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이번엔 식물학인가(역사물이라기엔 좀..;;). 히가시노 게이고 정말 대단하다. 히가시노 게이고 본인이 이렇게 긴 시간(10년)과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은 여태껏 없었다고 말해서, 읽기 전부터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가 엄청 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읽고 난 후, 감탄하게 되는 작품도 있지만 실망하게 되는 작품도 여럿 있어서 <몽환화>는 어떨까 했는데 읽어 본 결과 기대는 충족시켜 준 소설이었다.

소설은 두 개의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첫 번째 프롤로그. 평범한 가정의 아침 모습이다. 아침 식사 후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아내는 아이를 안고 남편과 집을 나선다. 행복한 그들에게 갑자기 일본도를 휘두르는 한 남자. 남편이 먼저 칼에 맞아 쓰러지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던 아내 역시 칼에 맞아 쓰러진다. 역시, 초반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두 번째 프롤로그. 중학생 소타는 가족들이 매년 칠석 무렵, 나팔꽃 시장으로 나들이를 가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장어 때문에 따라나선다. 나팔꽃 구경을 하다가 발이 아파 잠시 휴식을 취하던 소타 앞에 예쁜 한 소녀가 나타난다. 소타의 첫사랑이었다. 소타는 그 소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행복했는데 어느 날 소녀가 이유도 말해주지도 않고 차갑게 떠나자 속상해한다. 이렇게 프롤로그가 끝이 난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개의 프롤로그에 이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과연 프롤로그의 인물들이 어떻게 사건과 연결될 것인가. 너무 궁금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한 노인이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그 노인은 은퇴 후 조용히 꽃을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다. 꽃이 유일한 대화상대.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꽃을 아꼈다. 노인의 사체를 처음 발견한 것은 손녀딸 리노였다. 리노는 가끔 할아버지 댁에 들러 할아버지의 꽃 사진과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며칠 전 할아버지는 리노에게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리노는 사건현장에서 그 꽃의 화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리노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그 노란 꽃이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 사건을 좇기 시작한다.

거기에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소타, 형사 하야세의 시점에서 소설은 빠르게 진행된다. 보통 읽으면서 어느 정도 범인의 윤곽을 잡곤 했는데, 이번엔 실패했다.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0년 전에 연재한 소설을 '노란 나팔꽃'이라는 키워드만 남기고 전면적으로 다시 썼다고 한다. 십 년 전이 아니라 지금이라서 더 <몽환화>가 빛을 발하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서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라고 말하던 소타. 작가의 바람이 스며든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