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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언니 - 언니들 앞에서라면 나는 마냥 철부지가 되어도 괜찮다 ㅣ 아무튼 시리즈 32
원도 지음 / 제철소 / 2020년 7월
평점 :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는 많은 시간을 언니로 살았다. 집에 여동생이 한 명 있고, 느지감치 들어간 대학원에서는 동기와
후배에게 언니였고 몇몇 선배에게도 언니였다. 회사에서도 나이 어린 직원들하고 잘 어울리게 되어서 밥
친구들도 언니라고 불렀다.
그래서일까. 내게는 언니나 오빠에 대한 환상이 있다. 동생을
챙기고, 커피라도 사 주는 걸 종종 헀던 나는 챙김 받고 싶고,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주위에 언니나 오빠는 많지 않았다.
내 바램과 별개로 그 많은 여동생들에게 나는 어떤 언니였을까.
여기, 내가 그렇게 바랬던 멋진 언니를 많이 가진 경찰이 있다.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경찰공무원 시험을 본 원도는 경찰학교에서 아주 많은 동기 언니들을 만났다. 그 언니들은 아픈 오빠를 가진 동생으로 살았던 원도에게 새로운 세계가 되어주었다. 더 이상 아픈 오빠의 동생이 아닌, 누군가를 부양하고 책임져야 할
존재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해준 언니들에게 원도는 마음을 열었다.
동기 언니들과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언니는 피곤했을 텐데도
원도에게 맛집 요리를 먹이고 디저트까지 알차게 먹이기도 하고, 집의 친언니는 고3 진로상담에 와주어서는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캔커피를 들려 주고, 원도가
독립출판으로 책을 내자 독립책방에 책을 잘 팔아주어서 감사하다고 선물과 편지를 보내고.
개중의 어떤 언니는 시험 준비 중 만나 과도한 경쟁심으로 시험 점수가 잘 나온 원도를 시샘하며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이 얼마나 내가 꿈꿔오던 언니들인가.
언니들은 경찰로 일할 때에도 원도에게 다가왔다. 짧은 머리의 원도에게 집요하게 남자냐 여자냐를
묻던 아저씨를 여경 선배가 물리쳐주고, 과장 여경 선배는 고민 거리를 들어주고 지원을 약속했다.
원도는 경찰관으로 마주한 대한민국 언니들의 현실도 이야기한다. 남편의 폭행으로 사망한 언니, 출산하다 사망한 언니. 아이를 낳던 여자의 죽음 따위에는 뜨뜻미지근한
의료계, 알려지지 않은 언니들의 죽음. 독박육아 스트레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언니, 그리고 그 목숨 따위 대수롭게 않게 생각하는 그 언니의 시가.
완전히 돌아버려야만
똑바로 설 수 있는 팽이와 같은 세상에서 성실과 진심의 가치 따위, 씨알도 안 먹힐지 모른다. 이렇게 살아질 바엔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쓰러지지 말자. 우리가 맞잡은
손이 끝없이 이어져 언젠가는 기쁨의 원을 그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운이 되어주자. 세상이 심어준
혐오와 수치 대신 서로의 용기를 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갈 우리는 설렁탕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다.
(p. 158)
여성의 비율이 상당히 낮은 분야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너무 감동적이고 고마운 책이다. 대한민국 ‘언니’들을 응원한다. 대한민국 여경 원도도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