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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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전쟁을 꼽자면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흔히 서양판 '임진전쟁'으로 불리는 백년전쟁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임진, 정유전쟁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섬나라의 우세적인 침공과 그것을 극복하는 내륙의 세력. 여기서 영국은 일본에 비유할 수 있고, 프랑스는 우리나라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도 미묘한 관계이며 라이벌 관계라고 한다. 단지 백년전쟁과, 임진 정유전쟁의 차이점이라면 백년전쟁은 말 그대로 100년에 걸쳐 이어진 긴 전쟁이었으며, 임진 정유전쟁은 7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부분이다. 아무튼 중세의 서구 사회에서는 이 전쟁이 거의 세계대전 급으로 취급됐을 것이다. 머나먼 과거에 이뤄졌던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제국의 전쟁,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테가 거대하게 싸웠던 큰 사건처럼, 중세의 백년전쟁은 당대 유럽 열강의 이목을 집중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백년전쟁에 관한 책이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백년전쟁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의존하거나, 파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지식들, 그리고 간간이 책에서 요약된 내용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찰나 2018년에 이 책이 출간됐다.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매우 반가웠던 소식이었다. 책은 중세 유럽의 백년전쟁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명과 인물들 때문에 생소함이 있겠지만, 당대의 전쟁의 흐름을 최대한 평이하고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도와 가계도 편집 등이 적재적소에 나와 있어서 독자에게 책의 배경 이해를 최대한으로 돕고 있다. 백년전쟁은 단순하게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전쟁은 유럽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고, 그랬기에 전쟁 전후로 유럽 대륙에 미친 영향은 엄청 지대했다. 전쟁을 통하여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군사적 전술과 전략은 발전을 거듭했고, 두 나라의 왕조의 권위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복잡한 백년전쟁을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짧게 흐름만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인 어머니가 장악하던 권력을 쿠데타로 되찾고, 왕권 강화에 열을 올린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최강국으로, 명목상 영국은 프랑스의 속국이었다. 프랑스를 타도할 목적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온갖 자금난을 겪으면서 빚을 내어 전쟁을 준비했다. 프랑스 역시도 영국의 불온한 움직임에 맞춰 군대를 준비했는데, 사실 프랑스도 겉으로 보기에는 강해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재정을 비롯해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기에 강한 프랑스 역시도 전쟁을 준비하면서 무리하게 자금을 융통했다.

전쟁은 에드워드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에드워드는 바다에서 슬라위스 해전, 육지에서 크레시 전투로 커다란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흑태자는 푸아티에 전투로 프랑스의 국왕을 사로잡으며 영국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우세를 예상했던 프랑스에 상황은 매우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프랑스 역시 반격에 나섰는데, 포로가 된 국왕을 이어서 샤를 5세가 취임했는데, 그는 선왕들처럼 전면전에 의지하지 않고, 외교적, 모략적, 게릴라전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국이 점령한 영토들을 야금야금 되찾기 시작했다. 전쟁영웅 흑태자는 병사했으며, 늙은 에드워드 국왕 역시도 예전만 못한 위용으로 프랑스의 공세에 몰리며 죽었으며 샤를 5세 역시 병약한 몸 때문에 일찍 죽는다.

영국에는 리처드 2세가 보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가 보위에 올랐다. 리처드 2세는 친프랑스 정책을 고수했고,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헨리 4세가 등극한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샤를 6세의 정부는 파당 정치로 내분이 격화됐는데, 브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가 권력을 앞에 두고 내부 투쟁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두 파당은 각각 영국 정부로부터 군대를 요청했는데, 이를 빌미로 다시 영국은 프랑스에 약탈을 시도했고, 헨리 4세를 이어 헨리 5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전세는 다시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침략을 시도했고 아쟁쿠르 전투에서 우세한 프랑스의 귀족 군대를 몰살시킨 뒤 브르고뉴와 일드프랑스, 수도 파리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그는 샤를 6세를 사로잡은 뒤 그를 압박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됐고, 프랑스 섭정으로 취임한다는 트루아 조약을 채결했다. 그 뒤 그는 남부 프랑스 지역을 점령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 베드퍼트에게 프랑스 섭정을 맡겼다.

