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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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비교적 늦게 읽기 시작한 나는, 박완서 작가의 생전에 읽은 작품이란 게 그의 마지막 에세이집인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뿐이었다. 그 산문집을 인상 깊게 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작가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박완서 작가의 책은 그 이후로도 꾸준히 출판되었고 생전에 썼던 장편소설 및 단편 소설을 포함하여 미발표되었던 소설과 에세이를 출판되는 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꽤나 많이 읽어왔다.
<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은 박완서 작가가 쓴 모든 책의 서문을 모은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장녀가 김윤식 작가의 서문집을 보고 나서 어머니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을 이용하여 기획했다고 한다
.
박완서 작가의 서문집 뿐 아니라 아예 서문집이란 것을 처음 읽어 보지만, 이 짧은 글들만으로도 충분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군데 군데 밑줄을 진하게 긋고 싶은 대목이 나왔다. 그리고 이 책을 덮고 나자,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

한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 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p. 20)


박완서 작가가 40대에 등단하면서 썼던 첫 작품, <나목>부터 내가 읽었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까지, 재판될 때마다 추가된 서문까지 모두 모았다. 때로는 중복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출판된 시기가 달라질 때마다 조금씩 달리지는 작가의 심중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거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집념하고는 달랐다. 꿈하고도 달랐다. 그 시기를 발광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정신의 숨구멍이었고 혼자만 본 자의 의무감이었다.
(p. 47)


박완서 작가가 6.25 경험을 주로 소설에 썼고, 자신의 자전적 소설로 등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서문에서 읽은, 그가 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생각보다 절박했다. 살아남기 위해 글을 썼던 저자는, 소설을 씀으로 인해 자신의 경험을 종내 통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내가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단맛만은 아니다.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
(p. 131)


그래서 노년에 이르러서, 좀 더 가벼워지고, 편안해진 자신의 모습을 소설로, 에세이로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문만을 모아서 읽으니 박완서 작가의 인생과 소설이 큰 숲으로 정리되어 나름의 흐름이 보인다. 결코 담담하다고 할 수 없었던 격동의 세월을 보낸 작가의 정신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니, 박완서 작가의 독자들에게는 크고 의미 있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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