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 스물아홉 개의 디저트로 기억하는 스물아홉 번의 여행
길정현 지음 / 빈티지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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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조용했을 때 국경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점심으로 우동을 먹으러 도쿄에 다녀오고, 공연을 보러 대륙을 건너가고. 그런 일도 꽤 있었다. 기본적으로 국경을 넘는 행동은 낯설음을 일부러 취하는 행동이다. 이국적인 풍광, 불가해한 타국의 문자, 달라지는 화폐의 단위같은 낯선 체계로 순식간에 돌입하는 것이다.

일상의 시선, 특히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이 지겨울 때가 있었다. 그런 눈빛을 일부러 훌쩍 떠나오면 낯선 곳에서 상대의 눈썹마저 고심해 의도를 헤아리게 된다. 그런 수고로움조차 휴식일 때가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어떤 상황을 글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남기곤 하는데 대부분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만 함께 오지 못한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동행하지 못한 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일 수도 있다.

평소 길정현 작가는 국경을 자주 넘고 (직업- 국내 제 1의 항공사에서 10년 근속했다-의 이점의 살려) 비교적 수월하게 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만의 지혜가 담긴 동선으로 세상을 다녔다. 1)물 건너 온 것들과 2)건너가서 본 물들을 느끼하지 않게 소개하고 지치지 않을 정도의 정보들을 산뜻하게 제공하는 그의 글과 사진을 나는 퍽 좋아했다.

길정현 작가의 전작 『이탈리아 고작 5일』, 『그리하여 세상의 끝 포르투갈』, 『프로방스 미술 산책』 은 작가가 국경을 넘어 찾아간 곳에서 경험한 여행과 탐방과 순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번 신간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에서는 작가가 작가의 집 티테이블로 소환한 지난 여행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현지에서 공수한 장비, 재료에 자신의 기억을 함께 넣어 직접 29개의 디저트를 준비하고 그 시간을 함께 사는 고양이 ‘감자’와 함께 나눈다. 나는 오후의 티테이블에서 주인이 들려주는 낯선 곳의 정서와 그 지역의 디저트의 유래, 레시피까지 접할 수 있는 감자가 참으로 부러웠다.

그동안 게시물 하나조차 차분히 바라볼 틈 없이 지냈다. 그나마 잠깐 주었던 시선도 이내 새 게시물들에 밀려 사라지거나 누군가의 좋아요 알림에 떠밀려 사라지고 마는 빠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찻물이 끓는 걸 기다리는 그 1분 동안 봤던 사진. 비오는 오후, 하교하는 아이를 위해 교문 앞에서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며 봤던 사진. 환승하러 멈춰 선 플랫폼에서 도착알림 앱과 번갈아가며 봤던 사진. 끼니 때를 놓쳐 드라이브스루에서 빅맥세트를 기다리며 운전석 창문 열고 바람 맞으며 봤던 사진. 상사에게 깨지고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계단 난간을 붙잡고 봤던 사진.

그동안 내가 길정현 작가의 일상에 틈틈이 보냈던 눈길이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의 형태로 묶여 있다. 책을 읽으며 눈에 익은 사진과 글을 볼 때마다 그때의 내 일상이 퍼즐처럼 조합되는 경험을 했다.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은 두께 17mm, 너비 128mm, 길이 170mm 의 컴팩트한 판본이다. 이 물리계 안에서 가장 먼 거리가 침대에서 책상까지라면 같은 논리로 가장 무거운 건 가방 속에 들어있는 모든 물품이리라. 이 책은 물리적으로 무겁지 않다.

• 요약

- 공저자가 고양이다

- 그 고양이의 이름은 ‘감자’다

- 감자와 함께 하는 여행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 전염병 창궐로 감자와 함께만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 작가는 지난 여행의 추억을 티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 현지에서 공수한 재료와 장비를 바탕으로 저자가 직접 국가별 디저트를 티테이블 위에 재현한다

- 지역별 문화사적 정보와 여행의 소회, 디저트의 유래와 레시피를 함께 제공한다

전염병의 창궐로 일상의 기준이 다시 세워지는 시기를 맞고 있다. 어정쩡하고 막연히 답답한 기분을 없애기 위해서 넘을 수 있는 국경조차 없다. 여행이 비일상이었던 건 일상이 있어서였는데, 집에서 일과 휴식을 겸하다 보니 슈뢰딩거의 휴식처럼 ‘이것은 휴식하는 것도 휴식이 아닌 것도 아니여’가 되어버렸다.

『고양이와 함께 티테이블 위 세계정복』 덕분에 조금 숨통 트이는 주말을 보냈다. 나의 경우에는 티테이블에 9살 아이를 앉혀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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