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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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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화장을 지우고 맨 낯으로 나타난 당신

사흘 째 비가 오던 어느 날, 뺄라요와 엘리쎈다 부부는 자기 집 마당에서 처참한 몰골을 한 노인을 발견한다. 그 노인에게는 거대한 날개가 붙어있다. 그는 천사일까? 유전적 돌연변이일까?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가운데 다양한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부부는 날개달린 노인을 보여주는 대가로 관람료를 받고 부자가 된다.

이 책에 수록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68년 작, ‘거대한 날개 달린 상늙은이’에는 이러한 초자연적이고 기이한 사건들이 넘쳐난다. ‘마술’의 영역에 속한 이러한 사건들과 ‘사실’세계를 보여주는, 날개달린 노인을 상품화하는 현실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모습.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러한 환상과 사실의 혼합적 이야기를 스페인어권 문학의 전부라고만 알고 있었다. 나는 문학적 은유로 가득 찬,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소설을 읽고 싶을 때면 이 지역의 문학을 떠올렸고, 지금까지 읽은 이 지역의 소설들은 언제나 나를 낯선 체험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나에게 익숙한 체험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그 소설들이 들려주는 신기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지역의 소설에 탐닉했으니까.

그러나 창비세계문학전집 속의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지역 19개의 단편은 내게 마술적 사실주의만이 그곳의 문학은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 소설집을 통해 내가 보게 된 것은 그들 문학과 현실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맨 얼굴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공중부양하거나 부모의 말을 어겨 거미가 되지 않는, 우리처럼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제발 다음 소설은 좀 더 밝았으면’하면서 책을 읽어나갔을 정도로 책에 수록된 단편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두웠다. 특히나 성년이 되도록 억지로 목동 일을 맡은 남자가 어느 날 자신을 무지렁이로 만든 삼촌에 대한 분노의 폭발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아나 마리아 마뚜떼의 ‘태만의 죄’나 어린 여동생을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네 명의 바보 형제들이 나오는 오라시오 끼로가의 ‘목 잘린 암탉’과 같은 작품들은 독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작가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실과 경험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스페인 내전, 인구 다수가 문맹인 출판환경, 작가의 가족사적 비극 등이 아마도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러한 사회적 영향은 지역의 척박한 문학풍토와 정치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국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모데르니스모 운동을 주창한 루벤 다리오의 ‘중국 여제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조각가가 애지중지 모시던 중국 여제 흉상과, 그 때문에 부부 간의 뜨거운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의 아내 사이에서 최후의 승자는 결국 그 중국 여제 상을 바닥에 집어던져 깨뜨린 조각가의 아내다. 의도적으로 지역적, 토착적인 요소들을 피하고 이데아와 현실, 예술과 자연, 육체와 영혼과 같은 이분법적 가치에만 집중한 이러한 소설들이 큰 조류를 만들었다는 것은 길이 보이지 않는 사회현실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물론 이렇게 불행하거나 상징적인 등장인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전기가 들어오고 철도가 개통되면서 끝내 할머니 암소와 농장을 잃게 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레오뽈도 알라스(끌라린) ‘안녕, 꼬르데라’),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들의 자존심과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 복서의 길을 걸으며 오늘도 링에 오른다.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 모든 것이 바짝 말라버린 가뭄 속에서 노부부의 삶에 등장한 어린 아이를 통해 ‘평범한 사물들은 하나 같이 화려하게 옷을 입었고’, 그들은 ‘예전에는 전혀 중요치 않았던 물건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게 되었다’(p156). 아이가 사라져버린 날, 그들은 시원스럽고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이하게 된다. (아르뚜로 우술라르 삐에뜨리 ‘비’)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단편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고난의 순간에도 끝내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는 위대한 범인(凡人)들이다.

