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품은 맛있다
강지영 지음 / 네오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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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강지영의 소설이 재밌단 소문을 듣고 읽게 됐다. 담담한 문체가 첫눈에도 마음에 들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드러나는 이야기의 흡입력 또한 대단했다. 소문에 솔깃하여 책을 선택했어도 크게 기대는 안 했다가 뜻밖에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책을 읽다 멈춘 동안에는 뒷이야기가 궁금해 머릿속이 온통 이 책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자꾸만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역습에 역습을 당하느라 휘청거렸으며 미리 스포일러 당하지 않기 위해 시야 안에 들어오는 다음 페이지를 애써 무시하느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양 참을성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단언컨데 올해 읽은 책 중 재미만으로 따진다면 으뜸일정도로 재미있었다. 

 

살인사건 현장 청소 아르바이트생 박이경은 어느 날부터 자신과 정반대로 재력, 미모, 학벌 등 모든 걸 갖춘 연예인 지망생 단아름다운의 몸속에 들어간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그녀 역시 자신에 대한 꿈을 꾼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다른 것은 박이경이 꾸는 꿈이 단아름다운의 6개월 전 과거라면, 단아름다운이 꾸는 꿈은 박이경의 하루 뒤, 즉 미래라는 것. 이 반년간의 차이와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그에 얽힌 살인사건으로 인해 동화처럼 아름답기만 하던 꿈은 점점 악몽으로 변해가고, 급기야 꿈을 통해 서로의 몸과 시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사건은 점점 급박해져 간다.

 

꿈으로 한 몸을 공유한다는 설정은 다른 창작물들에서도 몇 번 본적 있었지만, 반년이라는 시간차와 전화를 통한 시간의 편집이란 규칙이 곁들여지자 상당히 독창적인 설정으로 재탄생 한다. 강지영은 서로에게 보이면 안 되는 비밀을 감추고 서로를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게끔 하는 이 규칙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소설의 미스터리 한 분위기와 긴박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덕분에 읽는 사람은 강지영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 이야기의 늪 속으로 점점 깊게 빠져들어 버리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의 삶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곤 한다. 잘 나가는 지인을 부러워하고,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연예인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심리에서 출발하여 구운몽과 비슷한 도착점을 갖는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부러워하고 동경했던 삶이 막상 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허울뿐이더라는 진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구운몽이 꿈에서 깨어나 모든 것을 돌릴 수 있었던 반면 이 소설은 꿈에서 깨어나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의 후반부와 결말이 약간 아쉬웠다. 주인공이 구운몽처럼 꿈에서 깨어나 진짜 본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들어 이야기의 전체적인 조임이 살짝 느슨해진 것도 아쉬웠다. 

 

강지영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이 아주 재밌고 짜임이 좋긴 하지만 <심여사는 킬러>라는 작품에는 못 미친다고 한다. 이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하고 즐겁게 읽었는데 이보다 더 나은 소설이면 대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런지 궁금해진다. 오래간만에 재미난 한국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아주 즐거웠고 앞으로도 강지영의 소설을 쭉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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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책이 아닌 애니메이션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도 더 전, 방대한 세계관으로 유명했기에 한번 봐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시작부터 왕따문제와 그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공 요코로 인해 물없이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함에 짓눌려야 했다. 물론 이것은 훗날 사이다를 코로 뿜어낼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해주는 클리셰였지만 사이다 맛을 느낄때까지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 맛본 사이다 맛을 잊지 못해 홀리듯이 책까지 구입해 읽으며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매력, 다른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십이국기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십이국기 소설시리즈는 현재 일본에서는 약 12권까지 나온 상태로써 1권은 92년에 출간되어 이후 2001년까지 시리즈를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중단되어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다. (향간에는 작가가 본업에 충실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쓸 만큼 썼고, 이후 시리즈에 대한 구상을 안해두셨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미완으로 끝나는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작년부터 시리즈의 신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십이국기의 팬인 김소형님이 인터넷으로 번역하여 올리신 것을 조X세상이라는 출판사에서 판권을 따다가 그대로 출간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전문번역가가 아니다보니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조악한 표지나 드넓은 행간 등등으로 인하여 팬들의 원성을 샀었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구하기 힘들어졌다. 십이국기의 일본내 재출간에 맞춰 라이센스 된 소설이 출시된다는 소문은 언젠가부터 꾸준히 돌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소문만 돌고 돌아 팬들은 거의 포기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드디어 엘릭시르에서 정식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에도 헛소문 아니냐며 우사미 눈을 하며 상황을 주시하며 있었는데 오오, 정말 착착 출간이 진행되어 소사소사 맙소사, 드디어 가제본 판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 번역하신 추지나님의 번역은 일부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흠잡을 곳이 없다. 소설 배경 자체는 중국풍인데 일본어로 쓰여있다보니 중국풍->일본어->한국어로 번역하시는 과정에서 머리를 싸잡고 고민하셔야 했을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번역이 정말 매끄러웠다. 단지 번역의 완성도는 약 60%이며 고유명사등은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할거라던 엘릭시르측에서 가제본판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얼마나 반영할런지 의문이 들 뿐이다. 고유명사에 대한 독자들의 황망한 반응에 엘릭시스측에선 저자 오노주상한테 고유명사부분에 대해 허락을 받았다며 해명에 나섰는데 오노주상의 기준은 황희정승의 다 옳다시는 마음씀과 다를바 없다는게 팬들 사이에 널리 퍼진 통설이니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의 고유명사들도 그다지 기대가 안되는게 사실이다.

