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1964. 4.1. 전혜린

 

'광복한 날에. 그만큼 화창하고 무더운 여름날 오후에'

라고 첫장에 쓰인 내 글씨며, August.15.09라는 날짜가 문득 낯설다.

볼펜으로 - 소음이 무척이나 싫었던, 갑갑한 커피빈의 한가운데 테이블에서 그 글을 썼던

종이의 촉감이나 공기도 여전히 생생한데 -

 

8월 15일의 그 오후가 이미 있었다는, 그 지나간 시간만큼의 거리가,

모든 것을 공간으로 환산해 버림에 익숙해 진 그 계산성이 부여하는 '부피'가 낯설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왠지 모르게 - 책 제목을 읽는 순간/ 그러고보니 언젠가 룸메이트가 들고 다니던 기억도 나고.

 

요즘 들어 커피의 '쓴' 맛을 정말 즐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설탕이나 크림이 들어가지 않은, 원두커피만이 주는 향이나(물론 원두마다 다르겠지만)

그 쓴 - 맛이 입안에 돌 때, '익숙함'이 드는 것이다.

 

전혜린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 이 여자는 그런 커피의 쓴 맛에 길들여져서, 그 쓴 맛 자체를 즐기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전혜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주변지식으로나마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도 - 여전히 책날개에 조금 언급되어 있는 간단한 약력이나

에세이집에 실린 그녀의 글들이 내가 그녀를 '알 수 있는' 전부다.

 

글이란 것은 사람을 왜곡시키기도 하거니와, 어떤 면에서는 아주 깊은 곳까지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대화를 포기하게 되었던 것은

완전한 공감과,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교감과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일까

그것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타자에게서도 원인이 있지만

그 타자를 형성하는 사회적 배경이나, 인식의 차이나,가시화될 수 없는 무형의 시간을 비롯한 무언가들의 총체적인 구조 -

그에 덧붙여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언어에 의해서 한번 걸러지고, 제대로 명확히 표현하고 전달할 수 없는 나의 전달방식의 문제와

어쩌면 언어 자체가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근원적인 문제와

이미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 지레 포기해버린/ 수동적으로 듣고 있는 나의 태도의 문제와

 

때로는 그런 여러 생각들이 지금도,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어느순간 다시 떠오르는 망각에 관련된 문제와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어서 읽고 있는 한나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설명해 주지 못하는

인간 이라는 존재 자체의 문제일 수가 있다.

 

또 어느 순간은, 표현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의도하고 생각했던 것도 그것만이 아니었을까 하ㅡ는

슬며시드는 불안한 자괴감,

그래도 결국 언어가 유일한 차악(차선이 아닌)이라는 나름 위안어린 생각과 / 함께 안도감

그러면 그것으로 '소통'을 가능케하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전혜린의 글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어딘가 남아 생각속에 불편했던 것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아주 없지는 않은, 누군가에 비하면 배부르고 편한 삶 속에서

보들레르를 논하고, 니체를 논하고,

시인과 극작가와 소설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 실존을 이야기하고 존재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것들이

아렌트는 그것이 '사유의 문제' // 생의 기저에서 가장 '활동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했으나

김규항씨 말처럼, 오늘 하루를 품위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그게 무슨 - 어느 세상 이야기고, 뜬 구름 잡는 소리며

 

클래식과 커피의 종류를 이야기하고, 뮌헨에서의 거리와 사람들과 낭만과 고독을 이야기하며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고 처절한 고독과 자의식과 그럼으로 '생의 처절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와닿겠으며, 얼마나 그것이 사실적일가고. 그저 부르주아 인텔리 여성의 센티멘털리즘으로 비치지는 않을는지.

 

누구나 저 만큼의 무게의 짐을 지고,

생을 살아낸다.

그럼으로 스스로의 인생이 아닌 타인의 생을 두고

그 물질적 조건이나 그 모든 배경을 떠나서 그의 생의 무게를 이렇다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전혜린의 글은 그랬다.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고, 밑줄을 그어가며 기억해두고 싶은 구절도 많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생기는 것은

뭔가 자신을 구별짓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시선이 - 적어도 내게는 - 그렇게 느껴졌고,

때때로 지나친 감상주의ㅡ는 아닌가고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세계에 깊이 - 침잠하여 내면을 파고드는 것/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자의식 -

 

어쩌면 스물 두살의 내가 동경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그렇지만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알 수 없는 / 어쩌면 판단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직은 /

 

그런 생각들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