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문구점 아저씨 - 좋아하는 일들로만 먹고사는 지속 가능한 삶
유한빈(펜크래프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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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위 문덕(문구 덕후)이 된 것도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사실 어려서부터 문구를 좋아했다. 취업을 하고 가장 먼저 날 위해 산 것도 볼펜, 샤프, 수첩 등이었다. 그러다 만년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문구에 대한 욕구와 욕심이 폭발했다. 그 세계는 잉크, 종이, 루페 등 탐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인기있는 팬시 용품을 고를 자신에 넘쳐서 팬시점 MD를 하고 싶기도 했고, 여성스럽고 예쁘고 사랑스런 필기구만 모아 놓을 자신이 있어서 젊은 여성 타겟의 펜샵을 하고 싶기도 했다. 물론 농담뿐이고, 그런 꿈을 꾸는 동안 내 몸은 야근을 밥 먹듯 하는 IT 회사에, 또 출근 시간이나 점심 시간을 1분도 어길 수 없는 공기업에 매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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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문구점 아저씨>의 저자는 내가 농담으로만, 또 상상 속에서만 하던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바로 <동백문구점>. “안 팔리면 제가 평생 쓰면 되니까 괜찮아요라고 하면서. 어쩌면. 내 마음도 똑같았다. 팬시점이든 여성 타겟의 펜샵이든, 거기 들여놓는 물건들이 안 팔리면 내가 다 갖겠다고, 안 팔리면 더 좋다고 농담하던 내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덕질의 최고봉은 제작이라고, 만년필을 한 2~3년 썼더니 내 취향에 맞는 노트를 갖고 싶어서 손으로 실제본을 하고 직접 표지에 쓸 종이를 골라 수작업으로 노트를 만들어 썼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는 여분의 노트를 두 어권 만들어 문구 동호회에 나눔을 하기도 했다. 그 때의 즐거움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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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문구점>에서는 내가 아마추어로 어설프게 하던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었다. 문구점 주인장의 취향에 맞는 노트를 디자인해 인쇄소에 가서 대량으로 맞추어서 제작해서 판매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잉크도 여러 회사와 협업하여 <동백문구점>만의 잉크를 제작했다. 문구점을 닫고 밤 열 시까지 손수 병에 옮겨 담고 스티커를 붙였다니. 정말 아무나 못할 일이었다.
그의 손글씨 또한 이 책에서 빼놓을수 없는 주제다. 사실 그는 <동백문구점>을 하기 전까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손글씨 영상으로 활동했다. 그걸 계기로 손글씨 교정 강의도 하고, 손글씨를 연습하는 책도 썼다.
그의 정갈한 서예 느낌의 글씨가 낯익다. 내가 만년필에 빠지고 나서 활동하던 문구 동호회 카페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 때도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고 인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갈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런 그도 사실 어렸을 때 글씨를 못 썼고, 손글씨 장인과 문구점 주인을 하기 전까지 해야할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십대를 보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라도 해 보려다 실패하는 등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컸다. 그러나 그 과정을 다 거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니, 그야말로 성덕(성공한 덕후)이 아닌가 싶다.



이 책으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 중이신 분께 작은 성냥불 하나 정도의 빛을 밝혔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p. 255)



인공지능이 뭐든 해내는 이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굳이 노트를 꺼내 필사를 하고, 번거롭게 종이로 된 만년필 전용의 다이어리를 쓰고, 노트를 손수 바느질해 만들고, 부득부득 관리하기 힘든 만년필을 쓴다. 그런 문덕들이 너무나 공감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은 책이었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한번 써보시라. 진짜 맛있는 초콜릿은 깨물어 먹지 않고 녹여서 천천히 맛보고 싶은 마음과 같달까.
(p. 212)



이 책을 덮고 나니, 슬그머니 동백문구점에 가보고 싶어진다. 문구점을 지키는 고양이 석봉이하고 놀고, 주인장이 취향대로 멋지게 제작한 노트와 잉크도 사들고 나오고 싶다. 어쩌다, 문구점 아저씨가 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보인다. 좋아하는 일을,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소신껏 하는 그가 진정 프로가 아닐까? 그리고 진정으로 용기있는 직업인일 것이다.
우리 인생은 사실 그리 길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인상쓰고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전부 보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내게도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성덕이 되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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