남부로 피신한 도팽(태자) 세력은 이에 용기를 얻고 영국이 점령한 북부 프랑스 지역으로 진군했는데, 베드퍼트도 군대를 이끌고 맞이했다. 베르뇌유에서 양군은 격돌했고, 도팽 세력은 결국 영국군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한다. 그 뒤 베드퍼트는 오를레앙으로 군대를 모아 진격했으나,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영국은 전쟁 주도권을 프랑스에서 빼앗긴다. 잔다르크는 결국 영국군에 붙잡혀 사형됐지만, 사기가 오른 도팽파는 북부 프랑스를 야금야금 점령해나갔고, 마침내 도팽은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위를 이어나갔다. 그 뒤 샤를 7세는 기만과 책략, 그리고 군사력으로 프랑스 국토를 회복해나갔고, 영국 세력을 몰아낸 뒤 포르미니 전투의 대승, 기옌의 보르도 점령을 끝으로 전쟁을 종결지었다.

흔히 백년 전쟁의 주도권은 초중반까지 영국이 모두 잡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전쟁의 중반부 즉 영국의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공백기 때에는 프랑스의 샤를 5세가 간접적인 방법으로 국토를 회복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프랑스 쪽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책을 읽으며 백년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 책에서 배울 점은 복잡하고 파편적인 역사 지식보다, 이런 역사적 흐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 더 값진 법이니까 말이다.

첫 번째로 원인으로는 '안정된 정치'였다.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대체적으로 정치가 안정됐고, 당파가 나눠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국론이 하나로 모여 있었다. 반면, 열세의 나라에서는 내부적으로 파당을 이루고 있었고, 내부 갈등이 매우 심했다. 이를 중재할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도 없었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주도권을 잡은 나라의 특징은 바로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전쟁과 정치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런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을 적절하게 회유하거나, 민족성에 호소하여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군사적으로는 강력한 리더십과 체계적인 명령을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사실 우세했던 프랑스군이 매번 영국군에게 패배한 원인은 바로 지도층의 리더십 부재와 지도층의 무데뽀 정신에서 비롯했다. 주요 전투에서 영국군은 비록 열세였지만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와 철저한 전략 아래에서 우세의 프랑스군을 무찌를 수 있었고, 이런 자신감이 영국군을 감싸고 있었기에, 프랑스군은 전쟁 후반까지도 영국 군대를 두려워했다

 세 번째 원인으로는 '무기의 우세'다. 전쟁 당시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절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국이 자랑하는 '장궁' 부대였다. 당시 프랑스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 주축이었고, 중무장을 한 중기병이 주요 전력이었다. 반면 영국은 기병보다는 궁병을 내세웠으며, 사거리가 기존의 쇠뇌보다 훨씬 압도적인 장궁을 활용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저 물량과 화력으로 돌격하여 영국군을 제압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영국의 장궁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영국이 대승을 거둔 전쟁에는 항상 장궁이 함께하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등 모든 대승의 배경에는 궁수가 있었다. 마치 임진전쟁 초기에 일본군의 무장인 조총 덕분에 압도적인 승리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 반면 전쟁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압도적으로 밀리는데, 이때 프랑스는 우세한 대포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포를 주력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장궁이 아무리 사거리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대포와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이렇듯 전쟁에서 승리한 세력의 이면에는 '우수한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네 번째 원인으로는 '경제적인 요인'이다. 사실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양국은 파산의 파산을 거듭했다. 우세한 국가도, 열세의 국가도 재정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양국의 군주는 엄청난 빚더미 속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언뜻 보기에 영국은 프랑스를 약탈하고 점령했기에 자금으로부터 더욱 우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섬이 아닌 내륙에 상비해야 할 군대의 유지비용은 어마어마했으며 그렇기에 전쟁의 승리 군주들도 승리를 빌미 삼아 더 많은 돈을 융자하여 전쟁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즉 우세한 세력의 배경에는 더 많은 돈을 대출, 융자할 수 있었던 여유가 있었다. 오늘날 사업 역시도 자금의 유통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기는데, 이 시대의 전쟁도 오늘날의 사업과 흡사한 성격을 가졌다.

