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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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어떤 삶이 선비된 자로서 가치있는 삶인지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실제로 교실에서 가르칠 때 단순한 내용 확인보다는 현실과 비교해서 학생들에게 가치관을 확인시킬 수 있는 유용한 수업자료였다.
이 책에서는 정약용의 부모됨이 잘 드러난다. 자식들에 대한 간절함과 소망이 묻어난다. 아이들이 독서하기를 간절히 당부하고 있다. 독서는 기술이 아니고 삶의 근본임을 강조하며 자식들의 역량을 세밀히 살피고 나서 적절한 독서(공부)의 실천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삶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해야 할 역할이 잘 드러나고 있다. 과연 나는 그러한 아버지됨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강한 아들 만들기>라는 책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역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식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야함을 말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현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은 가족에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직장에서 요구하는 살인적인 강도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제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자아실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가정 생활을 영위하는 수단적 측면이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본말이 전도된 형편이다. 직장을 위해서라면 가정이 조금 희생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더 강한 현실이고 그것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아버지가 사라진 가정의 모습이 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학생들이 다반사이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버지의 관심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학생이 전혀 없다. 한마디로 지금 현실은 ‘아버지는 없다’이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조언을 할라치면 그것은 간섭으로 받아들인다. 이때까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다가 왜 갑자기 간섭하느냐고 항의한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정서적인 교감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약용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버지가 어떠해야 함을 오늘날 아버지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한다.
아들의 독서 상태를 매번 점검하며 수준을 확인하고 더 잘하도록 격려하며, 위로하며 삶의 방향성을 바로잡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 방향성이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향하도록 하는 진실된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날 아버지됨에 대한 고민을 넌지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영적 아비된 자로서 영적 아들에게 격려와 질책과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리고, 올바른 지도자로서 서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울의 심정을 서신서에서 잘 살필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의 멘토엿다. 멘토란 상대방보다 경험, 연륜 많은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가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도전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멘토는 멘토리를 진정한 인격으로 대해야 하고, 삶의 태도가 긍정적이며 마음이 열려 있어 멘토리의 견해를 잘 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멘토리의 달란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디모데와의 관계 속에서 잘 드러내 준다. 그 바울의 심정을 오늘 날 아버지 된 자들이 가져야 되지 않을까? 특히 신앙인으로 아버지 된 자들이 그 심정을 더욱 알아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바로 이 멘토로서 자식들을 올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떤 부모된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되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철저하게 실천한 것을 통하여 자식들에게 가르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것이냐에 대한 철저한 고민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기를 자식들에게 경계하는 정약용의 모습이야 말로 오늘 날 아버지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본받아야 한다. 믿음에서 벗어난 어떠한 것에도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자식들의 공부를 우선시해서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난 생활을 허용하는 자세에서 자식들이 배울 것은 하나님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있다라는 잘못된 신앙을 가르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약용이 자식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였다. 그렇다면 나는 자식과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단순한 세상살이의 처세술만을 주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고민되는 시간들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통해 비전을 세우도록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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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아들 만들기
장석훈 / 문학사상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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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자아이에게 부모가 되는 지혜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잃어버린 교육 용기>를 먼저 읽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교육 용기>가 원론적인 책이라면 <강한 아들 만들기>는 실제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청소년기의 아들을 키우는 실천 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각 시기의 행동 패턴과 원만하게 키울 수 있는 실천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고민은 사춘기, 청소년기의 소년들의 연약함을 이 사회가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가 강요한 강함으로 인해 더욱 문제가 무시되고 있는 남자 아이들의 연약함을 어떻게 도울수 있는가를 깊이 있게 천착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남자 아이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부여하고 있다. 남자 아이들은 위장된 터프함으로 자신의 틀을 견고하게 하고 있지만 내면은 너무나 약하고 여리다. 그렇기에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강한척 한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주된 변화 요인으로써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분비로 설명한다. 아이들의 이런 생리적 변화기에 우리는 아이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탄생시에 옆에 있었듯이. 청소년기는 생명의 탄생에 이어 제2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탄생을 인도해줄 대상이 필요하다. 누가 그런 대상이 될 것인가? 자라날 역할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잃어버린 교육 용기>에서는 부모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옆에서 있어주고 지지해주고, 기다려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함을 이야기 했다. 이 책에서도 바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남자 아이들은 3시기를 지나게 된다. 각 시기에 적절한 역할 과제를 습득해야지만 강한 아이로 자라날 수 있다. 각 시기에서 육체적 성장, 지적 성장, 도덕적 성장, 자아에 대한 이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 등에 적합한 역할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한 시기에 부모와 부모에 준하는 사람들의 도움과 모델링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함이 강조된다.
