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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ㅣ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21세기북스 출판사의 서가명강 시리즈는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명강의를 일반인에게 제공하고자 기획된 대중 교양 강연 프로그램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은 메이지 유신의 토대를 닦고 이를 설계하고 실행한 4명의 '책 읽는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은 G7에 들어가는 자타 공인 선진국이다. 그러한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무시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일 것이다. 그 감정에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했다는 치욕이 분명 한 켠에 있을 것이다. 역사의 기억은 오래도록 전승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요즘도 학생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일본이 세 손가락 안에 있지 않을까? 일본에 '정신 승리'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에게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은 더더욱 필요하다.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에서 저자는 근대 일본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메이지 유신(1868)이고,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메이지 유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프랑스대혁명에서 찾는다. 미국인들은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물을 때 독립혁명의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일본인들은 근현대 일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메이지유신을 불러낸다. 그 방식은 당연히 일정하지 않다. … 메이지유신은 지금도 일본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사 기억투쟁의 주전장 중 하나다." (286쪽 인용)
요시다 쇼인은 아베 신조 전(前)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자주 언급했던 이다.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라고 불리는 쇼인을 좋아할 수는 없겠으나 그의 행적은 실로 놀라운 면이 많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해군과 전혀 무관한 '사무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해군 양성을 역설했다. 서구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열망에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함대를 무작정 찾아가 미국 도항을 시도한 일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카모토 료마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료마도 쇼인처럼 직접 페리 함대를 목격했다. 그래서였을까?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며 존왕양이를 부르짖을 때, 그는 일본 해군 탄생의 아버지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에게 감복해 해군 건설에 앞장서며 양이론과 결별한다. 이후 그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삿초 동맹을 이끌어냈고, 이는 이후 대정봉환이라는 중대한 사건의 열쇠가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탐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주인공이다. '유신삼걸' 중 하나로 오쿠보 도시미치와 한동네 죽마고우였으나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그가 흠모했던 주군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서양 문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용광로를 만들고 증기선을 제작했다. 원정군 지휘관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군 사령관 가쓰 가이슈의 극적인 합의는 에도성에 무혈입성하는 믿기 힘든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사이고는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정한론을 실제 정책으로 추진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에 비견되는 일본의 철혈 재상이다. 대중적 인기는 별로 없으나 메이지 신정부의 굵직한 개혁은 대부분 이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돌아본 그는 일본을 '유럽적인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일본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개혁을 이끌어갔다. 불행히도 사무라이들의 습격으로 출근길에 암살당하지만 그의 노선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계승된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도한 존왕양이 열풍은 우리 역사로 치면 양반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이다. 존왕양이에서 출발한 그것이 어떻게 서양 문명을 적극 수용하는 메이지 유신을 가져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랜 동안 쇼군의 지배를 받던 일본에서 존재감도 없던 '천황'이 왜 갑자기 정치적 모토의 중심이 되었는지도 수수께끼다.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개혁이 '유신'이라는 이름 하에 꾸준하게 계속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박훈 교수는 막부 말기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당시 일본의 정치 엘리트들이 아무리 권력 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와 결탁하거나 외세가 내정에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엘리트들은 어떠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일본과 무역 분쟁이 발생하고 반도체 소재의 수입이 막혔을 때 우리의 정치권과 주류 언론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던가. 자칭 보수(保守)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더욱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