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제목 때문에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사랑 이야기라는 추천사에 혹해 리처드 매드슨의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읽었다가 잔뜩 골탕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소설은 종교적 색채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만큼 그 부분에 대해선 담백했다. 책 제목은 19세기에 나온 바이런의 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따왔지만. 역자의 말에 의하면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눈치챘을 법한 재치였을 거라고 하는데, 이런 에피소드를 주워들을 때마다 해당 문화권에 대한 배경지식의 부족이 아쉽다. 우리나라 책을 읽는 외국인들도 이런 감정을 느끼곤 할까.

 

소설은 영국 최남단에 사는 해럴드가 20여 년 전 친구였던 퀴니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영국 최북단까지 1000킬로미터를 걸어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해럴드가 걷는 이유는 암 말기인 퀴니에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지만, 걷기는 점점 퀴니 뿐만 아니라 해럴드 자신을 위한 믿음이자 구원이 되어간다. 소설은 해럴드와 해럴드의 아내 모린의 챕터가 번갈아 나오며 진행된다. 해럴드의 자아성찰이 씨줄이라면 해럴드와 모린의 화해와 사랑에 대한 재확인은 날줄을 이룬다. 어떤 이야기든 둘의 시선이 합쳐져야 온전한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책장을 빨리 넘겨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읽어내느라 가끔은 애가 타기도 했다.    

 

해럴드가 꾸준히 걷는 만큼 책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계속 바뀌고 스쳐 지나가는 등장인물과 그들이 품은 사연들 또한 다양하다. 그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마르티나와 은발의 노신사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임을 알기에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관계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묘한 낭만이 있는 해럴드와 그들의 인연이 아련하게 가슴에 남았다.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은 사람은 단연코 리치였다. 현실에서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고 마치 자기가 차린 밥상인 양 너스레를 떠는 사람. 그가 해럴드 대신 모든 일을 해낸 것처럼 거들먹거릴 때는 나도 모린만큼이나 분노했다. 윌프는 하는 짓이 밉상이긴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커 리치만큼 싫지는 않았다. 해럴드가 윌프를 끝까지 토닥인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갔고. 사실 내가 가장 속상하고 허무함을 느낀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해럴드의 걷기가 그의 인생에 축약본이었다면 그가 과거에 닿지 못한 개와의 인연을 이제라도 이어가길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했고, 인생이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자칫 복잡할 수도 있는 이 모든 요소들은 결국 해럴드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이야기는 상당히 정적인 편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읽는 속도가 더뎠으나 한번 속도가 붙고 나자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울 정도로 푹 빠져 읽게 됐다. 특히 해럴드 내면과 풍경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소설의 탄탄한 구성에 깊이감을 더하고 읽는 재미를 훨씬 배가 시켰다. 영국 문학 특유의 목가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오랜만에 밀도 있는 소설다운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여운만큼이나 진하게 느껴져 뿌듯했다. 앞으로 작가 레이철 조이스의 작품들을 만나볼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자 문득 배우 윤여정 씨가 TV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60세가 되도 인생은 모른다.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나도 67살은 처음이다. 내가 알았으면 이렇게 안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는 것.

 

윤여정 씨와 해럴드처럼 60여 즈음에 이르게 되면, 나도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좋은 책을 만나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페넘브라의 24시 서점
로빈 슬로언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작가가 트위터 회사의 매니저로 근무하다 영감을 얻어 집필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책 속에서 SNS와 구글을 비롯한 최첨단 기기들에 대한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재밌는 점은 이 소설의 배경이 시카고에 있는 오래된 서점이라는 거다. 당연히 오래된 서점과 최첨단 기기,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갈등과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책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젊은 세대와 최첨단 기기 쪽에 손을 들어주지만 내 생각은 작가의 생각과 다르다. 이북이나 최첨단 기기들이 시대의 흐름이란 것엔 동의하지만 최첨단 기기가 옳고 아날로그 방식의 책이 언젠가는 이북에 통폐합되리란 생각엔 동의하진 않는다. 