나는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모델링하며 저절로 자라는 것으로 보통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도움 주는 역할이 굉장히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 우리는 보통 사회적인 통념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아이들의 입장이 아니라 성인의 입장에서. 기다리기보다는 강요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능력을 찾아가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틀 속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올바른 성인으로 이끌어 낼것인가를 고민하지만, 막연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에 대해 시기별로 구체적이고, 상세한 대책을 제시해 주고 있어 좋았다. 많은 참고가 되고 아이들이 혼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생리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성경적이지 못한 측면이 곳곳에서 눈에 보인다. 청소년기의 가장 큰 변화 요인으로써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를 꼽고 있는데, 그것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청소년기 남자 아이들이 대부분 그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단정이 되고 있다. 그런 혼란을 겪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런 혼란 없이도 성장해 가는 아이들도 많이 있음이 간과되고 있다. 또한 호르몬의 변화로써는 청소년기의 여러 가지 변화 양상을 다 설명하기에 부족한 측면이 간과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생각났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이야기 하면서, 서로가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적인 방법들을 고민한 책이다. 그 책을 읽다가 일면 공감하면서, 다른 한면으로서는 굉장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내용을 실천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숨막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매 순간마다 차이를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실천을 하려다가 자꾸만 본질을 잊어버리고 실천항목들을 점검해 나가게 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다가, 폴 투루니에의 <여성, 그대의 사명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남녀 차이의 본론적인 설명을 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실천적인 측면보다는 차이의 본질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강한 아들 만들기>가 실천적인 측면이 너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읽다가 많이 답답하게 여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이 책은 부분부분 동성애를 인정한다든지, 성적인 측면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절제보다는 생물학적인 구조를 우선시하고 있는 경향도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길러야 될 것인가? 분명히 성경적인 관점을 세워야 할 때이다. 말씀에 기반한 교육을 해야 될 때이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야 하고, 그 진리안에서 세상에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발견케 해야 될 것이다. 그것을 하기 위해 부모가 아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책의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며 그 시기에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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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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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위장된 행복
모든 욕구가 즉시적으로 채워지는 사회. 불안이 없는 아니, 불안을 금방 행복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있는 사회. 모든 것이 풍성하게 채워지는 사회. 스스로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우리가 평상시에 꿈에도 그리는 사회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다. 모두가 행복하고 불안하지도 않고 모두가 평등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자족할 수 있는 세계. 우리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현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정점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욕구만이 보일 뿐이다. 인간은 단지 욕구로만 존재일 뿐이다. 무섭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궁극적 모습일까 두렵다.
진리에서 멀어진 과학의 비애를 잘 그려주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무한정 실현시키는 목적으로 과학이 사용될 때 또한 그것이 하나님이 없고 인간만의 욕망만 존재할 때 무서운 결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똑같은 생각, 똑같은 욕구는 결국 전체가 하나된 모습이다. 다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욕구의 충족으로 맺어진 사회의 모습은 인간이 추구하는 성공(욕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의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이 신세계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기존의 계속되는 욕망의 실현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도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국 버나드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인 레니나와 그리고, 자신의 명성을 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자 신세계에 대한 회의보다는 그 속에 재빨리 만족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는 나의 욕망과 사회적인 성공을 선택해버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결국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성공 신화와 그것을 추구하려는 나의 욕망이 나를 지배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러한 욕망 추구의 허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야만인인 존은 문명을 동경한다. 신세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 문명(레니나)에 대해 경탄과 숭배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가 그토록 찾던 진리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신세계의 생활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속에서 자신의 생활과 발언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야만인도 자신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속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신세계에 대한 문제성은 인식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대안을 생가해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결국 존도 이러한 구조에 길들여진 한 마리 어린 양일 뿐이었다.