스페인, 라틴아메리카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도 주목할 만하다. 주변으로부터 소외되고 수동적이었던 브리히다는 하루 종일 어두운 그늘을 제공해주던 집 앞의 고무나무가 쓰러져 햇빛이 들어오던 날 가부장적 굴레를 깨닫고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마리아 루이사 봄발 ‘나무’) ‘그녀는 유폐된 목마른 식물이 더 적절한 기후를 찾아 가지를 뻗치듯 그의 호흡 아래서 살려고 발버둥 쳐왔지만’(p185),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가 없어진 방에 ‘사방에서 들어오는 칙칙한 빛’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p.193) 보여주며 그녀의 체념과 침착함이 거짓임을 깨닫는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이다. 칠레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국가이고, 70년대가 되어서야 여성작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193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매우 선구적이다.

그러나 여성작가에게 남편이라는 배우자의 존재만이 굴레인 것은 아니다. '마르께스의 복사판'이라는 평가를 넘어 독자적인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이사벨 아옌데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라는 '사전'을 버렸다. 자신이 모은 돈으로 사전을 구입하지만 '포장된 말'을 팔고 싶지 않아 이내 바다에 던져버리는 '두 마디 말'의 주인공 벨리사는 작가인 이사벨 아옌데의 분신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마르께스를 통해 알게 된 마술적 사실주의의 세계를 넘어 스페인어권 문학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마르께스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만 했다. 나는 일단 ‘언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려나’하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고 소설이 하나하나 시작될 때마다 그저 가만히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를 경험하였다.

물론 그런 낮선 경험은 소설마다 앞뒤로 붙은 친절한 배경설명과 더 읽을거리를 통한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내가 이 서평에 지역의 현실과 문학적 배경에 대해 이 정도라도 보태서 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책의 풍부한 해설 덕분이었다. 이러한 배경지식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보게 된 스페인어권 문학의 맨 얼굴은, 때론 처절한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시공간을 넘어 독자에게 공감을 폭을 넓혀주는, 다름 아닌 인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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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절판


창 밖에 있는 창살을 보면 무척 마음이 놓인다. 창문을 열고 자도 괜찮다. 창살이 없다면 누군가 기어 올라올까봐 무서울 것 같다. 설령 누군가 창에 얼굴을 대고 찡그린다거나 혀만 쑥 내민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환자가 창문 너머로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워있는 곳은 삼층이다. 이곳에서 뛰어내린다고 정말 죽을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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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힘이 세다
이철환 지음 / 해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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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나 유도나 격투기 같은걸 오래하면 아무리 약골일지라도 

점점 싸우는 능력이 좋아진다.  

만약 이 책의 제목처럼 눈물이 힘이 세다면 

울면 울수록 고난을 이기는 힘이 강해진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운다고 해서 고난이 이겨지는 건 아니었다.  

전에도 많이 울어보았다고 이번엔 고난을 좀더 쉽게 넘기는게 아니었다.  

눈물로 해서 강해지는 것은 '이기는' 힘이 아니라 '견디는' 힘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지독히도 가난했고 부모님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가난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다. 미술시간에 바다를 그리면 파란색 크레파스를 오랫동안 빌리기가 미안해서 어쩔수 없이 물고기를 잔뜩 그려넣는다.  

국민의 대다수가 최소한 '상대적' 가난의 아픔 한가지 이상쯤은 가지고 있고  

아무리 화목해 보여도 문제없는 집안, 안 싸우고 사는 집안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흔히 가질 수 있는 고난이라고 해서 흔하고 쉽게 이겨나갈 수는 없다.  

더 많이 가질 수록 더 큰소리치고 사는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 홀로서기를 하고 세상을 살아나간다는건 어린 아이에게나 다 큰 어른에게나 힘든 일이다.  

지금까지 많이 다뤄왔던 주제를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시선으로 그려내긴 했지만 

그래도 글의 문장은 짧고 종종 리듬감이 있어서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저자의 '연탄길'과 크게 다른 점이나 더 나아진 점도 찾을 수 없었다.  

