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 대역본> 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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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ma's name was Bonnie Bee. I knew that when I heard him late at night says  "I kin ye, Bonnie Bee," he was saying, "I love ye," for the feeling was in the words. And when they would be talking and Granma would say, "Do ye kin me, Wales?" and he would answer, " I kin ye," it meant, "I understand ye."  

     To them, love and understanding was the same thing. Granma said you couldn't love something you didn't understand; nor could you love people, nor God, if you didn't understand the people and God. Granpa and Granma had an understanding, and so they had a love.Granma said the understanding run deeper as the years went by, and she reckined it would get beyond anything mortal folks could think upon or explain. Andso they called it "kin." 

 <The Education of Little Tree>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것, 우리네 삶의 - 잠시 잊고 있었던, 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 기저에 놓여 있는 "가치(value)"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철학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에 살면서 도시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고, 도시의 가치들이 삶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내 삶에 있어서 작은나무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일면 새롭게, 눈물겹게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것은 기술문명시대를 과거의 원시자연상태로 후퇴시키자는 것이 아니라ㅡ, 이미 하나의 헤게모니가 되어버린 이 시대 삶의 척도-소위 '잘 살고 있'다는 것의 기준점에 대한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마시멜로한다*' (* 알랭 드 보통)라고 밖에 바꿔 지칭할 수 없는 슬픈 시대에,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 그것은 나의 존재를 확장시켜 너를 나에 동일자화하는 하이데거의 폭력적인 무엇이 아니라, 너의 아픔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이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깊어져 있었다. 그럼으로, 나는 당신을 - 진정한 의미에서 - "사랑"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떠나 보내는 것은 사랑한만큼 더욱 더 힘들고 아픈 일이 되겠지만, 작은나무는 링거를 보내면서 '이별'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I felt total bad about it, and empty. Granpa said he knew how I felt, for he was feeling the same way. But Granpa said everything you lost which you had loved give you that feeling. He said the only way round it was not to love anything, which was worse because you would feel empty all the time." 

사랑해서 '비어있는' 아픔을 느끼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그 비어있는 아픔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위로 받게 될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 추억은 좋은 것들이기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추억'이라는 이름의 과거를 돌이키며 - 일종의 되새김질을 하며 - 또 다시 추억이 될 시간들을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떠올려서 미소지을 '추억'이 없는 이가 될 것이다. 

 

한동안 비가 왔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미 맑게 개어 있었다. 그토록 세차게 내리던 비는 온 세상을 말끔히 씻어, 아침 햇살에 모든 것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 맞닿은 빗물에 흠뻑 젖지도 못하는 아스팔트 이건만, 그마저도 깨끗이 씻겨져 있었고,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어디선가 새들의 노랫소리마저 들리는 듯 하다. 늘 흐려져 있던 하늘도 오늘은 눈이 시리게 맑다. 작은 나무가 그리운 마음을 가득 실어 보냈던 그 늑대별을 오늘 저녁에는 볼 수 있을지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늑대별이 반짝이면, 나는 여기서, 작은 나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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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니 - 정규 2집 Lucifer (Type A)
샤이니 (Shinee) 노래 / SM 엔터테인먼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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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룹인 만큼, 

아직 도착도 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사실 공개된 티져사진으로는 어떤 형태일지 

통 감이 안잡혀서 ^^ 더 기대 잔뜩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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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70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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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는 순간을 살고 순간을 죽는다. 

 

여성부"가 이성부"로 읽히던 어느 추운 겨울날 밤의 순간들과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봄이 올것만 같지 않던 어느 시린 하늘의 순간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문득 시가 내게로 오'듯이 

그렇게 봄날은 문득 다시 찾아오고, 

무언가 뭉클한 것이 - 한편으로 그만큼 살갑게 또 따뜻한 것은 

그모든 순간들이 추억할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움이다. 

 

주머니 속에 잡힌 육백원짜리 네스카페의 온기만큼이나 

그 해 겨울도 그렇게 따뜻하게 데워져갔을 것이다. 

