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정치사상가 중 하나로 꼽힌다는 한나 아렌트, 그녀의 삶과 사상이 궁금했다. 마침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씌어져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을 보게 되었다.
* 그래픽노블 :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취하는 작품이다. 일반 만화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며 스토리에 완결성을 가진 단행본 형식으로 발간되는 것이 특징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민한 철학적 감수성은 어려서부터 차별을 당했던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주변으로부터 받아야했던 손가락질, 부친이 매독에 걸렸다는 이유로 잠재적 환자 취급을 당해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았던 일 등등.
교사들을 규탄하는 파업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진학해 그녀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를 만나게 된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둘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을 때에도 아렌트는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와 사랑을 나누곤 했다.
언론인이자 철학자였던 귄터 슈테른과 결혼한 아렌트는 로마니셰스 카페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넓혀나갔다. 반면 독일은 점점 더 나찌즘의 광풍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첫번째 탈출
독일 언론에 실린 반유대적 기사와 선전물을 모으는 자료수집 활동이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아렌트는 체코의 프라하로 탈출한다. 이어 프랑스의 파리로 간 그녀는 첫번째 남편과 이혼 후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파리에서 철학적 탐구를 계속하면서도 그녀는 유대인 아이들을 유럽 밖으로 피신시키는 단체의 활동가로도 일했다.
두번째 탈출
독일과 대립이 격화되던 1940년 프랑스는 독일 여자들을 벨디브 경기장으로 소집시켰고, 다시 귀르의 포로수용소로 옮겼다. 나치의 돌격대가 파리를 통과하며 만들어진 귀르의 혼란을 틈타 아렌트는 수용소를 탈출했다. 모뷔송에서 남편 블뤼허를 우연히 만난 아렌트는 마르세유 교외의 은신처로 합류했다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리스본으로 이동, 배를 타고 뉴욕으로 떠난다.
세번째 탈출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으로 큰 주목을 받은 그녀는 미국 시민권까지 얻게 되었고, 프린스턴 대학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되었다. 1958년에는 생애 최고의 야심작 <인간의 조건>을 발표했다. 탄생성과 복수성의 개념을 통해 새로운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그녀는 사상적으로도 하이데거와 완전히 결별한다. 자신 없지만 아마도 이것이 세번째 탈출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악을 저질렀던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네 같은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것.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주어진 명령과 지시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놀랍고도 끔찍한 통찰!
사실 예루살렘에만 아이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의 첨단에서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던 친일민족반역자는 누구였던가. 제주 4.3 사건 당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던 집단 학살, 10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6.25 전쟁의 민간인 학살 문제, 5.18 민주화 운동 때 광주 시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계엄군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문제일 터이다.
오늘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5주년을 맞아 어느 정당의 차모, 정모 씨 등이 징하게 해 처먹는다느니, 그만 좀 우려먹어라 하는 막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걸 보면서 과연 저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알쓸신잡3 프라이부르크 편에서 나왔던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것이 바로 악(惡)이다" 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기준으로 한다면, 저들의 이 무지막지한 발언을 무어라 평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