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저항 -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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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각에서 시선을 끌고 있는 이 인상적인 책을 그냥 나는 읽을거리를 서핑하는 가운데 우연히 발견하였다. 검색에서 뜨는 화면에서 우선 책의 외장 디자인에 눈길이 갔고 그리고 저자가 무엇보다 1971년생의 일본의 주목받는 신진 철학자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가 불어났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썼기에 어떤 신문의 관련 서평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정점에 기념비적 저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있을까? 파리 10대학교 저자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에티엔 발리바르 마저 해설에서 이와 같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요시유키의 책은 내용도 흥미롭거니와 그 형식도 빼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논의의〕극도의 응축은 그런 솜씨의 징표이다. 이런 응축은 명석함, 특히 논증의 엄격함과 건축술의 힘과 함께 한다. 이 논문에서 넘쳐나는 것은 단 한자도 없다.”

 

저자는 구조주의(여기서는 그 기표의 대명사는 라캉이다)를 우선 권력관계에 닫힌 이론으로 이해한다. 특히 라캉의 주체이론은 주체의 형성이 타자라고 하는 외부, 권력관계의 역학에서만 발생하는 만큼 주체는 그 권력관계에 수동적으로 폐제, 수신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주체가 그러하게 구조적으로 설정되는 한 주체는 권력의 자장에 운명적으로 갇히게 되어 그 권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저항의 자리도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이 수동성으로 직진하는 주체의 과정을 요시유키는 구조의 대칭 전제인 인간의 유한성 개념으로 시작해 그에 상응하는 프로이트의 ‘받아들임’의 내적 절차,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 어떻게 초월적인 권력의 시선이 정신분석적으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지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구조주의 자체가 이러하게 권력의 경제에 끔찍하게 닫혀 버리고 만다면 그렇다면 저항의 전선은 어디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를 이 지점에서 요시유키는 바로 이 국면에서의 저항이라는 아젠다로 요령있게 묶어 불러 세운다.

 

우선 푸코의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 진술은 그것이 폭력적 권력에 대한 해제적 시선을 유발시키는 목적과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권력에는 외부가 없다는 편견(?)을 각인시키게 하는 것으로 결국 푸코의 권력이론도 라캉의 닫힌 경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푸코 후기의 ‘자기배려’로의 전회를 요시유키는 이질적인 불연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과감하게 예의 그 권력의 닫힘에 대한 의미 있는 연속성, 곧 저항으로 읽는다.

 

이에 비해 들뢰즈-가타리는 수동성이 아니라 주체를 처음부터 비인칭적 역량의 능동성으로 정초한다는 점에서 훨씬 적극적이다. 이들에 어울리는 것은 라캉의 단성적인 장소론보다 ‘특권적 시니피앙’ 팔루스의 초월성으로 직진하지 않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욕망의 다양체의 경제론이다.

 

또한 데리다에게 원초적이고 유일한 기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기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입들이 있어서 그 복수적인 ‘산종’이 팔루스의 권력적 단일성을 위협하는 저항으로 작동된다. 라캉의 주체는 우위의 외부가 지시하는 지점으로 기입, 봉합되고 말지만 (‘편지는 수신인에게 반드시 전달된다.) 데리다의 주체는 편지가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운‘에 가깝고 언제나 “체계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두려운 낯 설음”으로 침입된다. 곧 라캉에게는 유한한 결여가 상징계를 형성 유지하게 하는 구성적 요소이지만 데리다의 그것은 “상징계를 촉발하고 변형시키는 요소”로 직면되는 것이다.

 

한편, 알튀세르 특히 후기의 알튀세르는 요시유키가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유능할 수 있는 저항의 국면을 열어젖힌 철학자로 읽힌다. 생산관계, 즉 지배관계가 자신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그 지배적 이념과 체제를 미시권력 구조로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리에 저항의 국면을 확보하는 그 열린 공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주체에는 재생산의 과정에 완전히 굴복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효과’ , 저항의 효과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 저항의 효과에 의해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복합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그 상황에 의해 지배 이데올로기는 변용을 겪는다. 더 적극적으로 어떤 지시적 목적론, 결정론의 연속적 맥락도 부정되는 알튀세르의 ‘마주침’과 우발성의 유물론은 운명론적인 구조에 전면적인 변동을 초래할 수 있는 저항의 소중한 토대이다. 그에게는 맑스에서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 우발성의 우위라는 공식을 채택, 순응이 아니라 혁명으로의 폭발과 변용이 상용 확보되어 있다. 곧 라캉과 정반대로 구조가 우위가 아니라 알튀세르에게는 우발성이 구조보다 우위에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요시유키의 논리는 섬예하고 텍스트를 들여다보고 구성하는 눈은 정밀하고 우아하다. 구석의 저변까지 미세하게 훑는 저인망의 시각은 경건하고 고결하기까지 하다. 누군가가 재치 있게 표현했듯 그의 글은 디자인이 잘 빠진 대학입시 종합반 강의의 전범과도 같다. (학습용으로 제격으로 나는 그 매력에 끌려 한 달 내내 손에 들고 다니며 출퇴근 시간에 네 번을 연속해서 읽었다. 나 같은 일반 독자, 학습자에게는 요시유키는 흔치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선물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받은 만족을 배신할 틈새는 처음부터 제법 커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구조주의, 특히 라캉의 주체이론이 권력관계의 자장에 갇혀 버린다는 이해가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과연 라캉의 주체론이 그러하게 쉽게 사회과학적 담론으로 전치될 수 있는 물리적 국면인가? 저자는 라캉이 관력관계에 대책 없이 갇혀 버린다는 명제를 채택, 그 대칭의 축에 걸어 그 반사적 탄력으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을 요령 있게 불러내고 그들을 유쾌하게 우아한 칼날로 발라내는데 보기 좋게 성공하고 있지만 정작 그 설정의 도식 자체가 논증의 세련된 격과는 별도로 어울리지 않게 좀 조악해 보인다는 것이다.

