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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ㅣ 문예단행본 도마뱀 1
박은정 외 지음 / 도마뱀출판사 / 2020년 11월
평점 :
새학기가 되어 부모님이 문구점에 데려 가면, 엄청난 양의 문구를 고르곤
하며 문덕의 소질을 보이던 내가, 직장인이 되자 본격적인 문덕이 되었다. 다 쓰지도 못할 만년필, 노트, 펜, 잉크가 쌓여간다. 어찌나 많은지 문구점을 해도 될 것 같다. 이번 생에는 사 놓은 문구를 다 쓰고 싶은데, 그러려면 200세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사 놓은 문구를 써야 할 것 같다. 그마저도
계속해서 문구가 는다. 책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나마 책은
읽는 양이 좀 되니, 열심히 읽으면 이번 생에는 사 놓은 책을 다 읽을 지도 모르지만, 계속해서 책이 늘기는 이 쪽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시인, 가수, 에세이스트, 기자, 음악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계 인물들이 탕진잼에
대해서 썼다. 나는 책과 문구에 탕진했지만 이들이 탕진한 건 더 다양하다.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성공 가도의 커리어를 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한 경력 탕진잼, 퇴직금을 탕진하며 인생 2막을 열 힘을 낸 이야기, 음악과 음주에 탕진한 이야기. 낯선 곳에서 플로리스트 디플로마를
따려고 애를 쓰는 삶을 살면서 단지 누군가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 시간 탕진잼, 연뮤덕이 되어 좋아하는
배우의 공연을 보기 위한 시간과 돈 탕진잼, 글을 쓰다가 막힐 때마다 지뢰찾기 게임을 하며 게임 탕진잼.
남들이 정한 행복에 맞춰 사는 것은 한눈팔지 않고 내비게이션에만 집중하는 운전과 같다. 조금이라도 경로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면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반면 내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마치 흐르는 물 위로 유영하는 것과 같다. 가볍고 자유롭다. 어디로
흘러가도 물결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나를 믿는 힘은 안전한 구명조끼와도 같아서 센 물살에도 불안하지
않다.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안전하다. 물
위에 내 몸을 띄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려면 내게 질문을 던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p. 33)
내가 문구와 책에 탕진한 가산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양이지만, 난 그 덕에 삶을 견딜 수
있었고, 맞설 수 있었다. 집은 창고가 되었어도, 그로 인해 얻은 기쁨도 쌓였으니, 그거면 됐다.
때로는 무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탕진잼을 즐기는 방법은 단순히 추락으로 끝나버리는 1회성 쾌락이 아니라, 낙하하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방향을 살짝 비튼다면 어느 정도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비행’인지도 모르겠다.
(p. 48)
탕진하는 건 단지 돈이나 물건 만이 아니다. 때로는 아등바등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어루만져 주는 시간을 탕진하기도 한다. 바쁜 와중에도 잠시 카페에서 책을 읽어야 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을
마치고 나면 맥주 한 잔을 해야 하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의 과거를 상상하며 현재의 내 시간을 기꺼이 탕진할 때, 나는
어쩐지 다른 인간이 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p. 71)
혼자서 갖는 그 한 시간이, 삼십
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시간을 벗어나서. 시달리고 치이는 공간을 벗어나서.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삶과 유대하며 얼마만한 문자를 탕진하며 살아왔던가. 결국 내가 원했던 건 다른 삶이 아니라 오래된 삶을 지속할 혈렁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p. 122)
점점 치열하고 숨막혀지는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만 하다 한 세월 다 보내는 것 보다는, 오르는
집세와 매일을 싸우며 허리띠를 졸라매기만 하기 보다는, 오늘은 자신에게 탕진잼 하나를 허락하고 좀 더
행복해지고, 좀 더 나아지는 게 어떨까.
한 방에 모든 종류의 불안을 부술 수는 없으니 구매 가능한 행복으로 불안을 잘게 찧자. 버티지 말고 행복해지자. 아주 작고 하찮은 기쁨이더라도 기쁨은 기쁨. 열심히 작은 기쁨을 구매하자고 나를 다독여본다.
(p. 135)
오늘도 나는, 예쁘고 앙증맞은 미니 연필 세트를 샀다. 작고
하찮은 연필 따위지만, 난 이걸 받고 좀 더 기쁘고, 좀
더 힘이 날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