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이 조용했을 때 국경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점심으로 우동을 먹으러 도쿄에 다녀오고, 공연을 보러 대륙을 건너가고. 그런 일도 꽤 있었다. 기본적으로 국경을 넘는 행동은 낯설음을 일부러 취하는 행동이다. 이국적인 풍광, 불가해한 타국의 문자, 달라지는 화폐의 단위같은 낯선 체계로 순식간에 돌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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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시선, 특히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이 지겨울 때가 있었다. 그런 눈빛을 일부러 훌쩍 떠나오면 낯선 곳에서 상대의 눈썹마저 고심해 의도를 헤아리게 된다. 그런 수고로움조차 휴식일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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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어떤 상황을 글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남기곤 하는데 대부분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만 함께 오지 못한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동행하지 못한 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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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길정현 작가는 국경을 자주 넘고 (직업- 국내 제 1의 항공사에서 10년 근속했다-의 이점의 살려) 비교적 수월하게 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만의 지혜가 담긴 동선으로 세상을 다녔다. 1)물 건너 온 것들과 2)건너가서 본 물들을 느끼하지 않게 소개하고 지치지 않을 정도의 정보들을 산뜻하게 제공하는 그의 글과 사진을 나는 퍽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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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정현 작가의 전작 『이탈리아 고작 5일』, 『그리하여 세상의 끝 포르투갈』, 『프로방스 미술 산책』 은 작가가 국경을 넘어 찾아간 곳에서 경험한 여행과 탐방과 순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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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간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에서는 작가가 작가의 집 티테이블로 소환한 지난 여행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현지에서 공수한 장비, 재료에 자신의 기억을 함께 넣어 직접 29개의 디저트를 준비하고 그 시간을 함께 사는 고양이 ‘감자’와 함께 나눈다. 나는 오후의 티테이블에서 주인이 들려주는 낯선 곳의 정서와 그 지역의 디저트의 유래, 레시피까지 접할 수 있는 감자가 참으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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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게시물 하나조차 차분히 바라볼 틈 없이 지냈다. 그나마 잠깐 주었던 시선도 이내 새 게시물들에 밀려 사라지거나 누군가의 좋아요 알림에 떠밀려 사라지고 마는 빠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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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물이 끓는 걸 기다리는 그 1분 동안 봤던 사진. 비오는 오후, 하교하는 아이를 위해 교문 앞에서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며 봤던 사진. 환승하러 멈춰 선 플랫폼에서 도착알림 앱과 번갈아가며 봤던 사진. 끼니 때를 놓쳐 드라이브스루에서 빅맥세트를 기다리며 운전석 창문 열고 바람 맞으며 봤던 사진. 상사에게 깨지고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계단 난간을 붙잡고 봤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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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길정현 작가의 일상에 틈틈이 보냈던 눈길이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의 형태로 묶여 있다. 책을 읽으며 눈에 익은 사진과 글을 볼 때마다 그때의 내 일상이 퍼즐처럼 조합되는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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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은 두께 17mm, 너비 128mm, 길이 170mm 의 컴팩트한 판본이다. 이 물리계 안에서 가장 먼 거리가 침대에서 책상까지라면 같은 논리로 가장 무거운 건 가방 속에 들어있는 모든 물품이리라. 이 책은 물리적으로 무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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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 공저자가 고양이다
- 그 고양이의 이름은 ‘감자’다
- 감자와 함께 하는 여행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 전염병 창궐로 감자와 함께만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 작가는 지난 여행의 추억을 티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 현지에서 공수한 재료와 장비를 바탕으로 저자가 직접 국가별 디저트를 티테이블 위에 재현한다
- 지역별 문화사적 정보와 여행의 소회, 디저트의 유래와 레시피를 함께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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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창궐로 일상의 기준이 다시 세워지는 시기를 맞고 있다. 어정쩡하고 막연히 답답한 기분을 없애기 위해서 넘을 수 있는 국경조차 없다. 여행이 비일상이었던 건 일상이 있어서였는데, 집에서 일과 휴식을 겸하다 보니 슈뢰딩거의 휴식처럼 ‘이것은 휴식하는 것도 휴식이 아닌 것도 아니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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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덕분에 조금 숨통 트이는 주말을 보냈다. 나의 경우에는 티테이블에 9살 아이를 앉혀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