 

라캉의 주체이론, 그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신분석적 권력을 과연 성급히 세속화(?)하여 우리가 반드시 극복되고 저항해야만 하는 어떤 사회과학적 권력으로 읽어도 될까? 라캉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는 그러하게 주체는 그러한 외부, 타자와의 거울관계에서 비로소 욕망이 추동되며 그러한 동력학에 의해 리비도가 에로스로 발생되고 폭발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게 걸리는 정신분석적 권력이야말로 오히려 주체의 경험에서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그 무엇에 복종하거나 저항하거나 내적 힘으로 밀려 올려 진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차원의 권력을 요시유키처럼 지나치게 유물론적인 물질의 국면으로 전치, 단순한 공분의 대상으로 지시, 오독해 버리면 그 논리는 무엇을 향하건 리비도의 활성 자체를 문제 삼는 오버로 직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요시유키 처럼 어떤 ‘권력’을 극복의 대상으로 지시한다고 할 때 애초 이 권력의 자장에서 비껴나 자유 할 수 있는 그 어떤 비권력적 사유가 가능한지도 분명해 보이지가 않는다. 우선 저자 자신이 저항의 기제로 차례로 열거한 무 규정, 다양체 복수의 기입들을 통한 단일적 권력의 극복과 파쇄 또한 그 자체가 또 다른 국면의 권력의 지위를 점하는 좌표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권력적 구조, 단일성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하는 비인칭적 역능, 개방성은 저자의 믿음처럼 또한 그러하게 논리적으로 비권력적으로 설정된다고 하더라도 (포스트구조주의 자체가 오늘날 해제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이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과연 그 사유의 탈권력적 구조로 인해 권력적 주체를 무장 해제시키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구성하고 창출할 수 있는 동력으로 (관념을 넘어)실제 작동되는 역능이 보장되는 국면인지도 의심스럽다. 곧 요시유키의 주체에 대한 프레임에는 이러한 '니힐리즘'의 혐의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유성과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부연하자면, 요시유키가 대별해 내는 비권력의 권력, 그 규정될 수 없는 권력은 논리의 성격상 사유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다면 손쉽게 논의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오히려 이를테면 근거 없는 뉴 에이지류와 같은 유령적인 것으로 신비화되는 국면으로 방전될 우려가 있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것은 기본 리비도를 향한 구축점을 유동적으로 희석시켜 결과적으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주체를 해제, 주체를 경계선이 부재한 유실인으로 되돌려 ‘지금 여기에 있는’ 주체의 현존과 자유 자체마저 침식하는 사태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곧 다양체로서의 비권력은 저항에 대한 보상과 환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실체로 규정, 작동되는 현물이 아니라 현물은 없고 권력에 대한 대항의 로망이라는 일말의 윤리적 감성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독은 또 있어 보인다. 라캉의 결여가 그 무엇에 거울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결여인 한에 상응되는 타자에 의해 상징계로 성급하게 봉합되고 만다는 것에서 요시유키는 어떤 고착적인 운명론의 위험을 제기하지만 그 지점에서 열려있는 실재계와의 외밀한 조우는 주체를 항상적으로 불완전하게 열어놓는,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저항의 자리, 일말의 혁명적 계기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유때문인지 요시유키는 구조주의에서 라캉의 실재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항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알튀세르만 하더라도 요시유키에 반하여 들뢰즈 식의 감성으로 독해할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라캉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요시유키의 논증과는 달리 우리가 알튀세르를 현존에 대한 우발성, 부재의 우위로 읽을 수 있다고 할 때 부재가 오히려 우위로 승격 배치되는 그 발상이나 도식 자체가 라캉의 외부의 우위라는 초월적(권력적) 도식을 더욱 유능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해로 말이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부재’,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하는 공백이라는 것도 그 겨냥하는 지점이 아무것도 없는 빈 지점인 한에서 모든 것을 세우고 건축할 수 있는 적극적인 권력의 혁명적 호출의 조건, 지형으로 알튀세르가 제출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 역시 라캉의 아무것도 아닌 결여, 죽음충동의 그것과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알튀세르를 더욱 알튀세르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알튀세르는 이 구도를 충분히 자신의 텍스트에서 남겨놓고 있다.

“이러한 미끄러짐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모든 인식이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세계“를 이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것’, 자연의 이론조차 없는 이러한 것으로서 승인하도록 해 주는 길을 연다. 즉 총체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산 속에서 체험되는 유일독특한(unique) 그 속에 우리가 ”던져져“ 있고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우리의 모든 환상들을 주조해 내는 ”주어진 것“(제조물들)으로서 체험되는 유일독특한 총체(---)로서 ”세계“를 승인하도록 해 주는 길을 여는 것이다.”(「철학적 맑스주의」 ,서관모 백승욱 편역, 새길아카데미,56.)

 

                          

 

 

스피노자를 인용, 오마주하는 이 본문의 탈 총체화는 데리다, 들뢰즈의 다양체나 ‘산종’과는 분명 다른 국면을 안고 있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오히려 총체화의 일원론적 권력에서 모든 총체화의 비정통성의 권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 더 강렬하게 창조적으로 작동되는 유일독특한 신성한 “세계”, 그 세계를 떠안은 주체를 이름이다. 이러한 전복된 방식으로 또 다르게 강렬해 지는 권력적 주체! 이것이야말로 저항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의 라캉식 권력형 주체가 아닌가?

 

이 지점에서 데리다와 구별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배경으로 함의하고 있는 독특한 신의 이름이다.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또는 전체(le Tout)에서, 또는 유일독특한(unique) 실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je ne commence par rien)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위의 책,51.)

 

자연도 아닌, 신을 향하는 것도 아닌, 그리하여 신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는 그 ‘아무것도 아닌’ 외부의 무의 장소야말로 모든 것이 그로써 전격적으로 가능한 혁명적 건축이 발생할 수 있는 현존에 대한 우위의 공간으로 알튀세르는 거듭 제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즉 이것은 라캉적 내,외부적 도식에서 외부, 부재를 더 강조함으로써 저항이 단순한 윤리적 감성이 아니라 권력적으로 작동되게 하는 장치의 사유로 확보되는 사태를 이름이 아닌가?(이 지점은 또한 명백하게 유한의 빈 구멍 '결여'를 그리스도, 신의 좌표로도 상응화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지젝을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공백의 공학을 통해서 알튀세르는 오히려 더욱 진짜 초인, 영웅을 초대하고자 한다.

“찢긴 인류 자체를 통일하기 위해 ”신공국“의 기초를 쌓도록 해 주는 이는 전혀 없다.”(위의 책,203.)

 

이러한 알튀세르를 우리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그의 한 텍스트는 이렇게 장엄하게 마무리 되고 있다.

