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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 연약한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내는 셀프 심리학 ㅣ 자기탐구 인문학 2
김혜령 지음 / 가나출판사 / 2020년 7월
평점 :
자기 마음의 안부를 묻는 데는 서투르고 낯설어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어떤 사건에서 우연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
실제로 우울증을 겪지 않는 사람과 우울증을 겪는 사람의 차이점 중 하나는 복잡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걸 흘러가게 하는지, 아닌 지에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의심'은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자라면서 점차 성격의 일부가 되어버렸고요.
지금도 '생존'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마음의 안정에는 도움이 안 되는 기능이지요. 오히려 괴로움의 원인만 되고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면 기쁨과 행복감을 더 자주 느낄 수 있을 텐데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평온한 마음' 즉, 행복감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공부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건 몸에 새겨져 있지 않거든요.
그전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싶어 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나'에 대해서는 오히려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서요.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 때문에 괴롭다면 그건 내 감정의 통제력을 상대에게 내어주고 있는 겁니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 라인홀드 니부어 '평온을 구하는 기도' 중에서
취업만 하면 몹시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은 현실, 오랫동안 고대했던 친구와의 여행이 싸움으로 막을 내린 경우 등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도파민 수준이 떨어져서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고, 더 큰 즐거움을 맛볼 달고나를 또다시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행위를 했을 때 쾌락이 있어야 갈망할 것이고, 그 즐거움이 금세 시들해져야 다시 그 행위를 원하게 되겠죠. 또 쾌락이 시들해진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적당히 어리석어야 다시 '먹기'와 '섹스하기'를 시도하려 들 겁니다.
갈망하는 게 있음 → 안달남 → 괴로움
갈망하는 걸 얻지 못함 → 괴로움
갈망하는 것 얻음 → 언젠가 끝남 → 괴로움
갈망하는 걸 얻었으나 기대에 비해 부족함 → 괴로움
크게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으로 나누었을 때, 좋은 느낌은 우리에게 이로운 사물에 접근하게 만들고 나쁜 느낌은 해로운 사물을 피하게 만든다고요.
건강에는 좋지 않지만 입맛을 자극하는 식품들이 늘어났으니까요. 즉, 환경의 차이로 인해 더 이상 '먹고 싶은 음식=몸에 좋은 음식'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죠.
운동이 너무 가기 싫은 날에 억지로 어떻게든 운동을 가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운동하고 난 후 몸이 훨씬 가뿐하고 의욕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그대로 따르는 건 내게 이로운 방법이 아닌 거죠.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는 죽어버릴 테니까요.
행복해지고 싶다면 일시적인 즐거움에 집착하기 위해 술, 마약, 소비 등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감정에 대해 열린 마음이 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나를 이해하고 보살피고 성장하는 것 같은 더 넓은 차원에서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질문자와 스님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노라면 질문자가 어떤 생각의 틀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틀 속에서 대부분이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괴로움을 유발하는 대상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있었죠.
'아, 다들 자기 세상 속에 살고 있구나. 어쩜 우리는 모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은 자아가 형성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하나씩 갖게 됩니다. 내가 주인공인 나만의 우주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우주 속에서 살고 있어요.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는 언제든 옳습니다. 나만의 세계에서는 내가 타인을 보는 방식이나 그들에 대한 판단과 평가 모두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타인과의 만남에서도 나만이 옳다고 믿을 때 문제는 발생합니다.
A가 보는 김철수도, B가 보는 김철수도 진짜일 수 있어요. 다만 전체가 아닌 김철수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각자의 시선으로 본 김철수만 존재할 뿐인 거죠.
투사란 대인관계나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심리 상태나 성격이 반영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세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상황에다가 투사를 합니다. 열등감, 공격성, 두려움은 투사되기 좋은 요소입니다. 여우의 눈엔 여우가, 곰의 눈에는 곰이 보이는 겁니다. 낙천적인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즐거운 곳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걱정거리도 보이는 것도 당연할 테고요.
모두가 자기 그릇만큼만 타인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서 타인은 적대자가 될 수도 협력자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상대방을 물음표의 상태로 둔다는 건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그 상대에 대해 더 호기심을 갖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그건 진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언제든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타인에게 내 욕구를 강요하지 않게 될 거예요. 나의 잘못된 기대로 인해 타인에게 쉽게 실망하는 일도 줄어들 거예요.
내게 좋은 것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나를 위한 긍정적인 감정을 '선택'하는 것
괴로운 것을 흘려보내고 좋은 생각을 강화하는 것
잠깐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을 제한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럴 때 칼을 들고 무섭게 쫓아내려 할 게 아니라, 관대한 마음으로 그저 가만히 그 생각을 바라보세요. 마치 모니터 속의 영상을 바라보는 듯이요.
'놓아두는 것, 바라보는 것,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생각에게 해야 할 태도입니다.
판단을 내려두고 생각 그 자체만 바라보세요.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거예요.
불안에 떨고 있는 마음에게 '괜찮아, 나 안 죽어,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하고 잘 보내주세요. 그리고 해야 할 일에 차분히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여 바라보는 명상. 일상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낯설게 분석하면 그 사건으로 인한 고통, 즉 자기 비하와 비관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하루 중 몇 분이라도 일상과 분리되어 쉬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상이 낯설게 느껴지신다면 책을 통해서 잠깐씩 쉬어가세요.
5분 혹은 10분만이라도 정해진 시간 동안만 계속 '알아차린 뒤에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