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는 청춘을 노래한 청춘 시다. 시대적 배경을 놓고보면, 대한민국은 조선이라고 부르던 일제강점기였고 서울은 경성이라고 부르던 시절에 쓰여져서 해묵은 시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 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새삼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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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 간 후 동기인 강처중에게 우편으로 보낸 시편과 여동생 윤혜원이 고향 용정에서 가져온 중학 시절 원고를 모아 시가 출판되었다.

대한민국에 많은 윤동주 시집이 나와있다는 사실은 자랑할 일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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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 대부분 이들 덕에 세상에 발표되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대학 2년 후배 정병욱에게 졸업작품으로 발표하려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관해달라고 맡긴다. 정병욱은 광양 양조장 마루 밑 널장을 뚫고 항아리에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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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름이란 게 성격을 넘어 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주문이 된다는 미신적 사고에 비추어보면 그녀의 이름은 결코 물에서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 바다의 흐름[海流]이라니. 그 이름은 하백의 깊은 사랑을 받는 신부를 연상시켰고, 물결무늬 같은 마음의 소유자로서 서로를 향해 몸을 부대끼다 부서지는 물방울의 내밀한 언어를 들을 줄 아는 영혼의 그릇 같았다. 그토록 이름조차 낭만적인 사람이 하필이면 그 이름의 뜻을 담은 물에 스스로를 포기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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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노인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고 물장구를 치며 고무 대야 안을 휘젓고 다녔다. 아이의 가느다란 다리와 작은 발이 황어의 꼬리지느러미처럼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물기를 머금은 아이의 피부는 정오의 햇빛을 받아 곳곳이 불규칙하게 반짝거렸는데, 그건 훗날 제대로 된 비늘과 함께 철갑상어의 옆구리에 수놓인 금빛 바늘땀 같은 줄무늬를 갖게 되리라는 예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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