“예전에 별로 이름 없는 어느 데카르트주의자가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공기층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그 무게를 느끼지 못 한다“고. 오늘날 우리는 수미일관하지 못하고 모순적인(모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엄청난 이데올로기 층 아래 살고 있으며, 자연히 그 무게를 느끼지도 못한다.---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그것에 인종하는 이 금찍한 조건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진짜 영웅주의가, 이 점〔대단한 영웅주의자라는 점〕에서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며 항상 현재적이고 현대적인 마키아벨리의 영웅주의가 필요하다”(위의 책,204.)

 

그러므로 저항은 구조주의적 권력 발생 관계를 비껴나야만 한다고 하는 어떤 감성적 전치에서가 아니라 더 유능한 권력, 더 감산됨으로 성숙해지고 계몽되는 구조와 지형, 공간의 창출과 이동에서 오히려 비로소 현물로 가능해지는 것으로, 그러하게 읽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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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품을 분석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헛소리로 가득 차 있는 기묘한 물건”(지젝,<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국역본 338쪽에서 재인용)이라는 말을 마르크스가 한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신학적 변덕들이 어디 상품, 물신을 둘러싼 영역 뿐 이겠는가? 아니 인간은 아예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유한성으로 인해 내부와 외부 경험하는 것들의 모든 위계에서 사실상 전부 신학적 의미와 함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무심코 읽은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를 나는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인상적으로 흥미를 경험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더 나아가 환자는 본래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고자 한다. 의사의 권위란 환자에게는 자신의 숙고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고정점이다.---환자는---알고자 하지 않는다.---그가 욕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안정이다.

환자로서의 인간은 때로 이성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거나 반이성적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의료관계는 어쩔 수 없이 전도될 수밖에 없다.”(야스퍼스,<기술시대의 의사>,김정현역,책세상,2010,13쪽)

 

 

 

 

명백히 우리는 저 문장을 환자와 의사라는 특수한 의료행위의 국면을 넘어 인간 실존의 조건을 지시하는 훨씬 일반화된 범주로 물론 확대하여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비교적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는 신학자 알리스트 맥그라스도 이런 문장을 쓰고 있지 않은가?

“타락된 죄인의 본성에는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는 듯하다.---사람들은 분명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확고하고 세련되며 권위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된다.”(맥그라스,<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신상길 정성욱 역,한국장로교출판사,2002,172,176쪽)

 

유한과 결여의 제한과 한계에 대항한 반사적 비상구, 이른바 대상a와 같은 애착과 원환으로도 절대와 완전에 대한 이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사물의 내 외면의 이상을 채울 능력의 부재에 대한 결여를 손쉽게 대체하고 보상할 대상물을 인간은 저러한 방식으로 생래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저러하게 불안한 조건에서의 방식이므로 인간은 사실 모든 인식과 경험에서 사물과 대상들을 그편에서 일정부분 이상 왜곡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허구적으로 굴절시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러한 사태에서 인간 존재에서 외부의 위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이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주체의 결여와 그에 대한 외부의 어떤 우위를 말하는 라캉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만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동의할 수 있을까를 기본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한 편, 들뢰즈는 <들뢰즈의 니체>에서 또 이런 문장으로 니체를 해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이 죽은 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며 ‘인간적인’가치들이라는 짐을 지고 나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받아들인다고 자부한다. 그때부터 그는 ‘더 높은 인간들’의 새로운 신이다.”(들뢰즈,<들뢰즈의 니체>,박찬국 역,철학과 현실사,68쪽)

 

 

 

 

오늘날 신의 부재를 말하는 의미는 일찍 니체가 간파했듯이 단순한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만 하면 되는 그러한 조악하고 손쉬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생각보다 훨씬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신이라고 하는 이름의 기표를 부정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사태에 엉기고 얽힌 보다 근본적인 절차와 문제로 인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마치 덩굴식물들처럼 그 무엇의 지탱물을 통해야만 의식이 구조화될 수 있는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신이 살해됨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한, 신의 지위를 책임지고 떠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죽음으로 저절로 신적 존재로 진보하거나 격상된 것이 아닌 만큼 저절로 그 스스로는 필연적으로 니체가 은유하고자 했던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낙타의 운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유한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을 감당해야만 하는 부담과 억압, 그 역할극이라도 떠안아야만 하는 공허와 무력감 ---이전에는 없던 황폐한 반복, 우울증은 어떤 문학평론가가 재치 있게 말했듯 이러하게 신이 죽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으로 등극함으로 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2.

이 지점에서, 신의 죽음이후 새로운 신이 된(신의 역할극을 떠안게 된) 인간에게 절박하게 필요해진 것은 그렇다면 이 주체의 허구와 부담, 무거운 짐을 해소하고 줄여 줄 새로운 외부의 발명이다. 니체 이후 신은 이미 죽고 없으므로 그 신의 지위가 기능하던 또 다른 방식의 외부가 다시 필연적으로 필요해진 것이다. 신이라는 지위와 위계에 의해 유지, 작동되던 내적 기제를 다시 활성화 할 신학적 기획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오늘날 탈-해체론의 진영에서 유물론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 일말의 저의는 무엇인가? 저마다 새로운 ‘유물론적 은총론’을 기획하고자 하는 저의들이야말로 이런 국면에서 본다면 또 다른 노골적인 신학적 요구에 대한 이미 예정된 응답들이 아닌가?

 

 

 

 

물론 이 변덕(?)의 지점에서 기독교의 유신론 신학과 가장 기능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기획은 바디우의 은총론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인식론과 이성의 위계를 넘어서는 반 철학, ‘사건’의 도래에 의존해야만 설명이 되는 반전과 충실의 존재를 그는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그 은총이 역동적으로 생성되고 작동될 수 있어서 가장 기독교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실상 ‘사건’은 바로 신과 그리스도의 기능과 위계를 지닌다.

 

이에 비한다면 지젝은 좀 남다르게 읽힌다. 그의 외부는 이미 정신분석적으로 결여라고 하는 부정성으로 내속 메커니즘 안에 장치되어 있다. 결여라고 하는 잔여, 합리적인 이성에 포획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원시적 추문과 잉여가 하향 내속 초월 그 자체로 이미 들러붙어 있어서 그에 대한 변증법적 반사운동으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닌 주인의 방식으로서 주체를 역동화 한다. 그에게서 삶은 또 다르게 주인의 책임이 변증법적 운동에 전가되어 다이내믹해 지지만 한 편, 칸트가 말하는 숭고의 감정은 잘 경험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지젝의 역동은 내부에서 발화하고 폭발하는 메커니즘에 의한 운동으로 상대적으로 빤히 들여다보이고 읽힌다. 하여 감성적인 낭만이나 감격, 바디우적인 탈구와 위트, 고전적 감성의 우발적 찬탄은 그만큼 기대하기 힘들다. 그는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훨씬 철저한 유물론자이며 그러한 논리적 귀결로도 그는 과학적이고 절차적이다. 대신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부의 균열을 자산으로 한 변증법적 작용을 내면에서 촉발시킨다.