 

십이국기 소설의 백미는 십이국이 있는 이세계의 배경에 대한 독특한 설정이다. 하늘이 십이국에 기린이라는 자비로운 생물을 주어 왕을 선택하게 하고, 그 왕은 불로불사로 어질게 나라를 다스려야하며,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게되면 하늘에서 벌이 내려 실도(失道)의 병에 걸린 기린이 죽게되고, 자신을 왕으로 선택한 기린이 죽게 되면 왕 또한 죽게 된다. 한마디로 죽기 싫으면 알아서 잘해라 하는 시스템인데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에도 저런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이 시스템의 폐해도 만만치 않긴하다. 죄없는 백성들이 왕과 기린의 애정 싸움 때문에 나라가 파탄나 쌩고생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기니까.

 

어쨋거나 이런 세계관을 만든 오노주상에게 치얼스! 방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든 이야기로만 치자면 영국에 해리포터, 미국의 얼음과 불의 노래와 견줄만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문학적으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부디 이번에는 오노주상이 시리즈 끝까지 마쳐주길 바랄 뿐이다. 오노주상 건강관리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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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 한 입의 과학 - 달콤 살벌한 소화 기관 모험기
메리 로치 지음, 최가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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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입학할때쯤 엄마는 계몽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을 사줬다. 10권 남짓한 그 책은 칼라에 도판도 이쁘장 했는데 초등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된 부분이 많았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소화관에 대한 그림인데, 소화관의 장기들이 하는 일을 작은 요정들로 치환해서 우리 몸안으로 들어온 음식물들이 어떻게 빻아지고 옮겨지고 흡수되는지를 설명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그렇구나, 내 몸안에는 있는 요정들이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철썩같이 믿었더랬다. 물론 이 믿음은 얼마 뒤 엄마의 설명으로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이때의 아기자기하던 소화관 그림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 책은 내가 철썩같이 믿었던 바로 그 요정들의 실체, 즉 소화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서 밑으로 나올때까지의 구구절절한 소화관들의 사연을 유쾌하고 명랑한 필치로 풀어놓아 평소 과학관련 도서의 높은 허들에 부담감을 느꼈던 나같은 사람조차 아주 쉽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감히 장담컨데 이보다 더 쉬운 과학관련 도서는 없다고 봐도 좋다. 메리 로치같은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세속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탐구정신을 가진 사람이 초중등 생물교과서 집필진으로 참여했다면 내 생물성적은 물론이고 내가 과학과 이렇게 멀어진 사람은 되지 않았을텐데 아쉬울 뿐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였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였는걸.

 

일단 이 책은 목차부터 범상치가 않다.

 

1 알고 보면 다 코가 하는 일이다
2 주인님, 저는 썩은 고기 맛을 먹겠어요
3 간을 둘러싼 오만과 편견
4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으면 나랏빚도 갚는다
5 위, 위산 그리고 두 남자의 애증
6 더러운 침, 무서운 침, 착한 침
7 입으로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8 고래에게 잡아먹혀도 살아남는 법
9 먹이의 역습
10 너무 많이 먹어서 죽은 사람들
11 밀수범의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 소화관
12 경고! 폭발할 수 있습니다
13 사람은 죽어서 장내 가스를 남긴다
14 냄새 고약한 장내 가스, 정말 나쁠까
15 나오는 문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요?
16 엘비스 프레슬리, 변비로 죽다!?
17 완벽하게 고쳐줄게, 역겨운 것만 참는다면

 

