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 인생 후반전에 만난 피아노를 향한 세레나데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1월
평점 :
품절


누군가는 무술을 할 줄 아는 할매가 되고 싶다고 하고, 누군가는 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한다. 김연수 작가의 꿈은 멋진 할머니라고도 한다(멋진 할아버지가 아니라). 내 희망이라면, 눈이 허락하는 날까지 책 읽고, 서평을 쓰며, 글도 끄적이고, 퀼트를 하며, 프랑스자수를 하는 할매이고 싶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꿈은 피아노 치는 할머니. 피아노라 하면, 어린 여학생들의 전유물이자 필수 코스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초등학생 때 엄마가 가진, 딸들이 취미로 피아노를 쳤으면 하는 희망으로(내 희망이 아니라) 피아노 학원을 다녔었다. 역시 엄마의 의지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그만 두었지만(아직도 내가 왜 피아노를 시작했고 갑자기 왜 그만두었는지 모른다).
이나가키 에미코 역시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엄마의 연습하라는 잔소리와 지루한 연습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도 벌써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어려서 하다 만 피아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프로 피아니스트 선생님께 레슨을 받고,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카페의 피아노를 영업 전 후에 빌려가며 이나가키 에미코는 피아노의 세계에 빠져든다.

악보를 보며 고생스럽게 연습하는 동안 작곡가와 만난다. 마치 동경해 마지않는 작곡가의 집에 초대되어 함께 밥을 먹고 느긋한 술자리를 갖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전까지는 동경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대상은 때로 수백 년 전에 사망한 희대의 천재인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SF 소설에 나올 법한 기적이 아닌가.
그렇게 깨달은 순간 내게는 가슴 떨리는 목표가 생겼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며 최대한 많은 천재를 만나고 싶다. 그들과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p. 133)


하지만,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발전과 습득이 빠른, 스펀지 같은 흡수력을 가진 어린 아이가 아니라 이미 중년에 접어든 아줌마에게는 더더욱. 우선 악보를 읽는 것 자체가 어렵다. 노안인지 악보가 작으면 더 어려워서 확대복사를 해서 써야 한다. 플랫과 샵이 난무하는 악보라면 해독 불가. 낮은 음자리표는 암호 수준이며, 왼손과 오른손 파트 외에 하나 더 있는 파트는 도대체 어떤 손으로 어떻게 쳐야 할 지 난감하다

피아노의 길이 험난하고 멀고 끝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음악이란 원래 할 수 있다거나 잘한다거나 하는 것 이전에, 덧없는 세상에 휘말리다가 단단하게 오그라든 사람의 마음을 해방시켜 주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p. 48)

때로는 손가락 분리가 되지 않아, 악보대로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기도 하고, 맹렬히 연습하다가 근육통이며 건초염에 시달려 피아노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연습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느는 건 달팽이의 속도이고, 잔뜩 긴장하고 힘이 들어간 채 피아노를 치기 일쑤다. 레슨 때는 하도 긴장해서 연습한 실력의 반도 보여주지 못해 분해한다.
하지만 이나가키 에미코는 어렸을 때와 다르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고, 꼬박꼬박 하루에 두 시간, 세 시간씩 맹연습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꿈꾸는 명 연주와는 커다란 간극을 보이는 연주를 해야 하고, 자신이 연습하면서 끝없이 내는 엉터리 연주 소리를 들어야 하는 괴로움이 있지만. 그 지난한 연습과, 긴장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던 발표회의 끝에 그가 느낀 건, 현재라는 순간을 즐겨아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노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은 목표를 높게 갖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하면 된다. 하지만 노인을 다르다. 멀리 있는 목표를 보지 않고 지금 눈앞에 있는 아주 작은 일에 전력을 다한다. 야망을 품지 않고 지금을 즐긴다. 자신을 믿고, 사람을 믿고, 세계를 믿고, 지금을 즐긴다.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그저 즐기면 되지 않을까.
노인은 현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p. 271)


나이드신 분들이 글쓰기가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영어가 되었건, 자격증이든, 취업이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생이 저물어가고 있음에도, 그저 주저않아 있지 않고, 서툴고, 모자를 지라도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쏟아붓는 모습은 그 자체로 모두에게 힘이 된다.
피아노와 씨름하는 이나가키 에미코에게도, 은퇴 후 자격증 공부를 하고 계신 엄마에게도, 인생의 저물 녘에 그림, 영어, 소설쓰기 등에 푹 빠지신 분들에게도, 또 만년에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은 나에게도, 모두모두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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