 

3.

이와는 한 편, 이와 관련해 굳이 같이 언급하자면 니체는 신의 이름을 맹렬히 부정했지만 의미 생성이 충분한 위계의 권위와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통찰을 처음부터 잘 보여 주었다. 그에게는 주인이 부정되지만 한 편으로 주인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모순적 이율배반적인 국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주인도 없을뿐더러 자유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 추억이라는 기쁨 이외에는 한 순간도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니체,<짜라투스트라--->,정강석역,삼성판세계사상전집21,1982,38쪽)

 

또한 그에게는 신(권위)을 설정하지 않는 의식의 평면지대에서는 그 무엇을 걸만한 지렛대의 부재의 사태와 다름 아니어서 더 이상 인간이 동경도 꿈도 어떤 의미 있는 ‘충동’의 생성을 경험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고 본다.

“욕될지어다! 이제는 인간이 인간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쏠 수가 없을뿐더러 그의 활줄이 울리지 않을 때가 온다.”(위의 책,41쪽)

 

 

 

 

그 역시 사실상 가장 신학적인 자신의 의식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는가? 그를 읽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에 대한 기표와 기호만 히스테리컬하게 모순적으로 다를 뿐 그는 무신론 영역에서의 영낙 없는 바울이다. 결국 그는 의식의 배열과 위계를 경유, 다소 이를테면 이교적인 지혜를, 이율배반적인 인식, 인간의 내적 모순을 관통, 우발성과 필연성의 긍정을 설정,‘살아 있는 것을 풀어주기’생성의 음악과 리듬을 따라‘자유롭게 놓아주기’와 같은 ‘지혜’의 방식으로 주체의 짐을 경쾌하게 해제시키고 있지만 어쨌든 그 또한 신학적 변덕의 범주에서 절대로 달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

 

4.

결국 인간의 주체는 훨씬 모순적이고 무능하다고 읽어야 할까. 과거 이성의 권위로 신앙의 히브리스를 맹렬하게 해명, 결국 신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처단하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이성 또한 그에 못지않은 히브리스를 이미 내장하고 있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부메랑으로 체득된 것을 보면 신앙이든 이성이든 사실상 그 모든 범주가 애초에 신학적이던 인간 앞에서는 구분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상 인간의 한계와 그 위험성을 지시, 소중하게 직면하게 해주는 것으로 인간 스스로의 본연의 사태의 본질적 참상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하여 이러한 사태들은 결국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숙고해 볼 것을 요청하며 인간이 불완전한 조건에 있는 한 어떤 방식이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신학적 작업을 욕망하도록 강요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역시 최근 출간된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의 책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읽힌다.(이 책은 이 고원의 김남시 님이 번역했다)

이 책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외부에서 권력에 대한 오해의 맹목적 불신의 지대에서 벗어나 주체에게 올바른 권력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해명되는 훨씬 진전된 통찰과 조우할 수 있다.

 

 

 

 

 

곧 권력은 인간을 억압하는 역기능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유와 역학적으로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니체를 관통하는 통찰이다.

“오히려 권력은 그 속에서 물체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장 場,Feld처럼 작용한다”

(한병철,<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역,문학과 지성사,2011,18쪽)

사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프로이트와 라캉을 어느 정도라도 용인한다면 인간의 내,외면에는 온갖 다양한 기제와 힘들이 혼재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화학 정글 지대인데 그 혼재를 일정한 의미와 욕구의 공간으로 재편, 자유를 경험하려면 당연히 일종의 신학적 작업, 내적 의식의 권력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간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5.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 지젝을 필두로 한 슬로베니아 패밀리의 도움으로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를 상대적으로 더 잘 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그에 터해 인간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일정부분 힘과 권위를 필요로 하는 신학적인 존재인가에 대한 보다 균형적인 이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 그 편에서 세공되는 인간 자체의 결함과 결여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것이 반드시 과거처럼 인간으로서의 어떤 굴종을 용인하고 반-휴머니즘적 사실을 폭력적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어떤 혐오나 굴종의 일 만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결함과 위험한 한계의 결여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주체의 생성과 건축의 길을 탄력적으로 열게 하고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와 도약으로 직진하게 하는 충동의 기제, 소중한 발원지의 확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와 인식을 기반으로 다시 우리는 외부의 권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그리고 올바른 힘과 권위가 필요하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유능하게 경험하고 사용할 것인가? 라고 하는 깊은 신학적 질문들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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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86
말렉 슈벨 지음, 서민원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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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을 구입했는데, 저자 말렉 슈벨이란 분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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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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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에 관해 분분한 비평과 관점들의 차이에 대해 몇 몇 검색을 통하거나 이 고원에서의 관련 글들을 통해 확인했다. 물론 소설을 읽기 전 까지만 해도 별 관심을 갖지 않다가 그것을 단 숨에 읽고 나서 갑자기 관심이 생겼다고 해 두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나의 성향에서는 물론 신경숙의 작품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께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책상머리에 바로 문제의 <엄마--->가 놓여있기에 호기심에서도 처음 집었는데 중간에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틈 빼고는 그냥 그 공간 안에서 단 숨에 다 읽어버렸다. 아니 그냥 단 숨에 읽히는 소설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는지 모른다. 간결하게 문장이 평이한 문체로 단박단박 끊어져 있고, 그리고 역시 그 평이의 궤도 안 속으로‘엄마’라고 하는 이미지가 무슨 강박처럼 계속적으로 단순 반복됨으로 결국은 그 모성적 신비의 중첩에 독자의 마음이 무쇠라도 허물어져 내리도록 장치되어 있으니 단 숨에 읽혀지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러한 단순 반복은 요즘 소녀시대 류의 팝 음악 속에나 보이는 중독성 리듬과 박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도 그 리듬에 자연스레 느낌과 생각을 맡겼고 그것을 편하게 즐기고 있는 나를 또한 느꼈다. 
  

