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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사랑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것처럼, 상처에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쿵 저렇쿵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대신 아파줄 수 없다.
상처받은 두 영혼, 후미와 사라사의 이야기에 종종 가슴이 아파서 책을 덮었다 펼쳤다 하면서
읽었지만, 책을 읽고 있지 않은 시간에도 자꾸만 후미가, 사라사가
떠올랐다. 어느 새 나는 주인공들에게 푹 빠져있었다.
자유로운 부모님에게 사랑받으며,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고,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하면서 살던 사라사의 행복은 오래지 않아 끝나버렸다.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다른 남자에게 떠나버리면서 이모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더는 자유롭고 편하게 살 수 없어졌다. 친구들과도 웃으며 떠들고 놀지만, 사실은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뿐 이다. 갈 곳 없고 마음 둘 곳 없는 사라사에게, 로리콘으로
보이는 후미가 다가왔다.
“-우리 집에 올래?”
달고도 차가운 얼음사탕 같은 목소리가, 내 위로 미지근한 빗방울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 15년이 지난 오늘 밤도, 나는 그날과 똑같이 쉽게 녹아들었다.
“갈래.”
(p. 191)
사라사는 후미의 집으로 따라가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후미와 함께라면
안전한 느낌이 들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단단히 경직되어 있고, 늘
피로하고, 잠을 잘 못자던 사라사는 후미의 집에서 만화를 보며 뒹굴고,
같이 늦잠을 자고 피자를 시켜 먹으며 천국같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 집에 올래?”
끔찍이도 힘든 시기에 후미의 그 말이 단비가 되어 나를 몇 번이고 상냥히 어루만져주었다. 나는
지금도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 바싹 말라 굳어버린 천에 물이 스며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내가 나의 모습을 되찾았다.
(p. 197)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후미의 엄마 때문에 항상 단정하고 바른 모습으로만 살 수 밖에 없었던 후미가 사라사와 함께
살면서 그 단단한 둑이 무너지곤 한다. 후미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달콤함이었다. 그러나 후미와 사라사의 관계는 밖에서 보면 너무나 위태로운 유괴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크든 작든 후미나 사라사같은 상처를 품고, 조금의 하자를 품고
사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상처를 감싸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것 아닐까.
어떤 아픔이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내 손에도, 모두의
손에도 하나의 가방이 있다. 아무도 대신 들어줄 수 없다. 평생
자기가 안고 가야 할 가방 안에 후미의 그것이 들어있다. 내 가방에도 들어있다. 내용물은 다 다르지만 버릴 수는 없다.
(p. 236)
사실 사라사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이모의 아들인데, 후미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사라사는 완벽하게 무력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사라사 안에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후미는 그 상처마저 감싸안아준다. 그리고 이해해준다. 후미에게도 후미의 상처가 있고 하자가 있기 때문에.
내 안에는 차갑게
굳어진 부분이 있어서, 진정으로는 아무하고도 이어질 수 없는 인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부서진 부분이 있다고. 그걸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는 한편, 인간의 영역에서 튕겨져 나간 사람이라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순과
고독.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는 건 처음이다.
(p. 203)
반전과 놀라움, 환희와 가슴 시린 슬픔을 한꺼번에 전해주는 선물세트같은
놀라운 소설이다. 흡인력있으면서도 아름답다. 이 책 한 권으로
하루 종일 행복했다.
그 날 다니 씨를
혼란스럽게 만든 연약함이 내게도, 후미에게도, 이 리뷰를
쓴 모든 사람에게도 있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며, 다들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면죄부를 받고 싶다고 바라는 듯하다.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받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p. 353)
대책없이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사라사가 사랑스럽다. 놀라운 이야기를
사라사에게 전하는 약해진 후미가 자꾸 떠오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누구나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두 개의 유리잔을
비교했다. 모양이 비슷했지만 하나는 와인글라스고 하나는 락글라스다. 닮았지만
다르다. 다르지만 닮았다. 죽어가는 노인이 넘겨준 두 개의
아름답고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 마치 우리 같다고 생각했다.
(p. 276)
그들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그리고 그건, 상처를 갖고 있고, 어딘가 이상하고, 어딘가 아픈 우리에게 보내는 가슴 시린 응원이기도 하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