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 - 친일파 김백일부터 광복군까지
김종훈 지음 / 이케이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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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에 이렇게 많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하 친일파)가 묻혀 있을 줄이야 누가 제대로 알았으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이 불철저했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 사실상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못해 좌절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옳을 것 같다 - 그것의 명확한 현주소를 우리는 이 책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를 통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책은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4.19국립묘지, 효창공원에 안치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20년 올해 광복회장 김원웅의 8.15 광복절 기념사로 촉발된 논란은 대한민국 친일파 청산의 현실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이정표였다. 광복회장의 발언 중 현충원과 관련된 부분은 국립묘지에서 친일파의 묘를 이장할 것인지, 만약 이장을 안할 경우에는 묘지에 친일행적비를 세우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담은 국립묘지법 개정 찬반을 물었더니 지난 총선에서 당선된 지역구 국회의원 253명의 2/3가 넘는 인원이 찬성했고, 여기에는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미래통합당도 과반수 넘게 찬성했으니 올해 법개정을 기대해 본다는 것이었다.


책을 통해 확인한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의 면면은 놀라웠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등재된 '국가 공인 친일파'가 너무도 많았다. 특히 만주의 항일무장부대 토벌에 앞장섰던 간도특설대 출신의 인물들(김백일, 송석하 등)과, 일본 육사 졸업 후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던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인물들(이응준, 신태영 등)이 국립현충원에 독립지사들과 함께 묻혀 있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실이다. 그것도 친일파의 묘가 독립운동가의 묘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거나 불과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위치라니!!!


흔히 회자되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공연히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안동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 씨의 말은 너무 서글프고 가슴 아팠다.

"이상룡 지사의 후손인 이항증 선생은 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랬듯 그 역시도 어린 시절 고아원에 갈 정도로 어려웠다. 언젠가 '인터뷰를 하지 않은 이유'를 밝힌 적이 있는데, 그는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할까 싶냐"면서 "잘사는 애국지사 후손들이 (언론에) 나와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니까 국가가 보호해주는구나' 하고 애국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107쪽 인용)



석주 이상룡 선생이 누구던가?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군인 서로군정서의 독판(총재에 해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신 분이다. 서울시가 201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은 1만7천여 명인데 이 중 74.2%가 월 소득 2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아래 동아일보 보도 참고) 사람들이 하는 그 말이 사실임을 통계로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예관 신규식 선생은 을사늑약에 저항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가 한쪽 눈을 실명했다.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해 쑨원의 신해혁명에도 참가해 중국 정부의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상하이에 망명한 독립지사들이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분이었다.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낸 선생의 묘는 친일파 이응준과 신태영의 묘가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이들 '국가 공인 친일파'들과 달리 일본 육사를 나왔지만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 서로군정서 사령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총사령을 역임한 지청천 장군도 친일파 이응준의 발 아래 잠들었다.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있는 백홍석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우러러 하늘에, 구불어 땅에,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한 점 부끄럼이 없다.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 것도 아닌데,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25년간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제대 후 병력동원 업무를 맡은 인물인데도 이런 비문을 쓰다니 참으로 후안무치하다. '비공인 친일파' 김창룡은 어떠한가. 그는 일본 관동군 헌병 분대장 출신으로 만주에서 50여 건이 넘게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그러한 경력이 이승만 정권의 방첩대 대장으로 활약하는 토대가 되었다.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 인물로 안두희를 비호하기도 했던 그 역시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인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도 올해 7월 이 곳에 묻혔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의 무덤도 여기다.


서울현충원의 충열대 '민족의 얼' 글씨는 만주군 출신의 박정희가 썼고, 대전현충원의 현판은 독재자 전두환이 썼으며, 4.19 국립묘지에 있는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의 설계와 조각은 친일파 김경승이 맡았다고 한다. 수유리 묘역에 안장된 성균관대 설립자이자 초대총장 김창숙 선생은 빛나는 항일 투쟁도 존경스러웠지만 광복 이후의 삶 또한 멋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반독재투쟁도 그랬고, 병문안 온 박정희를 외면하고 벽을 향해 돌아누운 것도 그랬다.


효창원(=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가 안장되어 있다. 이곳의 사연은 실로 기막힐 정도다. 이승만은 백범 사후 경찰을 배치해 참배 행렬을 강제로 막았고, 심지어 묘소의 이장까지 계획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묘역 앞에 드러누워 막아냈으나 이승만 정권은 운동장 공사를 강행했고, 박정희 정권은 골프장 공사까지 시도했었다. 효창원은 구청이 관리하는 근린공원시설로 분류되어 현충원 같은 국가적 관리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올해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코로나19 사태만 아니라면 대규모 행사들이 진행되었을 것인데 참으로 애석하다. 그렇기에 이 책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의 독서가 더욱 의미가 있었고, 책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 알게 된 것도 많았다. 역사의 무게와 의미, 그리고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삶과 투쟁에 대해 되새겨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저자 김종훈 님의 전작인 <임정로드 4000km>와 <약산로드 7000km>도 이참에 한번 찾아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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