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은 귀신같이 알아봐서 중고책방에도 잘 안 올라오더라~한 커뮤니티에서 이런 평은 그 어떤 평보다도 강렬하게 이끌렸다. 읽고 나면 가지고 싶고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책이라는 평보다 훌륭한 추천사가 어디 있을까?정세랑작가의 책은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데 처음 읽어 보았다. 맛갈 나게 글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만의 드라마가 있고 그 드라마는 다른 사람과 타래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마치 50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다른 소설에 얼굴을 비칠 때 반가웠다.여러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먼저 섭렵한 이후에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성향 때문에 그 유명한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 비해 꽤 늦게 읽은 셈이다. 누군가에게는 소설이 먼저고 그 다음이 영화였겠지만 나한테는 재미있게 본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의 작가라는 식으로 접하게 되었으니 그 유명세에 비하면 정보도 많이 부족했던 편이다.바로 직전에 읽었던 소설이 코니 윌리스의 소설이었기 때문인지 소설의 전개 방식이나 서술 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다. 코니 윌리스가 수다와 잡담이 어지럽게 이어지는 화법을 가지고 있다면 테드 창은 보다 진중한 방식으로 보다 전통적인 방식의 화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매우 지적이다. 소설을 읽다 이해가 안되는 일도 오랜만에 다시 겪었다. ‘이해’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 ‘일흔두 글자’에서 두 방법이 결합하는 원리도 잘 모르겠다. SF가 지성을 자극하는 장르라는 것을 오랜만에 경험했달까?그에 비해 ‘컨택트’의 원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 ‘영으로 나누면’은 지성과 감성을 혼용하여 상대적으로 술술 읽었다.‘바빌론의 탑’과 ‘지혹은 신의 부재’는 종교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력이 돋보인다.‘인류 과학의 진화’와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다큐멘터리’는 과학적 진보와 인간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모든 이야기에는 빌런과 안티히어로가 있기 마련이지만 테드창의 소설에서는 상반된 입장의 대변자들 사이의 갈등이 이야기의 중요한 얼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매우 차분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논쟁적으로 느껴진다.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좋은 느낌을 받았던 것은 내가 이 책을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읽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고풍스러운 감각이 되살아나 책을 잡고 있는 것자체가 즐거웠다.
한국에서 꽤 인기가 있다는 코니 윌리스의 가장 유명한 단편과 중편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자 내가 읽은 두 번째 작품집이다. 그리고 코니 윌리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언제나 그렇듯 산만하고 정신없고 수다스럽다. 화자의 나레이션은 종종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점프하기 마련인데 잠깐 넋을 놓고 책을 읽다보면 어?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지? 하고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까? 그러니까 친구 대여섯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음료수를 시키다가 이야기를 놓친 경험을 하게 된다.화자의 머리 속의 상념과 현재의 사건이 줄거리를 타고 흐르는 두 축이다 보니 이야기는 종종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큰 <화재감시원>이나 하드보일드 추적극인 <내부소행>은 물론, 한 소녀의 귀가길을 따라가는 <클리어리 가족에게 온 편지>나 로맨틱 소동극인 <리알토에서>에서도 어질어질함이 느껴지니 대놓고 환상 드라마를 표방하는 <나일강의 죽음>은 더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그렇다고 이 책의 설정이나 상황이 엄청나게 비현실적이라거나 기발함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아 물론 역사학자가 직접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가서 필드워크를 한다는 <화재감시원>의 설정은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러나 몽환적이고 복잡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코니 윌리스의 화법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거 같다. 상념과 사건이 경계 없이 넘나드는 화법 말이다. 이런 특징을 누군가는 ‘수다’라고 한 단어로 요약하기도 하는데 적절한 거 같다
<시녀이야기>는 절망의 기록이다. 희망을 갖는 것 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 주는 좌절과 공포 무기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가엣 애트우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34년 만에 발표된 <증언들>은 이 엄혹한 현실에 저항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 명의 저항자와 조력자 여럿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싸움의 판도를 좌지우지 하는 게임체인저는 리디아 아주머니이다.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조절하면서 서서히 체제를 무너뜨리는 내부의 저항가는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 가능성은 몇 퍼센트나 될까? 리디아 아주머니가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많은 일들이 실제로 그렇게 되어서 다행이기는 한데 너무 착착 들어맞으니까 어색하고 몰입이 깨지는 단점이 있었다. 아마도 애트우트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떠한 어둠도 결국은 빛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공포는 당연하고 평범한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된 원리주의 종교로 인해 권력이 강화되고 인간성이 말살되고 그로인해 자행되는 무자비함이 가져다 주는 공포가 너무 생생하고 치가 떨렸다. 우리는 히틀러가 유대인에게, is가 여성들에게 했던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이 절대 불가능한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인간들 분류하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강자들. 약자를 통제하기 위해 그들의 자존감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공포와 강압들. 그 속에서 한 멀쩡한 인간이 어떻게 피지배자가 되는지가 그려지는데 그게 불가능한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이 가진 힘일텐데... 이것이 허구이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 시스템에, 이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그 위선적인 권력자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참아내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