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이야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지만, 어렸을 때는 소설만 읽었다. 교양서를 읽는 사람이 그렇게 고리타분해보이고, 심지어는 끔찍해보이기도 헀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많은데, 왜 어려운 말이 잔뜩 씌여 있는 교양서를 보는 거야. 나이가 좀 들어서야 교양서도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소설보다도 교양서가 더 잘 읽히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소설을 사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김영하, 김연수, 이외수, 공지영 등 좋아하는 작가도 많다. 어쩌면 소설이 독서의 시작이었던 만큼 내 마음의 고향으로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의 <커튼> 역시 소설에 대한 에세이라길래 들춰봤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술술 읽히는 가벼운 에세이 류는 전혀 아니었고, 좀 어렵기도 했지만, 소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도 다각도로. 밀란 쿤데라 역시 출중한 소설가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생각들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p. 21)

<다시, 책은 도끼다>라는 책에는 이 책을 깊이 이해하고 쓴 해설이 나온다. 밀란 쿤데라의 커튼은 바로 삶의 어두운 이면, 진짜 모습이 보이도록 소설의 커튼을 걷는 것이라고. 멋진 모습만 편집해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일상까지 <돈키호테>에는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웅현 작가만큼이나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 역시 이 책에 나오는 돈키호테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
향수>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는 체코의 불안한 사회를 떠나 이민간 사람 등 향수를 느끼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때 알았다. 밀란 쿤데라의 고향이 체코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프랑스에 정착했다는 것을. 어쩌면 일부는 그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변방의 문학에 대한 고찰이 종종 나온다. 유럽으로도 아시아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중부유럽에 대한 생각들, 라틴 아메리카와 중부유럽의 유사성, 체코처럼 작은 나라들에서의 문학에 대한 단상들.
그리고 무엇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스마트폰과 유투브의 시대. 초등학생 들의 장래희망 1위가 유투브 크리에이터인 시대에 문학은 죽었고, 출판 시장은 사장길에 들어섰다는 의견도 많지만, 그래도 나는 믿는다. 문학은, 책은, 사람들이 좀 덜 찾게 된다 해도, 세상에는 분명 소설을 애독하는 사람이 어디엔가 꼭 남아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누군가는 소설을 쓰고, 책을 만들 것이라고. 그게 비주류가 된다고 해도. 문학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문학에 빠진 누군가는 반드시 있어서 책을 쓰고, 편집하고, 인쇄할 것이라고.

수백 가지 분야로 세분화된 과학으로 인해 분할되고, 철학에 버림받은 현대 세상에서, 소설은 인간 삶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최후의 망루로 남아있다는 것을.
(p. 177)


한동안 인문 교양서를 열심히 보느라 소설이 잘 안 잡히는 경험을 했는데, 조금씩 다시 소설이 좋아지고 있다. 독서의 즐거움을 가장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딱히 지식이 늘어나지 않고, 일 하는 데 도움도 되지 않고, 좀 더 열심히 살도록 각성시키지 않는다 해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라 해도, 재미있으니까 소설을 읽는다. 쓸데없이 소설을 읽느냐고 묻는, 교양서와 자기계발서와 재테크 서적과 건강 서적만 읽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걸 모르고 있다. 독서는 책이 필요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책을 사랑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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