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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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특히 신입 시절에, 커피 심부름, 청소 등 업무와 관련 없는 잡무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라면 1학기에 공부나 연구보다 연구실 잡무가 더 많아 서러웠던 날이 하루쯤은 있었을 것이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며, 그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가 참 아리송하면서도 무언가 통쾌함을 느낀 이유는, 신입 시절 해야 했던 그런 경험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바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한다. 그리고 서너 명의 필사원과 심부름하는 한 명의 소년을 고용한다. 그 필사원 중 한 명이 바로 바틀비다. 필사원마다 흥분을 잘 해서 실수를 한다거나, 소화불량 때문에 성마르다거나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바틀비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아주 놀라운 양을 필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사원들이 흔히 하는 필사 문서 검증에 바틀비를 불렀다. 그러나 바틀비는 단호하고 조용하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잠깐의 심부름을 시켜도, 바쁜 와중에 도움의 손길을 청해도, 바틀비는 항상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필사를 했다.
나도 다른 팀의 출장간 사람의 사내 업무를 때우라는 요청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하거나, 나도 바빠서 집에는 잠만 자러 가는 와중인데, 다른 사람의 잡무를 도우라는 요청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했으면 얼마나 통쾌했을까. 바틀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먼저 든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듯 하다. 무자비하게 일을 떠 안기고, 직원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회사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런 경우가 하나쯤은 떠오르지 않을까.
이후 바틀비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에서까지 안 하는 편을 택한다. 그의 속내는 무엇일지. 어떻게 상사의 요청을 단칼에, 그리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지. 그가 그렇게 많은 것을 거부하면서 지키려고 한 것은 무엇인지. 사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바틀비는 저항하고 싶은 것에 저항했고, 권위에, 강요에, 갑질에 지지 않았다. 이 소설의 결말이 어떻든 간에, 당하고, 자포자기하고, 무시되고, 영혼까지 탈탈 털리며 소진되는 회사 생활을 하는 모든 이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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