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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평점 :
내가 소설에 빠졌던 여러 계기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폴 오스터였다. <달의 궁전>, <빵굽는 타자기> 등을 읽으면서 말 그대로 그 세계에 완전히 빠졌던 기억이 있음. 이 이야기들의 줄거리 같은건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폴 오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실로 오랜만에 폴 오스터의 세계로 가는 문을 다시 열고 또 다시 완전히 빠져 며칠을 보냈다.
작가의 자의식이 너무 과잉일 때 마치 ADHD를 간접 체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요즘 이런 책이 은근히 많음)
너무 서사와 사건 위주로만 흐를 때는 글로 옮긴 웹툰을 보는 듯한 상태가 되는데
폴 오스터는 이 사이의 균형을 신들린 무당이 작두를 타는 솜씨로 잡는다. 물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다는 것임.
특히나 <뉴욕3부작>을 그래픽 노블로 만든 이 책은 진짜 명작이라고 생각이 듬. 세편의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구성했는데 이 셋의 조합이 진짜 찰떡같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추리와는 1도 관계가 없다. 실종된 누군가를 찾거나, 의뢰인의 지시에 따라 누군가를 감시하는 일을 하다가 끝내는 나의 정체성을 잊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일에 몰입하다가 실종자나 감시자와 나 자신을 동일시여기는, 그런 류의 혼동은 아니다.
뉴욕으로 대표되는 대도시, 꼭 뉴욕이 아니더라도 대도시에서 이 길이 저 길 같고 이 건물이 저 건물 같고 내가 없어도 이 도시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몰개성성과 몰인간성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혼동이 뭔지 공감할 수 있을 터.
이것은 절대 저것이 될 수 없다. 머리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사과는 오렌지가 아니고 복숭아는 자두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서 같은 맛이 느껴진다면?
사과든 오렌지든 복숭아든 자두든 더이상 먹을 마음이 나지 않겠지..
지금의 나는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그 자리의 나인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자리가 바뀌었을 때, 내가 익숙한 것들과 멀어졌을때 나는 과연 누가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