 

전자책은 전기가 없으면 볼 수 없고, 삭제키 하나만으로도 간단히 소실되지만 종이책은 전기가 없어도 볼 수 있고 삭제키 하나로도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물이나 불로 인해 못 쓰게 될 수도 있고 세월에 의해 소실될 위험이 있다. 그에 비해 돌에 새긴 고대 문서는 오랜 세월을 뚫고 현존하고 있다. 그러니 가장 영구한 것이 이북이나 최첨단 기기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궁극적으로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 영구하게 보존할 수 있는 것은 SNS에 올린 부끄러운 글에 대한 기억뿐이지 않을까.

 

소설은 페넘브라 24시 서점에 취직하게 된 전직 웹디자이너 클레이가 우연히 서점의 비밀을 눈치채고 파헤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집어넣어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로 만든 게 이 책이라고 하는데 그래선지 이 책에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주인공 클레이를 비롯해 서점 주인 페넘브라와 그들의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친구들도 그렇고,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는 오래되고 신비한 고서점이라는 배경 장소와 부러지지 않은 책등이라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비밀단체가 등장한다는 것도 그렇다. 작가의 유머러스한 문장들도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요소가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진 않는다.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을 합쳐서 요리한다고 해서 반드시 맛있는 게 완성되는 건 아니듯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에 걸렸던 게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해리포터와 다빈치코드에서 영향을 받은 티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 두 번째는 작가의 유머러스한 문장을 위해 이야기가 삼천포로 자주 빠진다는 것. 세 번째는 작가의 자료조사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 소설로서의 독창성과 완성도가 많이 털어진다. 역자 후기에 쓰여있는 대로 이 책을 가볍고 재밌게만 즐기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아주 재밌을 수도 있었지만 요소들이 합을 이루지 못해 아주 재밌는 소설은 되지 못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 읽는 동안 많이 아쉬웠다. 주인공들 연령만 10대 후반으로 낮췄어도 좀 더 그럴듯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는데, 그랬다면 해리포터 느낌이 너무 많이 난다고 욕을 먹었을 것 같긴 하다. 분명 가능성 있는 작가니 다음 작품에서 좀 더 정제된 작품으로 만나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ㅣ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책에 대한 책 이야기를 좋아해서 인문학부터 수필, 소설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한 책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실존하는 책들을 가지고 책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수필은 아무래도 개인적인 독서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취향이 나와 맞지 않은 경우 읽는 재미가 덜할 수밖에 없고 인문학 역시 비슷한 경향을 지니지만, 소설은 등장인물 별로 다양한 책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아 책에 대한 스펙트럼도 넓힐 수 있고 새로운 정보도 습득하게 되는 등 여러모로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소설은 고서를 취급하는 비블리아 고서당을 배경으로 세월이 쌓인 다양한 책과 책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책들 중 내가 읽어본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고작해야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두 작가의 이름과 대표 작품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이 이 책을 읽는 장벽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고우라 다이스케가 책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모든 책에 대한 정보가 그의 시선에 맞춰 꼼꼼하고 담백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막힘없이 수월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고우라와 함께 소설을 지탱하는 주인공은 비블리아 고서당의 주인장인 시노카와 시오리코다. 고우라의 고용주이기도 한 그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고서에 정통한 고서점 주인답게 어느 책이던 손에 들어오는 즉시 책의 이력을 파악해내고 특유의 통찰력까지 발휘해 책에 얽힌 사연을 단번에 유추해낸다.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모습에서 셜록 홈즈가 연상되곤 했는데 고우라 역시 왓슨처럼 시오리코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움직이니 이런 인상은 책의 끝 부분으로 갈수록 강해졌다. 물론 둘은 우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홈즈 왓슨 콤비와 달리 서로에 대한 이성적 호기심이 기반이 된 남녀 콤비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 묘한 콤비 외에도 솔직하고 당찬 시노카와의 여동생 아야카라던가 감초처럼 등장하는 고서전문 판매자 시다까지, 확실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감초처럼 등장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을 읽기 전 라이트 노벨이라는 특성상 스토리가 빈약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반은 예상대로였고 반은 아니었다. 스토리 라인은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이 있고 긴장감도 놓치지 않아 흥미진진했다. 짜임새와 구성도 꼼꼼하고 탄탄했으며 여러 책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그에 얽힌 이야기는 작가가 정말 책을 좋아하고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하지만 라이트 노벨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감성이 중간중간 튀었던 것은 예상대로였다. 특히 결말을 위해 스토리 군데군데를 부자연스럽게 틀어버린 것이 눈에 거슬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반 아이가 준 생일선물을 거절한 게 나쁜 놈으로 찍힐만한 일인지 모르겠다. 개인 정보를 생판 남에게 알려준 건 욕먹을만한 짓이긴 한데 선물은 받기 싫으면 안 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일 정서상의 차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너무 억지처럼 느껴졌다. 