어쨌든 신경숙은 우선 글이 읽히는 신경과 대중적 성감대적 요령을 잘 학습, 그것을 손쉽게  타격을 잘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엘리트 코스를 통해 직진한 전문적이라는 포스가 느껴지는 그 일말의 밀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아서 신선하기까지 했고, 그러한 국면이야말로 시골에서 상경,‘공순이’의 자아 경계와 자기 저변을 관통, 마침내 자신의 글이라는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한, 한 사람의 개성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져서도 좋았다. 정해진 코스의 선택된 소수자가 아니라 그 위계의 분절선 마저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듯한 그 평이하고도 찐득, 질박한 감수성의 미감은 분명 그 희소성 차원에서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희귀종’의 개성적 권위를 점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누가 뭐랄 수 있을까? 
  

그리고 특유의 여성적, 신경숙만의 미끄러운 감수성, 그 렌즈에 의해 재배가 재편집되는 모성에 대한 기억 영상과 존재감, 역추적은 또 어떤가? 정확히 작가와 같은 나이, 같은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그녀의 렌즈를 따라 가보는 모성애를 향한 탐색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로의 낯 선 여행 그 자체였다. 페미니즘적 대결적 성차에서 또 다른 성차의 세계만으로도 이렇게 기존의 묵고 침잠된 이미지가 새롭게 경험, 복권되고 있는 국면, 그러하게 세계차를 가능하게 해 주는 마술로 작동되고 있다면 그 힘,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문체는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런 점을 긍정한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복수 화자에 관한 담론이나 인칭의 전도 같은 것도 스토리의 흐름을 더욱 산뜻한 차이로 격상시키는, 일종의 ‘넛지효과’쯤으로도 보아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문제가 소설에서 보여져야할 인식의 파괴력이나 인간과 세계를 더욱 유능하게 해석하고 대결시키는 치열성과 그에 연관된 전문적 역량이라면, 그 함량의 국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라면 또한 그녀에게서 어떤 결여를 맹렬히 변별하는 시각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부로의 섬예한 문제제기로서의 설정과 문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벌여놓거나 사적인 전회를 향하여 무난한 풍경기로서 봉합되고 마는 전체 흐름이 이러한 국면에서는 손쉬운 표적이 되는 것은 분명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가 그냥 편하게 그녀의 글을 따라가게 하는 것은 낮은 하향적 초월의 얼굴, 엄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엄마의 권위의 그늘로 자수성가에 성공한 화자의 형제들의 편한 얼굴들이 아닌가? 성장기에 성공한 자녀들의 얼굴로 인해 엄마의 희생의 존엄이 구조적으로 구원되는 방식의 풍경기적 설정은 그런 경관임에 한해 상대적으로 전혀 그 희생의 존엄이 담보되지 못하는 수많이 또 다르게 희생되고 스러지는 탈신비의 어머니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비판을 또한 즉시로 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여전히 산티아고와 같은 우아한 격자의 여행은커녕 지방, 귀향인사도 어려운 경제적 불구자들, 실종된 엄마를 찾는 사례금을 삼백으로 할 것인가 오백으로 할 것인가 하는 형제간의 팔자 좋은(?) 논의는 고사하고 만성적자에 가계 빚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이를테면 ‘하우스 푸어’아니면 몸과 마음, 어느 한 쪽에 절단이라도 난 곤궁과 결여가 득실거릴 수 있는 가족에 비한다면 작품속의 작가에 약사에 괜챦은 토목기사로 구성된 가족 면면들은 지나치게 또한 유년기의 결여로부터 손쉽게 보상받고자 하는 자위적 경관이 아닌가? 그러하게 안전한 경관기적 세계관으로 작가가 할 수 있는 국면이란 그렇다면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향수를 자극, 고무시키거나 고작 색다른 감수성 공간을 변별, 돌파하는 퇴행적 작업이 아니고는 또 무엇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들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녀의 희귀종 문체라고 하는 것도 누구나 은폐하고 싶은 전 시대의 가족사, 성장기에 저마다가 축적시킨 핍절한 자의식이 그녀로 해서 어떤 내밀한 치장이나 무늬, 통하는 미술로도 역전, 반전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짜릿한 면죄부로도 작동되고 있는 형국이므로 그녀의 문체가 아닌가? 그런 연유로 해서 그녀가 그렇게 잘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나는 신경숙을 읽은 첫 경험에서부터 사실 좀 얼얼한 기분이다. 그에 대해 아무리 평가절하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끈적한 질감의 그 무엇이 남는 것을 느낀다. 통속인지 전문인지 그 손쉬운(?) 구분선으로 해서도 잘 정리되지 않는 끈적한 그 무엇이 여전히 나에게 남았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그녀를 좋게 본 결과, 어떤 기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문체로 인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자의 도구, 맨 몸의 힘, 즉 어떤 보편에의 용기와 입지전적인 소망의 질료감 같은 것에 살짝 데인 것과 같은 어떤 그런 유쾌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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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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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빌헬름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

쥘리엥 그린의 <잔해>

그리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헤겔의 <정신현상학1> <정신현상학2>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죽은 신을 위하여>,<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내친 김에 슈미트의 <정치신학>까지 읽었다.

그리고 또 이곳 고원에서 김남시님의 ‘크라카우의 권태’에 관한 제출문도 참고로 읽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소설의 중요성을 절감은 하지만 비교적 큰 흥미를 가지고 읽지는 못한다. 이것 역시 편식할 수밖에 없는 입 짧은 소시민의 어떤 학습장애 이리라. 하지만 이어 두 편의 그것들을 읽었는데 괜찮았다.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이나 그린의 <잔해>는 역시 일상의 권태에 관한 작품이다. 똑 같이 권태를 다루고 있긴 한데 <잔해>는 책의 소개 홍보문 문장처럼 그 ‘일상’이 사람에게 폭력으로 경험되도록 틈새가 나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그 일상이 폭력이라는 홍보문구에 필이 꽂혀 책을 샀다) 그 격리와 괴리는 일말의 잔혹감 마저 느끼게 한다. 도시를 부유하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밖으로 밀려난 찌꺼기, 자신에게마저 이방인인 초라한 내면의 엷은 인간! 최초의 우연한 외상적 경험에서 망연자실, 의식의 흐름에 유실되는---. 그럼으로서 그 내면을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면과 위장으로 은폐하는 긴장을 유지하는데 또한 심대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신경증 수준의 우울증자다. 그 스스로의 폭력의 미로에서 힘겹게 회색지대를 배회하고 표류하는---이 소설은 1932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하여 카뮈, 샤르트르의 실존을 한편, 선취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모양이다.

