가 있다면 마른 사람은 끝까지 마른 경우가 많고 살이 찌는 사람은 아무리 공들여서 살을 빼도 요요현상이 일어나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미용산업의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몸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미용산업 및 유행을 주도하는 기업들은 앞의 사실을 은폐하고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며 여성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주위에서 살이 찐 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느니, 게으르다느니 하는 말로 공격당하는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부정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이 과연 '아름다운' 기준이 존재하는 현실일까? 현재의 몸의 기준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이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만드는 기준이라면 과연 그 기준은 옳은 것일까? 그리고 그 기준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이러한 기준들은 이제 남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얻는 남성들은 잘 다져진 근육질 몸매나 꽃미남 스타일이 대부분이다. 아직은 인기있는 남성들의 이미지가 다양하지만, 곧 여성처럼 획일화될지도 모른다. 이제 사회에서는 남성들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획일화된 미의 기준은 굳이 여성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룰수 없는 허상을 제시하며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

3. 결론

앞의 얘기를 다 읽고 나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이쁜 게 죄야? 솔직히 날씬하고 얼굴 예쁘면 보기 좋잖아!"
물론 좋은 일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움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 덕분에  수많은 예술의 탄생이 가능했다.(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기준은 예술가마다 다 달랐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척도가 단지 한가지가 되고,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맞춰야 하고, 그 기준에 미달되면 비난을 받는 현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다양성을 존중할 때 존재한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비록 조금 살이 쪘다고, 피부가 조금 더 거칠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지 말자. 결국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안식처가 아닌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남의 눈을 통해 확인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확인하자. 자신에게 조금의 애정과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혹시 앞의 말이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 는 상투적인 말로 들리는가? 그리고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외면을 긍정하는 방법부터 배우는 것이 좋다. 결국 같은 얘기니까.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다양함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을 배운다는 것. 외면적·내면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얻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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