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누구나 교양 시리즈 6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유혜경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이화북스의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시리즈는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서 몇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큰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자 페르난도 사바테르가 이미 해당 시리즈의 윤리 편과 정치 편을 저술했고, 이번 철학 편이 세번째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과 또래 청소년들을 위해 처음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책이라면 제목에서 풍기는 가벼움과는 달리 상당한 진정성과 무게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책 읽기를 마친 소감부터 먼저 얘기하자면 서양 철학의 오랜 지적 여행을 이렇게 쉽게 풀이한 책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책 제목만큼은 '명실상부'라는 것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믿는데 이 책은 그 기대를 잘 충족시켜 준다. 누구나 손을 내젓는 어려운 철학을 이리 재미있고 요령있게 소개했다면 저자 사바테르가 쓴 윤리 편과 정치 편의 다른 책들도 충분히 믿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데 무슨 신분증이나 졸업장이 필요한 건 아냐. …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세상에 대해 고찰했어. 그 사람들의 삶과 세상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많은 것들이 변했어. … 과학은 사물의 기능을 설명해 주긴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말해 주진 않아. (299~301쪽에서 발췌)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는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하여 중세 기독교 시대의 철학, 그리고 르네상스와 근대의 철학을 거쳐 20세기 한나 아렌트와 마리아 삼브라노의 철학까지 다루고 있다. 철학자들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지어 설명함으로써 철학자들이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유를 펼쳐 나갔음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부드럽게 읽히는 텍스트와 마치 소설을 보듯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는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쾌락주의'로만 알고 있던 에피쿠로스 철학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진실하고도 매력적인 철학이었다. 진정한 현자에겐 증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내 젊은 날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여겼던 사르트르는 다시 봐도 존경스러웠고,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러셀의 삶은 지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범적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고향 땅을 벗어난 적이 없던 칸트가 '철학계의 뉴턴'으로,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성과 사유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 날개를 편다"는 헤겔의 말은 철학은 역사를 되돌아보며 정신과 이념을 파악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부엉이는 마르크스에 의해 일찍 날개짓을 하며 새벽을 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흥미로운 토막지식들이 있다. 플라톤의 원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지만 몸이 크고 어깨가 넓어 편평하다는 뜻의 플라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flat 이라는 영어를 생각하면 된다. 경험론의 대가 베이컨은 영국의 대법관을 지냈는데 뇌물수수죄로 쫓겨나 감옥에 갇힌 적이 있고, 평소 관찰과 증명을 강조한대로 죽은 닭이 부패하지 않고 얼마나 견디는지 알아보다가 감기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를 읽으며 궁금해진 책과 영화도 생겼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의 지혜>와 <자서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영화화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장미의 이름>이다. 특히 러셀의 <서양의 지혜>는 지은이가 철학을 공부하며 살게 되는데 가장 큰 영감을 준 책이었다. 그것도 어린이를 위한 그림이 많은 철학책이라니 자못 기대가 크다.



책은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우리들의 철학 논쟁'이라는 코너를 두고 있다. 알바와 네모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것은 해당 챕터의 핵심 테마를 다시 한번 짚으며 이를 곱씹는 기회를 제공한다. 친한 친구들끼리의 일상적 대화이듯 편안하게 읽히는 텍스트지만,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으며 본문보다 더 인상 깊은 구절도 종종 등장한다. 철학적 사유와 논쟁의 본질을 재미있는 대화로 엮어 정리한 이 책의 소중한 매력이다.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철학서가 있었을까! 딱딱하고 건조한 철학적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어깨에 힘을 빼고 일상의 언어에 비유와 유머를 적절히 섞어 쓴 글은 페르난도 사바테르가 어떻게 밀리언셀러의 저자가 되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뛰어나고 친근한 철학 교양서의 탄생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p.s 102쪽 세번째 문단 세째 줄에 '파르테논'이 나오는데, 이는 아무래도 '판테온'의 오기인 듯하다(로마의 만신전 이야기이므로). 이것이 원작의 오류인지 번역의 실수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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