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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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변산마실길 등의 여러 길을 제안했고 <다시 쓰는 택리지>로 유명한 신정일 저자의 책을 만났다. 책 표지 왼쪽의 '우리땅 우리강산' 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갑오년의 역사 속 현장으로 들어가본다.


책을 읽으면 동학농민혁명의 발화와 봉기, 승리와 패배의 과정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늘 시간적 순서에 맞는 건 아니지만, 저자가 농민군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대체로 들어맞는 느낌이다.


답사기의 매력은 촛점으로 삼는 주제 외에도 그 땅과 얽힌, 시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사연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저자의 입담도 구수하고 해박하다. 다만 보다 더 풍부한 사진 자료와 지도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싶은 순간에 해당의 사진과 지도가 없을 때는 너무 아쉬웠다.


공주 우금치의 동학혁명 위령탑은 박정희가, 정읍 고부의 황토현 기념관은 전두환이 세웠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은 모두 짓이겨져 있으니, 역사의 승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전두환의 조부가 고부 사람으로 동학당이 되어 전봉준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는 귀가 솔깃했다. 광복군 출신의 천도교 교령으로 6.25 때 사단장을 역임하고 외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최덕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서정주의 외조부와 김지하의 조부가 모두 동학당이었다는 것도 놀랍고, 동양 최대의 미륵불이 있다는 금산사 미륵전을 보러 오는 사람은 불교도보다 증산교 신자들이 더 많다는 것도 흥미롭다. 하지만 전라도 53개 주군에서 유일하게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나주를 찾아, 무기 하나 없이 적진 속에 들어가 나주목사와 담판을 벌였던 전봉준의 담대함이야말로 가장 감탄스런 일이었다.


호남과 호서의 남북접 양군이 논산에서 만나 본진을 설치했던 곳이자, 손병희와 전봉준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소토산. 이를 찾기 위해 논산 바닥을 헤매고 다녔던 <녹두장군>의 저자 송기숙 선생의 일화는 그 고충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가는 혁명과 역사의 현장들이 몹시도 아쉬울 따름이다.


역사가 얼마나 우연과 필연 속에 자리하는가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은 1898년 4월에 붙잡혀 고등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6월 교수형에 처해진다. 당시 판사로 해월에게 사형을 내린 이는 조병갑이다. 조병갑이 누구던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 민란을 유발시켰던 고부군수 조병갑, 바로 그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까막눈이었던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의 죽음 앞에서 맹세한다. "사람이 바로 한울인 고로 사람은 평등하고 차별이 없다. 사람이 인위에 의해 귀천으로 나누어진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고 선사의 뜻에 부응함을 주로 하기 바란다." (253쪽)


사람이 곧 한울인데 이 세상에 귀천이 어디 따로 있는가 라고 가르친 최제우는 두 여종을 딸과 며느리로 삼았다. 그의 뒤를 이은 최시형은 베를 짜고 있는 다른 이의 며느리를 보고는 "이제부터 누가 묻거든 우리 며느리가 베를 짠다고 하지 말고, 일하는 우리 한울님께서 베를 짠다고 하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농민혁명을 가능케 했던 동학 사상을 다시 돌아보고 살펴야 할 이유다.


"사람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고, 세상의 모든 것을 섬기는, 섬김과 모심을 통해서만 세상은 밝고 건강하게 존재할 것" (251쪽) 이라는 저자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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