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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산책길 들풀의 위로
P31 클로버의 잎이 행복에서 행운으로 변하는 건 짓밟혀서라고 한다 원래 세 장의 잎이 나야 정상인데 잎이 밟혀 생장점이 손상되어 기형적으로 잎이 하나 더 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시골 산책길에서는 찾기 힘들고 상대적으로 사람 많은 도시에서 행운의 네 잎을 발견하기 더 쉽다 클로버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로 조금은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깨닫기 힘든 곳에 행운이 나타나고 행운을 찾기 어려운 곳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것이
P47 선택에는 항상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내 선택이, 혹은 내가 선택된 것이 꼭 좋은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내가 선택되지 않았다고 꼭 나쁜 결과라고 할 수도 없다 인생은 그래서 참 재미있다 다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하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 같지만 그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인간은 갖지 못한 것을 동경하며 살도록 세팅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P55 한여름이면 이 땅이고 저 땅이고 붐비며 피는 개망초는 일제 강점기에 넘어온 풀이다 나라를 다 망하게 할 듯 흐드러지게 피는 걸 보고 망초라고 이름 붙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군락을 이루며 피는 성질 때문에 '우거질 망'을 써서 망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일본을 통해 들어와서 그렇지 섬나라 출신은 아니다 원산지는 북아메리카이고 일본에서 관상용으로 들여왔던 것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 뿐이다
매해 여름 숲길의 자리 싸움에도 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내 흐드러지게 피는 개망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노란 얼굴을 중심으로 가늘고 흰 꽃잎을 두른 꽃송이를 여럿 올린 채 바람에 흔들거리며 오늘도 제 존재를 한껏 드러낸다 오늘만큼은 가만히, 예쁘게 들여다봐주기로 한다
P139 성공한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돈을 많이 벌고 여백 없이 빵빵하게 명예까지 얻는 삶이 아니라 결핍을 축복이자 행운으로 치환할 수 있는 삶. 그래서 편안하고 평화롭게, 자주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니,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다 누구나 한 가지쯤 남보다 못한 무엇, 남이 가지지 못한 무엇이 있다 그 모자란 부분이 언제 어느 때 아름답게 빛날지 모르는 일이다 매혹적인 자줏빛을 지녔지만 척박한 땅에서 대충 나부끼는 소리쟁이가 키 큰 단풍나무를 부러워했다면 처음부터 싹을 틔우지도 않았겠지
가을, 세상의 초록이 결핍을 축복으로 바꾸는 시간이다
안정을 주는 고요가 아닌 알 수 없는 불안이 조여오는 적요. 내일이 불확실한 시간 속에 한결 같은 건 풀과 나무들뿐이었다
나는 더 자주 많이 걷기로 했다 아니 아예 산책가가 되기로 했다 산책을 직업으로 삼는 데 이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까다로운 면접도 없었다 걸을 의지와 조급하지 않은 마음, 작은 것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관심만 있으면 됐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발목을 잡던 부족한 스펙과 나이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침에 눈을 떠 세수와 양치를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마치 자연 속으로 출근하듯이 산책 파트너인 강아지 하이와 집을 나섰다 그러면 일이 생겼다는 기쁨, 안도, 희망이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잦아들었다
지방 소도시에 살아도 흙에 발 디딜 일이 거의 없다 온통 콘크리트 회색이다
책을 읽으며 일상에 어우러진 들꽃들, 이름은 몰랐어도 아는 꽃들에 반갑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여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불안하고 초조했는데 이참에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화초에 푹 빠져 엄청 사들였었는데 지금은 다 죽고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죄책감에 더 이상 화초를 사들이지는 않는데 화초들 새싹 올라오고 쑥쑥 자라고 꽃을 피우는 거 보면 기특하고 신비롭다
가평에서 책방 북유럽을 운영하며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산책가로 살아가는 삶, 세상에 아무런 해 없이 다정한 사람으로 사는 꿈이라는 작가님, 소박하면서도 멋지다
참 하찮게 생각했던 별일 없음에 감사하는 요즘이다
별것 아닌 초록이 건네는 작은 다독임에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괜찮아지는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