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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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당당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되 약자의 어려움에 대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젊은이들이 됐으면 좋겠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공정한 경쟁과 낙오자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다.
배려가 없는 사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가 아니다.
젊은이들이라면 사회적인 가치가 훼손되는데 대해 분노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힘과 돈 앞에서 불의와 타협하는 굴욕을 받아들이지 말고, 힘없는 약자에 대해 관용을 나누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 09.8.1. 오마이뉴스/ 최영찬 교수 -

 

쌍용차 파업사태로 (사태라는 용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뉴스가 시끌시끌하다.

피서 물결에 대한 보도에 이어, 각종 교통사고들, 갓길에서 화재사건, 프로야구 경기 결과, ... 그리고 파산신청서 제출?  

Banksy의 작품중에, 말그대로 'couch'에 반쯤 드러누워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아프리카 기아에 대한 영상을 보고 있는 4인 가족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선선한 바람이 드는 거실에 둘러 앉아 포도며, 한창 물이 오른 수박을 먹으며 휘두르는 몽둥이에 피투성이가 되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떡해-' 그 한마디.

 

나의 고통이 아니고, 나의 어려움이 아니고.

그렇다 분노하지 못하고.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하고 가슴을 쳤을 김수영시인의 한탄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은.

부끄러울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김규항씨의 <예수전>을 읽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교리 속에서 화석화 된 '죽은' 분이 아니다.
예수님을 수식하는 많은 수식어들 그 앞에서
살아있는 예수님은, 어쩌면 체게바라가 완전히 이루지 못한 - '진정한 리얼리스트' 이자 '진정한 이상주의자'였다.
예수님은 '불의함'에 대해서 온전히 분노하셨고, 그러기에 죽기까지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만 들어왔던 우리는
아주 한참이나 그 '사랑과 용서'라는 개념을 맹목적인 용서, 또다른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상한 비폭력주의 - 등으로 오해해 왔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개혁이나, 학교의 모토같이 - 'change the world'는 에릭클렙튼의 노래정도로,
그래 - 그럴수 있지 정도로. 근데 현실적으로는 힘들어. 그건 좋은생각인데, 하지만 -.
누구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세뇌된 것이라고들, 이 사회가, 노골적으로는 MB가 식으로...

그 연원을 찾고자 하면 어디까진들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중세의 암흑을 지나 근대로 넘어올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가능했을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미친 것처럼 여겨질 때는 - 그것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리화 될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오랜만에 웹서핑을 하고, TV를 보면서 절절하게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도 -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해 꿈꾸기를 중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그 틀안에서 살아가고,

그것을 넘어서서 그ㅡ 안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고 무한경쟁에 돌입하고.

부패도 용인되고, 부정도 인정되고, 남의 아픔도 공감할 수 없고,

김규항씨가 말하는 예수님은 그 모든 '익숙한 가치들'을 부정하는 모습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유재산의 개념도,
분열로 치닫는 각 소위 '사회운동'이라는 것들도,

개인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철저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것이 신약 27권에 박제화된, 이적만을 행하고 유대인들에게 박해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어느 종교의 '예수'가 아니라

세상의 지탄을 받으면서, 

'먹고 살만하니까'하는 낯뜨거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슬픈 노조원들에게   

지들이 원해서 하는 것을 - 하면서 여전히 남자들의 요구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려야 하는 여성들에게  

더럽다고,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고, 금기를 깬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소수자들에게

그들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민망하게 여기시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의 개혁은,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사회 체제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기에
이 지배체제, 사회체제 자체의 완벽한 전복을 시도하였고

타협이란 자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죽여라'고 소리지르던 그들은, 세상을 'CHANGE'하려는 예수님의 근본적인 사회개혁운동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임이 틀림없다.
예수님이 사는 방식은 세상이 사는 방식과 달랐고, 세상이 '그렇게 살기를'요구하는 그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너무도 쉽게 CHANGE THE WORLD를 말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상응하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자체가 모호해지고 남용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도 '변화시키는' 것의 의미를 부각시켜 '진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진보주의자였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진보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어려운 고백에 다름아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매번 나의 적음에 대해 한탄하고 가슴아파할지언정

세상의 아픔에 대해 무디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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