저자는 그냥 항상 이런 이야기를, 이 정도의 시각과 필치로 그려나가는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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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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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내심(內心)’이라고 한다. ‘달을 먹다라는 제목은 책을 내면서 바뀌게 같은데 바꿨을까? 내심이 훨씬 나은데

사랑이야기는 흔하기 때문에 그만큼 쓰기가 어려운 같다. 마르케스의 콜레라시대의 사랑 남자가 여자를 평생 짝사랑하는 가지고 두권을 채우느라 결국은 해피엔딩인데도 읽는 내가 진이 빠졌었다.

달을 먹다 권의 안에 최소한 서너 가지 이상의 사랑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번엔 정신이 없다. 책은 겨울, , 여름, 가을로 넷으로 나눠져 있고 각각의 속에는 묘연의 첫번째 이야기’’기현의 이야기식으로  여러 이야기들이 두세장씩 들어있다. 처음엔 글들이 두세장씩 끊어지니 쉬었다 기억하기도 좋고 조선시대 이야기 임에도 지루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여러사람들의 이야기가 얽혀있어 자꾸 호흡이 끊긴다. 누가 누구였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기현의 이야기라는데 기현이 누구였지? 하면서 다시 앞장을 들춰본 일이 다반사였다.

다음은 문장. 작가는 소설 하나를 쓰기 위해 엄청다양한 자료들을 보고 오랜시간 조선시대의 풍습이나 문학작품들에 대해 조사했을 같다. 그가 모든 문장들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지금쯤 나는 조선시대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소설에도 깊이 빠져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말로 소설임에도 내가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정도면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겠지만 나의 경우엔 소설에의 몰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스토리를 파악하는 까지도 힘들게 만들었다. 국어사전이라도 찾아가며 읽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공글러 속으로 밀어넣어두었던 마음들이 추야장 잘깃한 괴로움을 어쩌지 못하고 제풀에 매워졌다.”(p.193)

나는 공글러가 명사인지 부사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여문의 부인인 양지에 대한 설명 부분.

매사를 사날로만 해결했고 오만방자했으며 안하무인이었다.” (p.106)

사날이라는 단어는 처음이다. 이럴 그냥 문맥상 짐작해서 이해한다. 다음은 묘연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

첨첨지말이라고 아주 뾰족하니 날렵한 버선을 신고 소리없이 흐느적거리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면 나는 저절로 속이 메슥거렸다.

아버지가 묻히고 들어오는 바깥 밤바람은 비릿했다. 쇠북이 서른 세번 울어 파루가 끝나면 어김없이 귀가하던 아버지의 냄새였다. 오는 꼭꼭 숨겨둔 달거리포처럼 역했다.”(p.13)

첨첨지말, 쇠북, 파루, 달거리포. 부분에선 내가 모르는 말이 개나 나온다. 이럴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넘어간다. 이런 식으로 읽으니 소설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영어소설 읽는 기분이다.

고증을 거쳐 조선시대스러운 문장을 만드는 것과 누가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되는 문장을 쓰는 . 어느 것이 우선일까? 나는 대학까지 마쳤지만 소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문학적으로는 완성도가 높고 아름다운 문체일지 모르지만 나는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아주머니,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도 읽을 있는 문장이 좋다. 나는 그런 문장을 선호한다. 다른 대중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있지만 문장 만큼은 대중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보면 정신없다’, ‘자기 멋에 빠진 문체다라는 불평들이 공통적으로 나오는데 역시도 공감하는 바다. 사실 그의 문체가 취향에 맞지 않다 뿐이지 그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문학의 발전에 있어서는 이런 식의 문체로 만들어진 작품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내공을 쌓아 독자들에게 흡인력이 있는 문장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소설로 등단한 작가이므로, 앞으로 점점 나아지는 좋은 작품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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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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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쉰들러 리스트 등 2차대전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작품들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2차대전이라는 전쟁과 전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바라보게 해 준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하게되는 일들이 있다.
라면먹기. 건강에 해로운줄 알면서도 그 매큰한 맛의 중독성에 먹는다.
새치기. 내가 편하기 위해 다른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다.
스파이. 타인의 정보를 몰래 빼돌리는 건 부도덕한 일이다.
이런 일들에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한 대의명분 같은 게 따르기 마련인데 스파이의 경우 국가나 회사 등 상위조직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이 붙는다.  