게다가 목차 바로 뒤 부터 시작하는 본문의 구성은 더 심상치 않은데, 페이지마다 각주가 어마어마하게 달려 페이지의 삼분의 일 가량은 기본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각주 많은 책은 독서 중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서 좋아하지 않는지라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약간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내 우려와 달리 각주의 내용은 굉장히 재밌었다. 보통 각주에는 단어나, 용어설명, 혹은 출처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의 각주는 그런 내용들 외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이 미주알 고주알 다 들어가 있다. 격투 중 상대방에게 물어 뜯겨 손가락 관절을 절단할 일이 생긴다면 남은 인생 평생 성질죽이고 평탄하게 살 수 있게 가운데 손가락인 편이 나을거라는 둥, 미국의 복잡한 의료 단체 이름을 비꼬는 말장난이라던지 등등. 강의 중 삼천포로 빠지지만 결국 다시 본문의 내용과 연결되는 저자의 폭풍 수다는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다. 

 

인상깊었던 내용 몇가지를 언급하자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때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혀로 보는 맛보다 귀로 들리는 음식이 부서지는 소리라는 것과 성경에 나오는 고래(정확히는 큰 물고기)에 삼켜졌던 요나설화는 위로 씹는 운동을 하는 고래 소화관 구조상 있을수도 없는 얘기라는 것, 대장질환 치료는 물론이고 체중감량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대장이식 수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등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최근들어 섬유질에 대한 이야기가 확 줄어든 것은 섬유질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이(거의 쓸모없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의학계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섬유질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지만 관련 상품을 파는 기업들이 섬유질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심리욕과 환상을 부추겼을 뿐이라는 것, 구강내의 세균을 없애준다는 구강 세척제나 대변을 원할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제품들 역시 섬유질과 비슷한 이유로 거의 효과가 없는 허황된 제품이라는 이야기는 내가 알던 상식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라 아주 놀라웠다. 사람이 대중매체에 의해 바보가 되고 조종당하게 되는건 정말 한순간이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사연으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도 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문에 죽음에 변비도 한 몫했을거라는 주장이나 이슬람 자폭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위로 꿀꺽 삼켜 이동한다는 내용이였다. 엘비스의 경우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그 터질듯한 뱃살이 변비 때문이였다고 생각하니 이미 고인임에도 참 측은하게 느껴지다 못해 그의 엉거주춤한 춤사위 마저도 왠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슬람 자폭 테러리스트의 경우 힘들게 삼켜낸 폭탄임에도 자기 자신의 신체가 보호막이 되어 비행기내에서 터뜨려봤자 기껏해야 자기 좌석밖에 못 날린다고 하니 그들의 어리석은 노고조차 안타까웠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며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그럼 최소한 폭탄을 삼키는 고통은 감내하진 않아도 될테니 말이다.

 