시를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 미세하지만 분명한 '온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처음 -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매 순간 스러져가는, 또 작열하는 순간들을 추억하며.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김민정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를 읽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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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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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당당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되 약자의 어려움에 대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젊은이들이 됐으면 좋겠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공정한 경쟁과 낙오자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다.
배려가 없는 사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가 아니다.
젊은이들이라면 사회적인 가치가 훼손되는데 대해 분노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힘과 돈 앞에서 불의와 타협하는 굴욕을 받아들이지 말고, 힘없는 약자에 대해 관용을 나누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 09.8.1. 오마이뉴스/ 최영찬 교수 -

 

쌍용차 파업사태로 (사태라는 용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뉴스가 시끌시끌하다.

피서 물결에 대한 보도에 이어, 각종 교통사고들, 갓길에서 화재사건, 프로야구 경기 결과, ... 그리고 파산신청서 제출?  

Banksy의 작품중에, 말그대로 'couch'에 반쯤 드러누워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아프리카 기아에 대한 영상을 보고 있는 4인 가족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선선한 바람이 드는 거실에 둘러 앉아 포도며, 한창 물이 오른 수박을 먹으며 휘두르는 몽둥이에 피투성이가 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떡해-' 그 한마디.

 

나의 고통이 아니고, 나의 어려움이 아니고.

그렇다 분노하지 못하고.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하고 가슴을 쳤을 김수영시인의 한탄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은.

부끄러울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김규항씨의 <예수전>을 읽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교리 속에서 화석화 된 '죽은' 분이 아니다.
예수님을 수식하는 많은 수식어들 그 앞에서
살아있는 예수님은, 어쩌면 체게바라가 완전히 이루지 못한 - '진정한 리얼리스트' 이자 '진정한 이상주의자'였다.
예수님은 '불의함'에 대해서 온전히 분노하셨고, 그러기에 죽기까지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만 들어왔던 우리는
아주 한참이나 그 '사랑과 용서'라는 개념을 맹목적인 용서, 또다른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상한 비폭력주의 - 등으로 오해해 왔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개혁이나, 학교의 모토같이 - 'change the world'는 에릭클렙튼의 노래정도로,
그래 - 그럴수 있지 정도로. 근데 현실적으로는 힘들어. 그건 좋은생각인데, 하지만 -.
누구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세뇌된 것이라고들, 이 사회가, 노골적으로는 MB가 식으로...

그 연원을 찾고자 하면 어디까진들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중세의 암흑을 지나 근대로 넘어올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가능했을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미친 것처럼 여겨질 때는 - 그것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리화 될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오랜만에 웹서핑을 하고, TV를 보면서 절절하게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도 -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해 꿈꾸기를 중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그 틀안에서 살아가고,

그것을 넘어서서 그ㅡ 안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고 무한경쟁에 돌입하고.

부패도 용인되고, 부정도 인정되고, 남의 아픔도 공감할 수 없고,

김규항씨가 말하는 예수님은 그 모든 '익숙한 가치들'을 부정하는 모습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유재산의 개념도,
분열로 치닫는 각 소위 '사회운동'이라는 것들도,

개인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철저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것이 신약 27권에 박제화된, 이적만을 행하고 유대인들에게 박해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어느 종교의 '예수'가 아니라

세상의 지탄을 받으면서, 

'먹고 살만하니까'하는 낯뜨거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슬픈 노조원들에게   

지들이 원해서 하는 것을 - 하면서 여전히 남자들의 요구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려야 하는 여성들에게  

더럽다고,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고, 금기를 깬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소수자들에게

그들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민망하게 여기시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의 개혁은,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사회 체제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기에
이 지배체제, 사회체제 자체의 완벽한 전복을 시도하였고

타협이란 자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죽여라'고 소리지르던 그들은, 세상을 'CHANGE'하려는 예수님의 근본적인 사회개혁운동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임이 틀림없다.
예수님이 사는 방식은 세상이 사는 방식과 달랐고, 세상이 '그렇게 살기를'요구하는 그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너무도 쉽게 CHANGE THE WORLD를 말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상응하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자체가 모호해지고 남용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도 '변화시키는' 것의 의미를 부각시켜 '진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진보주의자였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진보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어려운 고백에 다름아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매번 나의 적음에 대해 한탄하고 가슴아파할지언정

세상의 아픔에 대해 무디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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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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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1964. 4.1. 전혜린

 

'광복한 날에. 그만큼 화창하고 무더운 여름날 오후에'

라고 첫장에 쓰인 내 글씨며, August.15.09라는 날짜가 문득 낯설다.