이에 비하면 게나치노의 <이 날을 위한 우산>은 우선 따뜻하다. 역시 유실되는 소심쟁이 인간이 등장하지만 게나치노의 우울증자는 그런대로 현실을 긍정하는 재치가 구원된 현존재자다.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긴 한데 변변챦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새로 나온 구두를 신어보고 그 상품에 대한 평가서를 내는 일, 즉 구두테스터를 업으로 하는 주인공. 하루 종일 소비자가 사용할, 결국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역할의 유머의 위트의 제한 가상스러운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우연과 침범, 소소한 시간들로 그에게서는 유실되는 현실과 화해되고 미함량일지라도 일정량 구원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여 오히려 게나치노 쪽이 읽기에도 편하고 유쾌하다. 일상에 대한 무력감을 산뜻하게 직면시키고도 그 무력감을 긍정하는 건강함(?)이 느껴진다. 문체도 그에 잘 어울리게 안정적이고 맛깔스럽다.

하지만 역시 게나치노의 편안함은 무력한 일상 자체를 분열된 채로 떠안아야만 하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지연된 안도’다.  그렇다면 그 안도가 실재와의 대면을 피해갈 수 있는 유사 대체물로서의 긍정이라면 하나의 소설로서는 산뜻한 미감이지만 역시 문제의 적실한 해법이라고 하는 정치의 문제로서는 글쎄다. 
 

 

물론 이러한 게나치노의 소극성은 물러설 내적 공간이 부재할 때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화해의 제스처일 것이다. 분열이 안개꽃처럼 산포되지만 결국 분열이 봉합되거나 틈새가 그리 크지 않는 게나치노의 내면은 그렇다면 비교하자면 우리 동양인의 내면과 더 유사성이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정치가 발생하고 정치적 힘이 걸릴만한 찢겨짐과 차이, 배열에서가 아니라 그 소소한 일상의 내면 안에서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야말로 일상적인 우연이나 그 사건의 위트에 걸려 해결되는 소박성으로 게나치노는 비껴 선다. 그의 문체에서 전체적으로 어떤 질박 착실한 친근미가 쉽게 경험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말의 신비적 친밀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그린의 끝까지 폭력으로서의 일상은 훨씬 실재적이고 외설적이다. 일탈과 무력---물론 그린에게는 우선 물러설 자리가 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신으로의 신비와 구원이라는 또 다른 층위의 공간을 충분히 전유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끝까지 차안에 대한 궁극적인 폭력을 소묘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종교적인 초월적인 층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열적으로 묘사하는 실재는? 그들의 물러설 자리는? 그들의 내적 방식, 장치는?   

 

 
마음의 권태에 연이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다시 읽었다. 책의 끝 페이지 메모를 보니 이로써 2008년 12월에 처음 읽은 후로 세 번째 읽는 것이다. 물론 다름 아닌 마음이야말로 중요한 정치가 발생하는 성좌임을 이해한 이번의 욕망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세 번째 찾도록 했을 것이다. 하도 유명한 책이라 다시 내용을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한다. 다만 내가 사적으로 이해하고 전유한 일상적인 부분만을 스스로에게 정리하고 남길 뿐이다. 

 

결국 아감벤에게서 원래 정치는 차이와 영역을 식별해 주는 위상학적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계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정의나 자유 보편으로서의 어떤 공공의 메타적 이상, 이념보다는 실제적으로는 내적 활력을 추동시키는 경계가 중요하고 그 경계의 심리적 분계를 중심으로 정치가 역학적으로 작동된다고 하는 것이다. 정상과 대비되는 ‘예외’에 역광, 반사되어 정상이 정상으로 유지되고 심화된다고 하는, 정상과 예외의 배타적 공모 관계로서의 정치, 내적 물리역학으로서의 힘의 발생과 통치를 그래서 그는 예리하게 규명해 낸다. 하여 정상은 정상으로 작동되기 위해 비정상, 즉 어떤 예외를 생래적으로 포함하고 필요로 하며 끊임없이 그 예외를 소비해야만 하는 배반의 역설을 지닌다. 하여 홀로코스트나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나 이러한 국면에서는 사실 배타적 예외에 의해 유지, 작동되는 정치의 결과물로서는 동일한 그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작동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전체적인 요지로 읽힌다.        

이러한 그의 빛나는 인식과 재능의 문체를 뒤로하고도 먼저 나는 특별히 그의 문장에서 사적인 어떤 감정을 고백할 수 있다.

“혼돈에 적용할 어떤 규칙도 없기 때문에 혼돈은 무엇보다 먼저 외부와 내부, 혼돈과 정상 사이의 비 식별역의 창출을 통해, 다시 말해 예외 상태를 통해 질서 속에 편입된다. 실상 어떤 것과 관계를 맺기 위해선 규칙은 그러한 관계 바깥에 있는 것(관계없는 것)을 전제하고, 관계를 여전히 그러한 방식으로 산출해야만 한다.”(<호모 사케르>.62쪽)  

정확히 나는 저 문장을 읽으며 20대 때 앓던 우울증, 내적 정치가 실종되었던 홍역기, 나의 상태를 떠올릴 수 있다.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내적 혼돈에 빠졌으며 그 폐쇄의 밀폐 안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던 경험을 이름이다. 그 혼돈에 적용할 어떤 규칙도 갖지 못했으며 그 혼란에 전제되는 힘의 구축점이 부재하던 그 혼돈과 불안의 바다를 말이다. 어떻게 이 망연자실의 절대 유실의 늪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이러한 사적인 체험에서도 나는 아감벤의 통찰이 지시하는 정치란 것이 지적체계의 공공성, 객관의 원리를 건조하게 규명하는 로고스적 권위와 더불어 그것이 곧 인간의 내면의 투사로서의 정치 곧 정신분석적 기획으로서의 정치임을 인정하고 환호할 수 있다.