사실 읽으면서 마냥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영국군이 프랑스에 가했던 모습은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했던 온갖 종류의 악행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임진-정유전쟁 때의 침략에서도, 그리고 35년의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우리 민족은 일본에 수탈됐고 약탈됐다. 프랑스 본토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약탈하는 영국군의 모습을 읽을 때마다 매우 착잡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고 하지만, 열강의 제국주의, 그리고 자국 이기주의 앞에서는 그러한 신사도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능적 욕망에 너무나도 충실했다. 무자비한 약탈을 100년 가까이나 지속해왔던 민족이 신사로 불리는 영국인이다. 당시 영국군 안에서는 프랑스와 전쟁을 통해 한몫 챙기려는 하층민 벼락출세주의자들이 만연했다고 한다. 귀족들에게도 전쟁이 부를 축적하는 커다란 사업이었다. 그랬기에 100년에 걸쳐 전쟁(이라 쓰고 약탈)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의 배경은 한쪽에서는 처절한 생존, 한쪽에서는 막대한 이익에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침공을 받는 프랑스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책 안에서도 프랑스인들이 점령인 영국인들에 대항하여 싸운 기록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반항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조직적으로 군대를 운용하여, 국가를 위해 일어나는 하층민 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북부 프랑스 지역은 점령군인 영국에 굉장히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의병과, 대한 독립 투쟁이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 있는 행동이었는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잔다르크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잔다르크는 100년 전쟁이 배출한 가장 큰 스타 영웅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책에 기술된 잔다르크의 분량은 매우 짧고, 매우 간단하게 나와 있었다. 유명세에 비해 생각보다 그녀가 이룩한 것들은 드물었던 것 같다. 물론 그녀의 존재가 프랑스 군의 떨어진 사기를 올렸다는 공은 인정해야겠지만. 사실 잔다르크에 대해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도는데, 대부분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뿐이다. 사실 나는 이 잔다르크야말로 샤를 7세가 만들어낸 스타가 아닐까 싶었다. 책에 나온 바와 같이 잔다르크가 등장할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객관적인 조건이 훨씬 우세했다. 당시 영국은 어린 왕이 집권했고 정치는 혼란스러웠는데다, 점령한 북부 프랑스 쪽으로 지원도 거의 없었다. 반면 남프랑스 일대를 장악한 샤를 7세의 도팽군은 자금을 축적했고, 군대를 비밀리에 키웠으며, 적지에 스파이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영국군에 비해 군대 사기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큰 흠결이었다. 샤를 7세는 초기에는 문약하고 떨어지는 지도자였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각성하여, 군주의 풍모를 되찾고 모략과 지략,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으로 백년전쟁을 종결하는 지도자다. 모략에 능한 그였기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릴 만한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잔다르크라는 스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군대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활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도팽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북부 프랑스를 탈환할 무렵, 잔다르크는 무리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다 영국군에 포로가 된다. 샤를 7세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잔다르크'를 구하지 않는데, 이를 봐도 그녀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영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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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VS 트럼프 - 시작된 글로벌 적벽대전, 문재인의선택은?
유필립 지음, 김현석 / 주류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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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적으로 한국은 커다란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의 서쪽에는 전통적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던 중국이 급부상하여 떠오르는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움직임은 현재 패권국의 미국의 심기를 자극한다. 한국은 미국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한 상태인데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격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대중외교는 최악을 치달았다. 사드 문제에 민감한 중국은 바로 경제적인 보복으로 응수했다. 미국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퍼스트'라는 자국 이기주의 아래에, 국제 질서의 개입에 전면적으로 발을 빼겠다는 움직임은 한미 관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책은 우선 시진핑이라는 중국의 지도자와, 트럼프라는 미국의 지도자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온 흔적,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 환경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두 지도자는 금수저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진핑은 전통적으로 전형적인 모범 정치인의 모습이고, 트럼프는 이례적이고 독특한 정치인이다. 저자는 시진핑의 챕터에서 중국의 정치를 편향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것을 당부한다. 우리나라는 서구 사회의 정치제도를 채택했기 때문에, 정치를 바라보는 눈길이 기본적으로 서구의 시각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입장에서 중국을 바라보면 중국의 정치제도가 '후져' 보이기 마련인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대화를 이루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중국은 힘을 키우고 내정에 집중하겠다는 목표에 충실했다. 그리고 지금, 시진핑은 응축한 중국의 힘을 서서히 발산하려고 용트림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 발전의 핵심은 바로 바다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내륙 대륙에만 집중하고 해금 정책으로 바다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아편전쟁을 빌미로, 서구 세력에게 호된 회초리를 맞았다. 그렇기에 시진핑은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양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응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하여 이를 실현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양 진출은 미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시진핑은 당원 내의 부패를 척결하려고 노력했다. 