볼펜으로 - 소음이 무척이나 싫었던, 갑갑한 커피빈의 한가운데 테이블에서 그 글을 썼던

종이의 촉감이나 공기도 여전히 생생한데 -

 

8월 15일의 그 오후가 이미 있었다는, 그 지나간 시간만큼의 거리가,

모든 것을 공간으로 환산해 버림에 익숙해 진 그 계산성이 부여하는 '부피'가 낯설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왠지 모르게 - 책 제목을 읽는 순간/ 그러고보니 언젠가 룸메이트가 들고 다니던 기억도 나고.

 

요즘 들어 커피의 '쓴' 맛을 정말 즐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설탕이나 크림이 들어가지 않은, 원두커피만이 주는 향이나(물론 원두마다 다르겠지만)

그 쓴 - 맛이 입안에 돌 때, '익숙함'이 드는 것이다.

 

전혜린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 이 여자는 그런 커피의 쓴 맛에 길들여져서, 그 쓴 맛 자체를 즐기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전혜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주변지식으로나마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도 - 여전히 책날개에 조금 언급되어 있는 간단한 약력이나

에세이집에 실린 그녀의 글들이 내가 그녀를 '알 수 있는' 전부다.

 

글이란 것은 사람을 왜곡시키기도 하거니와, 어떤 면에서는 아주 깊은 곳까지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대화를 포기하게 되었던 것은

완전한 공감과,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교감과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일까

그것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타자에게서도 원인이 있지만

그 타자를 형성하는 사회적 배경이나, 인식의 차이나,가시화될 수 없는 무형의 시간을 비롯한 무언가들의 총체적인 구조 -

그에 덧붙여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언어에 의해서 한번 걸러지고, 제대로 명확히 표현하고 전달할 수 없는 나의 전달방식의 문제와

어쩌면 언어 자체가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근원적인 문제와

이미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 지레 포기해버린/ 수동적으로 듣고 있는 나의 태도의 문제와

 

때로는 그런 여러 생각들이 지금도,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어느순간 다시 떠오르는 망각에 관련된 문제와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어서 읽고 있는 한나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설명해 주지 못하는

인간 이라는 존재 자체의 문제일 수가 있다.

 

또 어느 순간은, 표현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도 그것만이 아니었을까 하ㅡ는

슬며시드는 불안한 자괴감,

그래도 결국 언어가 유일한 차악(차선이 아닌)이라는 나름 위안어린 생각과 / 함께 안도감

그러면 그것으로 '소통'을 가능케하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전혜린의 글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어딘가 남아 생각속에 불편했던 것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아주 없지는 않은, 누군가에 비하면 배부르고 편한 삶 속에서

보들레르를 논하고, 니체를 논하고,

시인과 극작가와 소설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 실존을 이야기하고 존재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것들이

아렌트는 그것이 '사유의 문제' // 생의 기저에서 가장 '활동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했으나

김규항씨 말처럼, 오늘 하루를 품위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그게 무슨 - 어느 세상 이야기고, 뜬 구름 잡는 소리며

 

클래식과 커피의 종류를 이야기하고, 뮌헨에서의 거리와 사람들과 낭만과 고독을 이야기하며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고 처절한 고독과 자의식과 그럼으로 '생의 처절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와닿겠으며, 얼마나 그것이 사실적일가고. 그저 부르주아 인텔리 여성의 센티멘털리즘으로 비치지는 않을는지.

 

누구나 저 만큼의 무게의 짐을 지고,

생을 살아낸다.

그럼으로 스스로의 인생이 아닌 타인의 생을 두고

그 물질적 조건이나 그 모든 배경을 떠나서 그의 생의 무게를 이렇다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전혜린의 글은 그랬다.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고, 밑줄을 그어가며 기억해두고 싶은 구절도 많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생기는 것은

뭔가 자신을 구별짓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시선이 - 적어도 내게는 - 그렇게 느껴졌고,

때때로 지나친 감상주의ㅡ는 아닌가고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세계에 깊이 - 침잠하여 내면을 파고드는 것/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자의식 -

 

어쩌면 스물 두살의 내가 동경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그렇지만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알 수 없는 / 어쩌면 판단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직은 /

 

그런 생각들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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