외부와 내부, 정상과 예외상태, 비 식별역의 창출, 저러한 분절과 심리적 경계선을 경유하지 않고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울증자의 상태로 침몰하게 되며 따라서 정치가 바로 저 무중력의  무미건조함에서 탈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비 식별역 공간을 생래적으로(?)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 생각나는 문장은 역시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체스터턴이다.(어찌 지젝이 그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느끼려는 탐미적인 무정부주의자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순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시정(詩情)에 따르기 위해 집의 경계선으로부터 벗어나지만 더 이상 집의 경계선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더 이상 ‘오디세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오소독시>.180쪽) 

역시 저 문장이 핵심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심리적 ‘경계선’이다. 무엇을 그 어떤, 무엇에 대해 느끼고 흥미, 자각을 감흥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은 헤겔식으로 하면, 부정적인 것, 그것에 걸려 역광, 결과적인 효과로 발화되게 하는 심리적인 경계선이 아닌가?

그렇다면 외부가 없다는 것, 그 어떤 (특히 부정적인 투사물로서) 전제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정치에서든 외부의 실정 정치에서든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재앙이 아닌가? 그것들의 부재와 상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지각 제로의 매우 위험한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아감벤의 문장은 바로 또 다른 방식으로 악용해(?)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실제로 추방령을 받은 자는 단순히 법의 바깥으로 내쳐지거나 법과는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며, 생명과 법,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해진 것이다.”(<호모 사케르> 79쪽) 물론 이 문장은 식별, 비식별역의 연관성의 형식에 의하지 않고는 정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을 규명하기 위해 “추방”의 국면을 설명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나는 신학적 착각을 투사해 저 추방이라는 단어를 실낙원의 그것에 연관지어 바꾸어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곧 저 법의 외부, 무정형지대로의 ‘추방’을  낙원에서의 추방으로---. 곧 실낙원은 바로 외부, 힘이 내면의 역학정치가 걸리지 않는 비식별역, 부정적인 것을 갖지 못한 무전제, 무정형의 의식 상태에 위치해 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곧 오늘날 낙원의 상실을 정신분석적으로 다시 기술하면 외부가 없는 동일성 상태, 외부에 대한 근거와 경험이 박탈되는 평수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물론 여기서 또한 생각나는 사람은 주판치치다. 곧 그녀는 <실재의 윤리>에서 오이디푸스의 딜레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며 죄인이 될 경험(외부를 투사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절대 유실자(존재를 근거 지을 수 있는 그 어떤 전제도 박탈된 자)를 또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

“제발 내게 죄가 있었으면-하지만 당신은 내게서 그 명예마저도,(당연한 권리상 내게 열려 있는) 상징계 안의 그 자리마저도 앗아 갔다! 내가 그 모든 고통을 겪었음에도 나는 죄가 있지조차 않다(이는 그의 운명의 의미가 아닌 무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당신은 내게 (욕망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남겨 놓지 않았다."(<실재의 윤리>.298쪽)

"그것들의 결여를 박탈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붕괴할 것이다” (위의 책.367쪽)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온갖 심급의 외부, 배타적 영역의 창출, 그것도 모자라 그것들을 신학언어로 금형, 밀봉한 것은 정확히 무엇을 노리는 기획이었던가? 오늘날 탈-근대를 지나 탈-해체론의 철학자들이 바울에 대해 호의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새로이 해석해내는 저의들이 알만해 진다. 이렇게 다시 성서를 정신분석의 렌즈로 경유하여 읽는다면 기독교는 다시 새롭게 해명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수명은 또다시 연장될 수 있을까?

한편, <호모 사케르>는 곧 바로 나를 헤겔로 인도했다. 직장 내 도서관에서 우연히 <정신현상학1>을 펼쳤는데 문장들이 쑤욱 빨려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감벤이 정리해 준 내,외부의 차이,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예외’, 배반적 역설로 정치가 유지된다는 설명은 쉽게 헤겔의 문장들을 이해하게 했다. <호모 사케르>를 경유하지 않았더라면 헤겔은 여전히 나에게는 철벽,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와 같은 일반 소시민이 그 악명 높은 정신현상학을 완독해 보다니?--- 그를 통해서는 또 이번에는 비로소 지젝이 훨씬 쉽게 읽히는 선물을 경험하게 되니 이래저래 횡재가 아닐 수 없다.



부끄럽지만 이로써 나는 ‘독일 관념론’ 할 때의 그 관념론에 대한 이해를 비로소 나름대로 하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 행동을 규정짓는 절대적인 표상과 이념으로써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믿음과 생각이 그것이며 그것이 칸트로부터 시작되고 그 탐색과 궁구가 헤겔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도---. (중년의 나이에 이 무슨 철지난 도둑질인가?)

헤겔에게서 관념론이 무엇이 절정인가? 문자 그대로 절정은 긍정의 화려한 꽃이면서도 꽃인 한에 그 정점으로 동시에 부정의 국면으로 침범하는 과잉과 잉여, 잔재를 남긴다는 점에서 정오의 꼭지점과 같다. 헤겔에서는 무엇이 그것인가? 그냥 내가 내 기분으로 이해한 국면으로 하면, 먼저, 헤겔은 스피노자의 신학을 역사내적 문제로 더욱 적극적으로 치환, 신학화 시켰고 그 신학화의 내부 장치를 통해 절대를 지나치게 사적으로 전유하도록 친절하게 원리화했다. 그런데 그 원리화는 너무나 아름답고 치밀하고 성능이 좋아 신성(활력)의 과잉을 항시 내면에 발생시킨다는 약점을 내재적으로 가진다. 이렇게 생산되는 내부 상태의 과잉이 또한 정신, 이성이라고 하는 우주론적 초월자의 위계가 이를테면 순수 신학의 경우처럼 세계와의 충분한 간격이 확보된 안전거리(?)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역사내적 지근거리에 배열되어 있는 만큼 그 낮은 초월에 조응하여, 또한 그것이 지나치게 역사내적 세계 안에서 발화, 폭발시켜 그 과잉을 압착, 강화시킬 수 있다. 곧 신학적 의식의 범람이다. 