흔히 중국을 움직인다는 부호 세력인 '꽌시'를 적폐의 근원으로 삼고 노리고 있으며, 관료 부패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시진핑은 노골적으로 친서민주의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꽌시는 정계와 재계를 움직이는 커다란 중국의 보수세력이다. 물론 시진핑도 이들을 단숨에 갈아엎을 정도로 무모한 숙청을 감행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진핑의 집권이 장기화될수록, 적폐를 명분 삼아 정치적 반대파를 가차 없이 숙청하고 있었다. 이런 내정 개혁은 중국 중산층과 서민층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으며, 시진핑의 권력 정당성은 이런 중국 서민층의 지지와도 궤를 함께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만을 취하기 위한 독재자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 중산층 서민층은 시진핑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물론 그도 인간인 이상 권력욕이 있겠고, 자신의 정적들을 부패라는 명분 하에 척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점은 중국의 서민들이 그런 시진핑을 매우 친근하고 심지어 다정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편 미국은 초유의 선거 결과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 중국 챕터에서는 중국의 정치제도, 그리고 배경을 바탕으로 거시적인 측면에서 시진핑을 해석했다면 미국 트럼프의 챕터에서는 트럼프 개인의 행동과 심리를 통해 미시적으로 트럼프를 해석하고 있었다. 확실히 트럼프는 전통적인 미국 대통령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이례적이다. 거짓말은 밥 먹듯 하고 극단적인 표현도 거침없이 발설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 없는 행동은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실제로 트럼프의 돌출적 행동은 매우 파격적이다. 너무 파격적이라 제멋대로인 트럼프지만, 그의 행동을 유심히 분석해보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트럼프에게 있어 명분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정치인들이 명분과 실리를 함께 갖추기 위해 노력할 때 트럼프는 명분을 집어던지고 극단적 실리에만 집중했다. 이는 그의 경제 행보,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의 정치 행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요소다. 막말의 대명사인 트럼프는 개념 없이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쏴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생각 이상으로 고단수다. 트럼프는 그저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감정적이고 돌출적인 행동을 자주 보이지만 그는 권력의 균형추와 손익의 계산을 민감하게 파악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소리 지르고 주장했던 것들을 손쉽게 번복하고, 때로는 미치도록 으르렁대던 적들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트위터 전쟁은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국의 대통령과, 그 누구보다도 야심 있는 중국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친미국가들의 합종책을 통해 중국의 진출을 견제한다면, 중국은 연횡책을 통해 미국의 저지를 뚫으려고 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은 박근혜 정부에 대해 공을 많이 들였다. 전통적으로 친한 북한을 등외시 하면서 한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한동안 한국에 대한 중국의 호의는 뜨거웠다. 한류 드라마를 비롯하여 한국 여행 등등 중국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한국에 러브콜을 했다. 골지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의 해양정책 진출 견제에 적어도 한국이 중립을 택해줬으면 하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결국 사드 배치를 감행했다. 사드 배치는 표면적으로 북한을 염두 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으로는 사드라는 미사일 포대는 고 궤도 미사일 방어 포대인데 북한에서 핵을 쏜다면 '굳이' 사드의 사정거리에 포함된 고 궤도로 미사일을 쏘지 않아도, 낮은 궤도의 미사일을 통해서도 한국에 충분히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이 옳다면 결국 사드 배치는 중국의 핵을 겨냥한 미국의 노림수였고, 그렇기에 시진핑은 경제 보복을 통해 배신자 한국을 응징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무엇보다 나는 저자의 설명이 옳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다. 박근혜 정부도 처음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사드 배치 결정은 매우 갑작스럽게 결정 났다. 심지어 촛불집회가 열려 탄핵되고 비리의 원류인 최순실이 구속되어 조사받는 상황에서도 급하게 결정 났다. 저자의 말대로 사드 카드는 대중 대미 외교에서 중간에 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협상카드다. 중간에 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카드를 내세워서 국익에 최대한 이득이 되는 쪽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카드를 너무나도 성급하게, 의혹투성이로 결정해버렸다. 사드 배치는 결국 '미국과 중국의 보이지 않는 패권 국경선'을 우리나라에 설치한 것과 같다. 이는 대외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 앞으로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앞으로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인 미국의 트럼프의 허영심을 만족해줌과 동시에 화난 중국의 시진핑을 풀어줘야만 한다. 말이 쉽지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한쪽에 치우쳐서 외교전을 행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크다. 게다가 지금 세계적인 추세는 서구 사회가 흔들리고 있고, 오히려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발전이 더더욱 돋보이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대미 외교에만 의지하는 것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우방을 내버리고 중국과 놀 수도 없다. 결국은 둘 사이에서 적당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어부지리를 얻는 전략으로 갈 수밖에 없다. 책은 이런 전통적인 외교 해결책 외에도 다른 부분을 주목했다. 바로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제3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강대국의 발전에 견제를 가하자고 주장했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거론한 지역은 동남아시아다. 이는 매우 타당한 말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눈치 보기 전략으로만 나가다간 상황에 따라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자강할 수 있는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이 카드를 새로운 제3의 세력권을 만드는 것으로 주장했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부분이고 지금 현재로 봐서는 현실성이 없는 대안이라고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적절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에는 자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자강의 대안으로 제3 세력권의 동맹을 책에선 꼽고 있었다.

