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학원을 찾았었다. 그 곳에서 배우는 미술은 재미있었고, 수채화뿐만
아니라 뎃셍이나 유화도 배우면서 나는 잠깐 그림을 그리며 사는 삶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잠깐의 생각만으로
부모님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상처를 받은 나는 더 이상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모르지만, 여행길에 올라 그림을 멋지게 그리는
것이 아직도 로망 중에 하나이다. 주말에 가끔씩 책을 보며 그림을 그려보는 게 전부여서 아직은 이루기
요원한 로망이지만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가 무척 부러웠다. 역사적인 곳에 방문하여 그곳을 스케치북에 담고 그곳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특별한 장소의 이색적이고 오래된 분위기를 전해주는 멋진 그림들이 책 안에 가득 들어있어 몇 가지 간단해 보이는 그림은 따라 그려보고
싶었다. 책에 담긴 아름다운 장소들을 찾아 가보고 싶은 마음도 불쑥불쑥 들었다.
저자는 전태일, 이상
등이 자취를 남긴 장소와 그들의 인생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평화시장이나 이상의 집도 그림으로 구경하고
전태일과 이상의 인생 이야기에도 빠져들었다. 요절한 전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다 그들이 자취를
남긴 장소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한국 최초로 세워진 각종 가게들도 글과 그림으로 소개했다. 대부분이 일제 시대부터 시작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가게들 이야기이다. 2~3대를
이어가며 열정을 바친 장인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가게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들었다.
이들에게는 가게를 지키는 것이 단순한 밥벌이가 아닌 역사를 잇는 하나의 사명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라 소개된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집에 턴테이블은 없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동생을 리빙사에 데려가 구경시켜 주고 싶고, 빵을 좋아하는 나는 태극당에서 모니카 아이스크림과 커피빵을 먹어보고 싶었다.
캘리그라피 연습을 좋아하는데, 실력이 쌓이면 구하산방에 가서 좋은 붓 하나를 마련하고 싶어졌다.
책은 요정에서 사찰로 거듭난 길상사처럼 과거와 쓰임새가 달라진
장소들을 소개하면서 끝난다. 공장에서 프랜차이즈 카페로 탈바꿈하기도 했고 여관에서 전시장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 쓰임새의 커다란 변화가 놀라웠다.
거의 대부분 서울 안에 있는 장소들의 이야기이지만 서울 안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새로웠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림과 글로 이색 서울 여행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좋아한다면, 여행이나 탐사를 좋아한다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