곧 신학적 장치는 신학적 장치인데 그것이 충분히 신학적이지 않다는, 그의 초월이 충분히 초월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과잉의 초월, 절대를 팽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를 환상하고 그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사적 절대의 정열의 아름답고 정교한 내부 정치의 원리화로 정교하게 꽃피우게 된 것이 독일 관념론의 절정이며 곧 그 절정이 생산하는 과잉이 더 이상의 관념론적 이상에 대한 탐색의 동기를 또한 그만큼 줄여 준다는 면에서 그 꽃의 만개는 또한  그 절정의 끝이다. 곧 헤겔의 신학은 내가 보기에 일반 이성에서도, 이 역사내적 세계에, 그 내면에 범람하는 휘브리스를 남길 여지가 충분하도록 실제와 이상이 혼재되고 밀착되어 있는 것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또한 충분한 경이의 찬탄과 함께 또 다른 방식의, 그의 신학, 신관, 정신에 대하여 일종의 <우신예찬>도 함께 쓰여져야 할 것이 아닌가?(물론 모든 정치신학적 기획자들을 포함해서---)  

한편, 관념론의 흐름을 복권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진 지젝이 이 지점에서 더 쉽게 읽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역시 전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 헤겔과 관련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신학의 문제를 직시하고자 하는 <죽은 신을 위하여>를 다시 펴 읽었다. 물론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도---.

 


지젝에게서야말로 주체를 다시 재건하는 문제, 즉 마음의 생기와 활력을 발생시키는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문제, 즉 신학적 문제가 아닌가? 하여 그는 바로 헤겔을 그리고 라캉, 맑스를 경유, 정치의 문제로 환원하여 신학적 직격탄을 날린다. ‘너 신 믿냐?’
주체에 대하여 이러한 도발적 질문이외에 그 어떤 방식이 또 적실성을 띨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은 여기에서 동일성이나 완전무오하다는 전통적 신관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역시 헤겔적 사유로 팽창된 정신분석적 이해, 역학관계의 준거로서의 신이다.

“첫째, 인간의 유한성은 정확히 무한성과 등가이다. ‘삶과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충동의 외설적 ‘불멸성/무한성’말이다. 둘째, 존재의 질서를 ‘전도시키는’ 악마적인 의지의 과잉에 붙여진 이름은 바로 주체이다.”(<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226쪽)    


변증법적으로 작동되는 존재가 실재라면 그렇다면 신 자체가 이미 분열되어 있고 찢어져 있다. 인간이 바로 그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찢어진 분열과 결여에 의해 주체가 지탱된다면 신 자신이 바로 결여와 분열의 존재가 아닌가?  

“신성의 궁극적 정의 또한 이것이 아닌가? 신이란 신 자신의 가면을 써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어쩌면 ‘신’이란 본체적 사물(noumenal Thing)로서의 절대와 그것의 현상으로서의 절대 사이의 이 궁극적 분열을 일컫는 이름, 이 둘은 같으며 둘 사이의 차이는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일컫는 이름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은 궁극적 모순을 일컫는 이름이다. 즉 신(재현할 수 없는 절대 건너편)은 바로 그런 존재로서 현상해야 한다.”(<죽은 신을 위하여>.232쪽)

 

 

 

물론 이러한 결여의 신은 전통적인 신관에 오류가 있다는 신성 모독적 독해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별개의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신분석적으로 그러한 결여와 말로 진정한 의미의 전능하다는 신의 좌표를 해명하는 전통 신학에 대한 배반적 우회로가 아닌가? 지젝이 맹렬하게 파헤치는 저 궁극적 분열과 결여, 공백은 바로 내재적 외부의 다른 이름이다. 이성과 초월, 이성 안에서의 균열, 이월의 층위를 내재적으로 포함함으로 내부의 존재 근거, 경계, 전제가 되는 부정을 궁극의 근원 신관 안에 근거지움으로 활력의 정치가 아예 궁극 근원의 뼈에서부터 발화되고 폭발되도록 작동된다고 하는 것이 지젝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곧 그에게서의 신은 사실상 이미, 아니 처음부터 죽은 철저한 유물론의 신이다. 신이란 살아있는 객관적 인격이라기보다는 저러하게 잉여와 균열, 공백의 배반적 역설의 배열과 차이로 인해 의지와 내면을 충분히 활성화시키는 일종의 호황기의 기계장치와 다른 이름이 아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전능하다는 신은 바로 저러하게 작동되는 신이므로 전능하다는 초월, 비인간으로서의 역능적 권위를 항구적으로 점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지젝의 신은 익살맞고 재미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신의 역학으로 다시 인간의 내면이 재활성장치로 역동화 되기를 희망한다.

이 모든 국면의 인식과 기획, 고대신학에서 슈미트, 아감벤, 지젝등의 통찰들에 이르기 까지 그러면 결국 내외면의 정치, 국면들을 흔들고 주물하여 새로운 욕망들을 가능하게 하려면, 다시 진리적인 삶의 로맨스를 욕망하려면 결국 신학으로 복귀해야만 할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어떤 방식으로서든 신학적 기획의 범주가 발생시키는 연관관계에 걸려서만 이러하게 정치가 발생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아예 노골적으로 전통 신학으로의 복귀는 어떠한가? 역시 그것은 궁색하고 머쓱한가?

오늘날 또 다른 면에서 신학적 사고에 가장 닮은 것으로는 바디우가 있고(사건이나 (진리의)압류 같은 개념은 이미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발견된다) 알렌카 주판치치 또한 이미 그 편의 분석을(이를테면 칸트적 기획과 같은)넘어 주체의 욕망이 걸리는 새로운 지점을 모색하고 있고, 가장 적극적으로 지젝은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신을 처참하게 살해함으로 다시 되살려 바울의 신학을 자신의 방식대로 맹렬하게 반복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점에서 <정치신학>의  번역자 김항 교수가 책의 해설에서 친절하게 언급한 것처럼 아감벤의 보고나 슈미트의 이해가 오늘날 탈-주체에 대한 반성이나 정치학에서 섣불리 어떤 대안으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 내면을 소유했던 슈미트의 행적이 증명해 주는 것처럼 그것은 또 하나의 우신신학이 되고 휘브리스로 휘어질 우려가 항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우려를 염두에 두지 않는 독자가 한편, 또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 어떤 것이든 그 무엇이 적실하게 가능해지려면 아감벤의 의도처럼 그에 걸리는 힘의 연관관계가 없다면 설정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먼저 중요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이 정치로 통해 발생한 힘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나 감각을 성숙시키는 국면으로 다시 신학적 기획을 반복하는 쪽을 택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새로운 정치, 주체의 지점을 발명하는 국면을 모색하든지는 각각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인류는 '삼라만상을 알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믿지 않는' 애처로운 악마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지만 어떤 것에도 감동하지 않는다."(<정치신학>.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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