그래도, 존은 동경의 세상이었던 신세계가 오히려 절망의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원시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자기가 살던 원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몸부림치다 자살하게 된다. 이러한 자살을 통해서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던 신세계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세상임을 인간임을 포기한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신세계가 아닐까? 인간의 욕망 추구가 성공이라는 포장으로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는 현실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쫓아 가고 있다. 모두가 돈으로 학벌로, 명예로 성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고 있고, 이 사회는 인간의 욕망 실현을 위해서 모든 과학적 기술을 동원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레니나처럼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일단은 버나드처럼 그것을 부정하지만 그 기회가 나에게 다가올 때 과감히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을 포기하고 그 현실적 진리를 부여잡을 것인가? 아니면, 존처럼 과감히 포기해버릴 것인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오히려 절망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 실현이 행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위장된 행복이다. 그것의 추구는 하나님이 질투하는 우상 숭배이다. 우리는 이제 결단해야 한다.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질투로 창으로 음란을 행하던 자를 창으로 찔러 죽였듯이 우리도 이제 우리안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욕망이 있을 때 하나님의 질투의 창으로 찔러서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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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 잃어버린교육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전의우 옮김 / 쉴터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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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과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 내 아이들에게 함께 있어주는 존재인가? 어제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가서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씁쓸해 지는 내 마음을 바라게 되었다. 아이들이 아빠 언제오냐고 계속 묻더란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과연 지금 아이들을 위한다는 생각에서 하고 있는 일이 아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내가 바라는 가정의 모습과 아이들이 바라는 가정의 모습이 많이 다른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좋은 것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같이 있어주고, 그들을 끊임없이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높이가 필요하다. 무엇인가 교정하고 가르침을 주어야하는 대상으로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가 내게 오면 무너가 같이 놀아주고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체계로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연 문제해결이 되었을까? 솔직히 같이 있음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 자신조차도 부모가 함께 있어주지 않는 문화에서 성장했기에 아이와 같이 동일한 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또한,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아이들에게 성공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나는 그 현실에 충실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이 이 현실을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적응해라. 그리고나서 생각하라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부적응적인 행동을 보이면 그것을 교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성공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적인 성공은 오히려 아이들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것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성공은 바로 거짓임을 알게 한다.
 이 책에서는 또한 아이들의 부적응적인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의 적응적인 행동에 초점을 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 한 아이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심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함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대할 때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른인 우리가 그들에게 올바른 가치를 가르치고, 습득하게 시켜서 성숙한 존재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가 가진 가치를 주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주입된 가치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인식해 억압하고 교정하려고 한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가지는 생활 패턴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보면 많은 문제아들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들을 문제아라고 인정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데 부산을 떨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도 하나님이 보내심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고귀한 존재다. 그런 사실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잊어버렸다. 아이들을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가 진 짐과 같은 존재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가진 문제만을 해결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른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고, 나와 함께 하셨듯이 우리도 나에게 주어진 아이들을 지지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아이들과 가까워 질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할 것인가? 부모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으로 필요함으로 느끼게 할 것인가? 이 책에서는 부모로서 책임지려는 용기를 가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은 부모를 주셨고, 아이들을 허락하셨다.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주신 선물이자 교육을 위탁하신 것이다. 부모들을 통해서 아이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목적에 부합되게 양육되어야 한다. 그것을 부모들이 책임져야한다. 책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을 통해, 기다려 줌을 통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통해, 아이들을 아이 그 자체로 보는 눈을 통해, 아이가 자라는 모습과 성숙하는 모습을 옆에서 묵묵히 바라보며 지지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아이들을 책임져야 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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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문화총서 4
최준식 지음 / 사계절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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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집단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정해지는 우리네 사회에서 진정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나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알게되었다. 나는 권위주의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집단에서 우선시되는 나이 우선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내가 견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도 나와 남을 대할 때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많은 모습이 내가 인식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결국 내 속에서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와 남을 갈라서 생각하고 있고, 권위주의적이고, 불확실한 것을 회피하기 위해 무진장 바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남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하려고 하며, 내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의 모습. 이 모습이 결국은 이 사회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사회의 문제는 내 속에서 드러난 문제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에게도 그러한 문제가 동일하게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나의 모습을 철저히 인식해야지만 이 사회의 모습을 끌어안을 수 있다.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나의 모습의 연장선임을 기억할 때만이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잘못을 비판만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온갖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나의 가치관과 다르면 다 비판의 대상으로 변해 버린다. 나의 모습과 다른 것은 다 잘못된 것으로 매도해 버릴 가능성이 큰 것이다.
권위주의적이어서 타인의 의견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는 우리의 모습.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는 우리네 모습, 그리고, 집단주의적인 문화로 나와 다른 타인은 전혀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특히 약자와 소외자,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우리네 모습. 불확실성을 회피하기위해 바쁘고 열심히 일함을 통해 진정으로 중요한 인간적인 관계가 사라져 버려 소중한 가정도 파괴되어 가는 우리네 모습. 무속이 미신적이라고 일갈하면서도 여전히 생활양식은 무속적인 우리네 모습. 특히 미신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는 기독교에서조차도 여전히 기복적인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복을 비는 우리네 모습.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이 싫어하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모습이다. 이런 것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흥분해서 비판한다. 인간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양심이 있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또한 자기가 부딪히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비슷한 패턴을 보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조차도.
이젠 이런 모습은 버려야 할 때다. 변해야 하는 것은 나부터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 속에 들어있는 부정적인 문화의 산물을 냉정히 직시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버려나갈 때 이 사회의 문화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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