 사실 일반 대중들은 대외관계에 관심이 있더라도, 피상적인 부분만 주목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전문성을 요하는 부분이라서, 뉴스 등을 상시로 보지 않는 한, 외교적 사안의 핵심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른 나라의 정치나 다른 나라와의 외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미국의 선거나 중국 시진핑의 정책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전통적 강호인 미국과 신흥 강호인 중국의 성장은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흔하게 접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끄는 이슈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이런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평이한 서술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책 한 권으로 가볍게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주장과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부분도 있지만, 그런 부분을 배제하더라도 중국과 미국의 외교전의 커다란 흐름에 대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교 흐름도 흐름이지만, 시진핑과 트럼프의 대조되는 리더십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에게 생소한 중국의 정치제도를 설명할 때, 도표나 그림을 활용하여 시각적인 요소를 추가하여 설명했으면 하는 부분과 전문 기구에 대한 설명을 책 말미에 정리해서 쭉 살펴볼 수 있게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 외 내용적으로 중복되는 문장이 있지만, 거슬리기보단, 앞의 내용을 상기할 수 있어서 오히려 괜찮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중국의 정치제도에 대해 참고할 책으로 《차이나 모델》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서구권 학자가 중국의 정치 모델의 장점을 분석하여 서술한 책인데, 아마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굳이 참고도서까지 보지 않고 이 책 한 권으로도 중국의 정치 모델을 파악하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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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 상황을 읽고 변화를 만드는 힘과 지혜
임건순 지음 / 시대의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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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동양 고전을 읽는 것을 두고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흔히 조소한다. 그럴 법 한 것이, 동양 고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공자왈 맹자왈'과 같은 유교 사상이 떠오르기 마련이고, 이런 사상들은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다. 동양 철학에서 대세였던 유가 철학은 사람의 모든 행동과 규범을 인의의 규범 아래에 고정하려고 애를 썼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이러한 인의에 종속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절대주의적인 태도는 급변하는 오늘날의 시세에 걸맞지 않은 부분도 많으며, 역사적으로도 동양 국가들의 근대화에 걸림돌이 돼서 근대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동양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서구의 영향이 커진 오늘날에는 이런 생각이 더욱더 심화됐다. 과연 동양 철학에는 급변하는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현실론적인 철학 이론이 없는 것일까?