 

오래간만에 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보이는 소설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작가의 필력과 스토리가 시리즈 뒷 권으로 갈수록 좋아진다니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된다. 남은 시리즈들도 찬찬히 읽어 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코끼리는 안녕, -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은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공모전에서 하상훈의 <아프리카의 뿔>과 공동으로 당선된 작품이다. 책 끝 부분에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심사위원 네 명의 심사평과 두 당선 작가의 당선 소감 인터뷰가 실려 있다. 보통 심사평은 딱딱해서 안 좋아하는데, 심사평과 당선 소감도 본 소설만큼 괜찮았다.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드라큘라 남자와 관 짜는 여자의 짝사랑 이야기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트와일라잇을 시작으로 뱀파이어부터 늑대인간, 심지어 좀비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종족 남자와 인간 여자의 러브 스토리가 대세를 넘어 클리셰까지 되어버린 참이였지만 한국작가가 집필한 작품은 접한 적도 읽어본 적도 없었기에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가 되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한국작가가 집필한 이종족과의 러브 스토리가 별로 없는 것에 대해 막연히 문화상의 거리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소설가 윤대녕의 <아프리카의 뿔> 심사평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또 하나 마음에 걸렸던 점은 바로 시점의 문제였다. 이 소설은 서사의 주체가 소말리아 해적이면서 동시에 17세 소년(모하메드 이브라힘)이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소설 양식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본질적으로 모국어를 하는 작가이다. 말하자면 주체의 확보를 통해 통해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납치된 동일 13호의 선원들이 서사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평소의 내 소설론적 믿음이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한국작가가 집필했는데 외국인이나 서양문화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독자 입장에선 어색할 수밖에 없다. 집필하는 작가 역시 해당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가보다 더 자연스럽게, 더 그럴듯하게 집필하긴 힘들 거고. 그동안 한국 작가나 일본 작가가 서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에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드라큘라 남자와 관 짜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이긴 하지만, 크게 보자면 동물원의 명물, 말하는 코끼리가 살해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동물원 사육사 민구는 관 짜는 마리를, 마리는 백 년 묵은 드라큘라를, 드라큘라는 자신을 드라큘라로 만든 미라를 좋아한다. 진심인 듯 진심 아닌 딴청 피우는 말들로 서로 밀당하는 것을 보면 드라큘라도 마리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 맞은 미라를 주워온 민구를 보면 민구가 미라를 좋아하는 것도 같다. 이처럼 무엇 하나 뚜렷해 보이지 않는 애매모호한 인간관계와 무의미해 보이지만 의미 있고 센스 넘치는 대화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대화가 쓸데없이 끝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지론을 아주 모범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심사평에 적극 공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드라큘라가 마리에게 보낸 편지였다. 참 별거 아닌 담담하고 서툰 내용이었는데 그 담담함과 서툼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새삼 소설을 읽는 동안 킥킥거리느라 까먹고 있던 이 소설의 정체성(러브 스토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드라큘라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사회 문제들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작가 본인의 따스한 시선으로 풀어낸 것도 인상 깊었다. 작가 당선 소감 인터뷰를 보면 본인 나름대로는 구조를 치밀하게 짰다고 자부하던데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구조가 후반부에 가서 무너진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가능성 있는 작가의 데뷔작이라 기분 좋게 읽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새로운 스타일의 출연이라고 평가하던데, 과연 어떤 작가로 성장할지 기대된다. 

