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후의 지성 면우 곽종석
조홍근 지음 / 아우룸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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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곽종석 선생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건 중학생 때 읽은 한권의 책에서였다. 그때는 영남을 대표하는 거유라고만 알았을 뿐이었다. 좀더 커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다시 선생의 이름을 만나게 되었으니,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유림의 뜻을 모아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 장서>에서였다. 면우는 한국 유림의 대표이자 이 장문의 독립청원서의 대표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성장이나 학문 세계, 사회적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책 <조선 최후의 지성 면우 곽종석>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가웠고, 평소 가졌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외숙으로부터 면우 곽종석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인물에 매료되어 꿈속에서조차 선생의 발자취를 좇아 수년간 매진했다는 저자의 사연은 기대를 더욱 부풀게 했다.


면우의 집은 조부 창계공과 부친 도암공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빈한했다. 남의 전답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산에서 땔나무를 구해야 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삶이었다. 헌종 12년(1846) 태어난 면우 선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의 삶의 일단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한번 보면 잊지 않는 뛰어난 머리로 10년 전에 보았던 친구의 병서를 기억만으로 복원해냈다는 면우. 그런 선생도 과거에 두 차례나 낙방했다.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회시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과거 제도의 난맥상 때문이겠으나 이후 선생은 등과의 길을 접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한다.



주희와 이황의 글을 길잡이 삼아 용맹정진한 면우는 <사단십정경위도>, <심동정도>, <이결> 등을 지어 학문적 명성을 얻는다. 1871년 25세에 한주 이진상을 스승으로 만나게 된 것은 용이 여의주를 얻은 격이었다. 그는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주리설과 심즉리설을 더욱 확고히 함으로써 한국유학사를 종합 결산한 인물로 평가된다.


1903년 두 차례에 걸쳐 고종 황제와 독대하기도 했던 면우 곽종석은 동시대의 다른 유림과는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모습을 보인다. 먼저 당색과 학파, 지역과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학문적 개방성을 갖고 있었다. 둘째 '서양=이적'이라는 전통의 존화양이론을 부정하고 서양의 우수한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 독일의 법학자가 쓴 <공법회통>을 완독하기도 했던 선생은 만국공법에 의거한 외교적 자구책이 유효하다고 보았다.


권세연, 유인석, 최익현 등 여러 의병장들의 제의가 있었음에도 면우가 을미의병과 을사·병오의병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다. 대신에 선생은 외국공관에 글을 보내 일본을 규탄하며 만국공법에 호소하였고, 을사오적 처단의 상소를 올리고 서울로 상경하기도 했다.


선생이 의병과 같은 직접적인 항일무력투쟁에 참가하지 않았다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기대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았을지언정, 뒷짐지고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방향과 형태의 저항을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반민족의 길을 걷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조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는 다수의 한시와 한적이 인용되어 있다. 고어(古語)투의 문장은 옛 문화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지나친 한자어의 사용은 글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데, 어떤 독자층을 상정하고 책을 꾸민 것인지 의문이다. 구주했다(말로 아뢰었다), 췌언(군더더기 말) 등도 그렇지만 오랜 친구를 '지구'로, 며느리를 '식부'로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만연체 문장도 그렇다. 한 문장이 4~5줄은 기본이요, 6~7줄도 흔하게 등장한다.


책의 전반부는 곽종석 선생의 가문과 조부,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무려 134쪽까지인데(책은 총 503쪽이다) 이중 선생의 이야기는 얼마 되지 않는 느낌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나오는 전적과 인물에 대한 보충 설명은 호학(好學)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울 것이지만, 책 읽기의 흐름을 거스를 정도여서는 곤란하다. 때때로 오늘날의 세태를 비판하는 언급은 너무 장황해서 위인전이 아니라 시사칼럼을 보는 듯했다.


면우가 스승으로 모셨던 한주 이진상은 28살의 차이가 났음에도 스승과 제자의 수직적 서열을 거부하고 교학상장의 동료로서 면우를 대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 오갔던 스물 한통의 서신과 열띤 학문적 토론은 퇴계와 고봉의 사칠 논쟁을 보는 듯하다. 1919년 74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는 당일까지 면우는 문생들의 질의에 성실히 답변했고,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채 운명하셨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2013년 사월마을에 <파리 장서>에 서명한 137인의 선비들을 기념하기 위한 유림독립기념관이 세워졌다고 한다. 찾아보니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 있다. 기념관 바로 옆에는 선생의 유허비와 사당이 있는 이동서당 유적도 있다고 한다. 남사예담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지정되었다고도 하니 면우 선생의 자취도 찾을 겸해서 한번 방문해 봐야겠다.


<파리 장서>로 투옥 중 선생이 쓴 한 편의 시로 글맺음을 대신한다. 일본의 엉뚱한 딴지로 무역 분쟁이 일고 있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글이 아닌가 한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


수백 년 힘으로 복종 정벌 번갈아 하고

어지러이 빼앗고도 그릇된 줄 모르네.

평화 두 글자 하늘에서 온 울림인데

괴이하구나! 동쪽 이웃 귀 가리고 훌쩍대기만 하네. 

(면우집 연보 권3, 본책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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