저자 메리 로치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순전히 자기취향의 주제로 집필했지만 비위가 약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좀더 엽기적인 주제까지 연구하고 싶은걸 가까스로 참았다고 언급한다. 그녀가 똥꼬발랄한 탐구심에 반한 내 입장에선 그런 배려심을 발휘하지 않아 줬더라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노말한 수준의 책이 탄생하였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우스개 소리로 똥, 오줌, 토사물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농담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 현대과학을 기반으로 즐겁고 유쾌하게 소화관을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웃음으로 승화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소화관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생물학이나 과학도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 단순히 재미있는 책을 찾는 사람들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마치 이 책에 등장하는 만병 통치약을 파는 돌팔이 약장수 같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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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물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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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읽은 이노우에 아레노의 책이 마음에 들어 읽게 됐다. 어쩔 수 없는 물은 여섯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집으로, 여섯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인물들과 주 무대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 1편에선 엑스트라였던 사람이 다음편에선 주인공이 되고 1편에서의 주인공이 이후엔 쭉 엑스트라가 되는 하는 식이다. 여기에 소설의 시점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보니 서로 얽힌 사건들이 각자에게 비춰지는 모습도 다르고 풀어나가는 방식도 달라서 아주 흥미진진하다.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받아 들였지? 하는 궁금증이 다음 편 이야기에서 확 풀린다. 마치 제 각각의 비밀을 풀어내어 이야기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 같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야기 자체가 재밌는 것과 별개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비호감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럴듯한 허우대로 여자들에게 빌붙어 사는 양아치(편지와 쿨피스), 주말마다 인터넷에서 꼬신 남자를 눈앞에서 바람맞추는게 취미인 유부녀(올리비아와 빨간 꽃), 명예퇴직 후 피트니스 클럽 접수원 아가씨와 바람이 난 유부남(운동화와 처녀소설), 편지와 쿨피스의 주인공인 양아치를 짝사랑 하며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여성(사모바르의 장미와 어니언그라탱), 운동화와 처녀소설의 주인공인 중년남성과 불륜을 하고 클럽을 전전하는 피트니스 클럽 접수원 아가씨(클랩턴과 납골 단지), 사라져버린 아내를 기다리는 수영강사(플라멩코와 다른 이름). 이중에서 유일하게 비호감스러운 인물은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소문의 주인공인 수영강사 뿐이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들을 이렇게 비호감으로 느끼게 된 것은 이들의 내면을 전부 흝어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각 이야기 속 화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야기 속 주인공을 볼때는 그들이 비호감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되는 배경일뿐이다. 즉 내가 각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호감이라고 느끼는 대상은 바로 내가 지금 읽는 이야기의 화자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볼때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내면의 이야기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화자에 대한 비호감도가 우주 저 멀리까지 솟구쳐버린다. 아마 우리 자신의 모습도 이 이야기 속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잔잔한 수면 위에 평온하게 드러나 있는 겉모습과 달리 내면 속에선 미친듯이 물장구를 치며 어떻게든 수면 위로 말끔한 얼굴을 내놓기 위해 하루하루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제 우리의 겉모습은 이 책의 말끔한 장정과 편집처럼 sns에 이쁘게 업로드 된 사진으로만 보여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 책 속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수영강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가 타인을 기다릴 줄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온 동네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어 입에 오르내리는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험담에도 게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성인군자라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가 그런 류의 인격인이였다면 아내가 그렇게 사라지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였고, 그것만으로도 해피엔딩을 맞을 충분한 자격이 됐다고 생각한다. 이 책속에서 유일하게 내면과 겉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였으니까. 우리는 수영강사처럼 살라고, 그게 사람으로써 가져야할 기본소양이라고 끊임없이 배우는데 그러기 참 쉽지 않다는걸 새삼 또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수영강사처럼 해피엔딩을 맞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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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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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만듦새까지 이쁘장한 책이다. 첫눈에 딱 마스다 미리 책이다, 라는 느낌이 온달까. 이렇게 말하면 이미 마스다 미리 만화를 많이 읽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마스다 미리은 이 책이 처음이였다. 광고로 자주 접하다 보니 처음 읽는 작가임에도 낯설지 않았을뿐. 이 책을 읽게 된건 바로 그 광고에 이끌려 사다놓은 마스다 미리의 책에 좀체 손이 안갔기 때문이다. 그러던 참에 에세이가 나왔단 소식을 듣고 에세이부터 읽어보자 싶었다. 작가의 평소 생활이 담겨 있는 이야기부터 읽고 나면 작가의 생각을 재가공한 만화를 좀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처음엔 일본 에세이 특유의 소소함을 담은 간결한 분량의 글에 살짝 김이 샜다. 명색이 스토리를 그리는 만화가라면 이보다는 좀더 글을 잘 써야 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마스다 미리의 이렇게 간결하고 가벼운 글들이 사람마음을 톡톡 건드리며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특별함이 있었다. 이런 느낌 몇번 경험한 적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나 트루먼 카포티의 소설들에서. 물론 전문 글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보다 글솜씨에 한참 미치지는 못했지만 마스다 미리도 앞서 언급한 두 작가들처럼 복잡한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쉬운 글로 써내는 능력이 탁월해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마치 책장을 넘길때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내 마음도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에 조금씩 젖어 들어 가는 느낌이였다. 
 
특히 공감한 것은 친구들끼리 나이가 드니 살이 찌는 부위가 달라진다며 걱정하는 것이나 여행 다니는 중에 다음 여행계획을 미리 계획한다던가, 부모님에 대한 애뜻한 감정과 과거를 추억하며 향수에 젖는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였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종종하는 말처럼 마치 내 얘기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내 얘기를 이렇게 공감가게 쓰지는 못하겠지. 자신의 느낌을 다른 사람들과 공감이 가게 써나갈 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아마도 이게 마스다 미리와 다른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아닐까 한다.
 
책의 중간중간 언급된 내용으로 볼때 이 책은 아마도 잡지에 정기연재한 에세이들을 묶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소재가 바닥난 작가가 어떻게든 소재를 짜내서 글을 썼다는 느낌이 드는 에세이들도 섞여 있다. 이런 식의 에세이들 대부분은 하루 일과를 쭉 나열하고 끝에 한두마디씩 덧붙이는 식인데 나는 그런 에세이들조차 마스다 미리의 일기를 읽는 기분이라 썩 나쁘진 않았다. 자기가 읽는 책의 작가가 어떤 사람이고 뭘 하며 살아가는지 말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독자는 없을테니까. 하지만 유명 만화가의 쫀쫀한 에세이를 바란다거나, 나이듦에 대한 걱정이 아직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안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그 덕분에 이 책을 여유롭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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