하워드. W. 캠벨 2세는 2차대전 당시 나치로 가장한 미국 측의 스파이였다. 그는 독일국민을 선동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며 기침이나 말실수 등의 암호로 미국 측에 정보를 전달했다. 캠벨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그 시절 나치의 앞잡이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줄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 불의를 묵과했다. 그들에게는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이 붙었고 ‘돈만 아는 욕심많은 유대인’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었다. 그러나 캠벨은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그는 미국을 위한 첩보원이었으니까. 때문에 그의 죄는 일부 감해지기도 한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보면 주인공의 고모인 노수녀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위선적인 사람을 못됐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평생동안 죽을 때까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위선적이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들키지 않고 위선적이었던 사람은 결국 착한 사람의 삶을 산 셈이다.
2차 대전 내내 애국심이 높은 나치의 앞잡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캠벨. 그는 남몰래 나치의 정보를 빼돌렸지만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는 히틀러와 나치에게 충성을 다한 라디오 선전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니 그 주변에 그가 혐오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당연하다. 

 
무식한 미치광이 인종차별주의자인 치의학 박사 겸 신학박사 라이오넬 J.D. 존스목사.
진실한 우정을 내세워 캠벨을 음모의 소굴로 끌어들인 소련의 스파이 조지 크래프트.
파문당한 신부이자 성 바울파인 존스의 비서 패트릭 킬리.
일본군 첩보원으로 ‘할렘의 흑인지도자’라고 불리는 윌슨.
독일계 미국인 협회 부회장을 지낸바 있는 존스의 경호원 크랩타우어.
그리고 또 중요한 한 사람. 여전히 형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죽은 언니를 흉내내어 접근한 캠벨의 어린 처제.  


캠벨을 2차 대전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죽이려고 드는 뭇 사람들이나 위대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나 캠벨의 ‘감쪽같이 사람들을 속였던’ 과거만으로 그를 평가하긴 마찬가지다.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라고 하면서 캠벨을 이용하려고 했던 소련 스파이 조지크래프트도 역시.
결국 캠벨 곁에는 자신을 속여 이득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 외엔 남지 않는다. 어쩌면 2차대전의 숨겨진 영웅으로 평가 받아야 할 캠벨은 더이상 친구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잡아가 달라고 자수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커트 보네거트의 글엔우리가 평상시에 볼 법한, 그래서 별로 특별나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등장해 그 사람들이라면 응당 할 법한 이야기를 한다. 근데 그게 재미가 있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엔 유머와 어두운 세상의 이면이 공존한다.  

우리나라로 무대를 옮긴다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항상 개구리 무늬 군복을 입고 다니는 재향 군인회 회장이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목사 쯤 되겠다. 어느날 이들이 일제시대 때 유명한 친일파였던 매국노 이완용을 자기들과 같은 편이라고 여기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완용은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의 스파이였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니 좀 더 익숙한 구도가 된다.  


한국의 실제 이완용은 자신의 일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그의 자손들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캠벨은 그와는 다르다. 자신이 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스스로를 경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은 유대인을 아무나 불러 자수하고 나중엔 감옥에서 자살한다.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해야 할까?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성실한 남편, 러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유명세를 떨친 숨겨진 작가(2차 대전 후 누군가 버려진 그의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하여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 2차 대전의 애국심 높은 선전원.
그에 대한 진실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모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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