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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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주저리 주저리 많은 말보다 촌철살인의 한 마디가 더 가슴을 울린다. 그래서 시를 읽는 지도 모르겠다. 500 페이지가 넘는 책이 담고 있는 말을 하려고 시인은 시 한 편을 쓴다.

저항 시인 박노해는 인생의 가을 즈음 하여 아주 응축된 메시지만을 전하는 <걷는 독서>를 썼다. 한 두 마디의 글이지만, 그 문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진하게 가슴에 스며든다. 삶을 말하고 인생을 말하는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오지에 가서 활동했던 만큼 이국적이고도 아름다운 사진들이 가득하다.
이 책의 모든 텍스트는 번역된 영문과 함께 실렸다. 저자 소개와 서문까지 모두. 물론 한국어의 맛을 모두 살리기는 힘들겠지만, 나름의 느낌이 있어 영문도 모두 읽었다.

지구별에 놀러 온 아이야.
너는 맘껏 놀고 기뻐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네 삶을 망치는 것들과 싸워가라.


You child come to play on this globe.
Play, rejoice, love to your heart’s content,
and fight with everything that spoils your life.
(p. 235)

박노해는 우리에게 마음껏 응원을 전하기도 하고, 위로를 전하기도 했으며, 뼈 때리는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게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낼 게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The reason
you keep falling down is
because there is something
you have to achieve.
The reason you
set off again weeping is
because there are flowers
you should bring to bloom.
When life is hard
and there is no way ahead,
look up at your sky.
(p. 203)


그가 책 속에 꾹꾹 눌러 담은 메시지들 중 지친 하루를 보듬어주는 것 같은 문장들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포스트 잇을 잔뜩 붙이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생을 보낸 저항 시인이 건네는 위로는 나름의 커다란 힘이 있었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Autumn sunshine is so good.
Quietly it dries me out.
My sorrows, my wounded desires,
my only too clearly visible days of life.
(p. 547)


그는 어려서 통학했던 길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구치소에 갔을 때 조차도 걷는 독서를 했다고 한다. 두 걸음 반을 반복하며 걷는 독서를 했다고. 그 작은 방 안에 갇혀 있을 때에도 독서는 그가 평원을 달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생의 고통은 위로로 사라지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고 젖은 날을 피할 수 없듯.

Life’s pain does not vanish by consolation.
Just as using an umbrella
does not keep off heavy rain.
(p. 645)


그가 걷는 독서를 통해 길어낸 정수만을 담은 책. 너무 많이 말하고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듣는 시대, 모두가 유튜브에서, 또 인스타그램에서 컨텐츠를 넘쳐나도록 생산해내는 시대, 저항시인 박노해의 짧고 진한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고요한 성찰과 위로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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