 

인상깊은 구절 ▼

 

그는 편지를 주고 돌아갔다. 잠이 안 와서 편지를 읽었다.

 

마리에게

 

안녕. 아주 오랜만에 글을 써봐. 아마 백년 만일 거야. 편지는 처음인지도 몰라. 옛날에 잡지에서 편지 쓰는 법을 읽었어. 안부와 날씨 이야기로 시작하면 되지. 세즈부스. 여기는 날씨가 좋아. 그곳은 어때?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서관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도서관은 발각됐어. 모래를 담아둔 상자만 겨우 가지고 나올 수 있었어. 건물은 정부 소유로 넘어갔어. 나는 지쳤어. 그리고 한없이 무료했어. 한동안은 자기만 했어.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어. 다시 미라를 찾아나섰어.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지금 내가 정말 뭔지도 몰라. 그 여자가 미라인지 무엇인지도 왜 날 떠났는지도 몰라. 깨어 있는 시간을 뭘 하면서 견뎌야 할지 몰랐어. 미라를 찾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너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됐어. 이야기가 끝나는 게 두려웠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네가 날 닮았다고 생각했어. 이제 이야기가 끝났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아주 막막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아. 할 일이 있어서일까. 이걸 다 쓰면 널 깨우고 너랑 바보 같은 농담을 할 거야. 유치할수록 좋을 것 같아. 네가 했던 거짓말들이 농담이라는 걸 알아. 시간을 때우기에 농담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석대로 할게. 시작은 날씨 이야기로 하고 끝은 이렇게 하는 거지. 이만 줄일께. 잘 지내.

 

ps. 네가 만든 관은 정말 마음에 들어. 이건 진담이야.

 

서툰 편지였다. 그러나 너무 지루한 밤이어서 편지를 읽고 또 읽는 수 밖에 없었다. p125 

 

펼친 부분 접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카모메 식당 ㅣ 디 아더스 The Others 7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푸른숲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카모메 식당의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가 영화 제작에 앞서 작가 무레 요코에게 의뢰하여 탄생하게 된 소설이다. 영화제작이라는 목적을 두고 집필된 소설이니만큼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등장인물들의 성격 등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영화에 비해 많이 부족한 완성도와 도둑 에피소드 정도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도 연출과 미장센이 좋았던지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던 건 아니라 스토리적인 면에서 소설로서의 부족한 부족이 눈에 더 확 들어오는 것 같다. 

 

소설 분량도 책 한 권으로 엮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중편 정도의 양이다. 무레 요코 본인의 아이디어로 집필한 소설이 아니어서 그런지 끝 부분에 이르러선 소설 구조조차 흔들린다. 일전에 읽은 무레 요코의 소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은 심심하긴 하지만 그 심심함과 일상성이 괜찮았던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에선 그렇지 못하다. 글의 밀도조차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집필된 시놉시스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소설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고, 영화와 무레 요코의 기존 작품들을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이다.   

 

소설에 무레 요코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가 배어 있는 것은 좋았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캐릭터들의 관계성도 재밌었다. 토미의 경우, 영화보다 소설 속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속에서도 더 유기적으로 얽혔고. 하지만 분량을 억지로 늘린 게 역력해 보이는 후반부 도둑들 에피소드는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사과하고 사과받는 아주 단순한 내용으로 두 페이지를 날려버리기까지 해서 이전까지 제법 재미나게 읽었던 글의 내용이 희미해질 정도다. 만약 이 후반부 내용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에피소드였다면 영화처럼 카모메 식당의 매개인 오니기리로 에피소드를 이어나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쓰고 싶은 소설이 아니라 써야만 하는 소설의 한계였던 걸까 싶기도 하고.

 

영화의 여운을 느끼기에 과히 나쁜 소설은 아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지 않았더라면 출간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번에 무레 요코의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영상매체의 인기에 힘입어서 가 아니라 그녀의 소설 그 자체가 좋아서 이길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