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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황금빛 유혹 ㅣ 다빈치 art 9
신성림 지음 / 다빈치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많은 화가들과 그림이 있다. 선사시대의 뜻 모를 벽화까지 그림으로 간주한다면 아마 우리가 봐야 할 그림들은 너무 많아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미술교육은 꿈 많은 학생들을 그림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림을 골라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미술학도가 아닌 이상, 그림을 선택하는 하나의 기준은 소위 '유명화가'이다. 미술사를 장식한 '무슨무슨 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 피카소나 고흐, 고갱 등은 그 방면에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씩은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클림트는 어떤 범주에 들어갈까? 아마 그는 그림이 너무 유명한 나머지 이름은 그다지 알려질 수 없었던 그런 화가가 아닐까. 그의 대표작「키스」는 너무나 유명해서 그를 모르는 사람도, 그림의 제목을 잘 기억해내지 못한 사람도 그림을 한번 보면 "아 그 그림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사람을 끄는 데가 있다. 화려한 색상과 달콤한 주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그림'의 의미(자고로 그림은 화려해야 하고 색채가 좋아야 하며 큼직해야 한다)에 가장 합당한 그림인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그의 그림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환상적이면서 음울한 배경들, 화려한 문양, 불분명한 대상의 윤곽, 여성들의 에로틱한 자세와 표정 등 그의 그림들은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몰고 다녔다. 여기에 여성을 단지 성적인 의미로만 묘사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공격까지 가세되어 새로운 논란을 놓았다.
어디에 답이 있을까? 미술처럼 애매한 영역에 답이 있을리 없다. 각자의 의견만 남을 뿐이다. 신성림의『클림트, 황금빛 유혹』은 그 의견 중의 하나이다. 단지 읽어보고 참고만 하시고 자세한 것은 그림을 '뚫어지게 보시길' 권한다.
클림트의 그림은 많다. 풍경화도 있고, 저택을 장식한 벽화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뺀 이유는 클림트의 특징은 여인들을 그린 그림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클림트의 개성이 단지 '에로틱'으로만 축약될 수 있고,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클림트와 그의 그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키스」의 이미지에 반한 수많은 사람들이 클림트의 다른 그림들에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거라고 확신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림만큼 감정적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영역도 없다. 세세한 눈으로, 애정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인 전제가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눈으로 보되, 그것을 보는 자신의 주관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처음엔 가이드가 필요할 것이고, 주위의 소개도 필요할 것이다. 훌륭하다고 공인된 작품만 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매이지는 말자.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들이 공인한 작품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림을 보는 관람객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좋은 그림만은 아닌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에도 다양한 시각과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되, 거기에 너무 빠지거나 광신하지는 말자. 결국 그림을 보는 것은 관람객 우리 자신이 아닌가.
클림트만은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좋아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클림트도 어느 사람에게는 "우와!" 하는 탄성을 내지르게 할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뭐야 이거!" 하는 불만의 소리를 토해내게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지는 않다, 다 맞는 얘기가 아닌가. 다만 한 화가와 그림에만 너무 빠지지 않는, 하나의 견해에만 너무 치우치지 않는 그런 자유로움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양함을 겪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의 작은 토대로,『클림트, 황금빛 유혹』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