책은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고민한 저자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나눠졌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중점을 둔 유가 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의 의지와 결의보다는 주변의 상황과 가변 하는 시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는 병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외면했던 병가 철학의 중심인 '세'를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었고, 그러한 세가 동양의 문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심도 있게 논하고 있었다.

애초에 전쟁에서 발전한 병가 사상은 극도로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다. 감정만으로 싸움을 했다간 손해가 극심하며 잘못하면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병가는 인간의 의지와 믿음을 믿기보다, 주변의 조건과 주변의 환경을 바탕에서 승리를 찾았다. 주어진 조건과 주어진 환경을 나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 싸움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병가의 핵심 철학이고, 그 중심에 세가 있었다. 즉 병가의 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세를 얻어놓고 싸움을 걸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노오력만 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가의 철학과는 대조적이다.

 병가에서 출발한 세라는 개념은 전쟁 철학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갈래로 퍼져 동양 문화의 한 축을 만들었다. 세라는 개념은 도가와 결합하여 황로학이라는 도가 중심의 정치학을 탄생시켰으며, 이러한 사상은 극현실적인 철학인 법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법가의 철학은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입장인데, 이들은 병가의 세라는 개념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세라는 개념은 철학을 넘어 동양의 풍수사상과, 그림, 그리고 시와 서예, 점술서까지 방대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세라는 개념은 동양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런 세의 철학의 현실적인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덕목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어려운 개념을 평이한 설명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내공이 돋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철학에 국한된 세의 개념을 예술과 문학, 그리고 풍수와 점술의 영역까지 확장하여 설명하는 해박한 응용력이 돋보였다. 동양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하여 색다른 견해를 만날 수 있겠으며, 동양학을 처음 보는 초보자들이라도 친절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글솜씨 때문에 어려운 관념들을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책에서 설명하는 '세'의 철학적인 부분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세의 철학을 예술과 문학, 그리고 풍수와 점술에 적용하는 부분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었다. 실제로 나는 예술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그림과 서예가 가지고 있는 작품 고유의 '세'를 해석하는 저자의 설명이 크게 와닿았고, 동양 예술을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풍수와 점술에 대해 그 안에 내재된 '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그래서 예술인들도 이 책을 통하여 동양 예술을 관통하는 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보다는 현실이다. 의지는 없이 살 수 있어도, 밥을 못 먹고는 살아가지 못한다. 의지와 투지는 밥이 최소한으로 충족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주변의 상황을 보고 맞추는 현실주의적 '세'의 철학이 마음의 의지로 대표되는 '인의'의 철학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를 중점으로 하는 철학의 맹점은 바로 인간성의 부정이다. 병가를 비롯하여 세를 중심으로 다루는 철학들은 인간성을 과소평가하고 무시해버린다. 인간이 일을 이루는 데에는 이랬다저랬다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마음보다는 주변의 환경과 객관적인 상황에서 요지를 찾는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과 객관적인 상황을 아무리 좋게 조성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때에는 결국 '인간의 노력'이 큰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의 상황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세'를 유리하게 조성함과 동시에, 나의 의지와 마음도 굳건해야 한다. 주변의 조건을 나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포기하지 않는 의지. 이 둘을 쌍두마차로 내어 달린다면 하고자 하는 일에서 결실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세를 믿고 세를 타고 세를 의지하되, 사람을 믿고 사람을 바탕으로 하며, 나 자신을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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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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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는 로마 역사를 다룬 고전 중 가장 권위 있는 책이다. 책은 150권으로 기획했으며 리비우스는 142권까지 집필을 하고 죽었다. 다루고 있는 시대는 로마 건국에서부터 시작해 옥티비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한 시대까지라고 하는데, 현존하는 부분은 초기의 1 ~ 10권 그리고 포에니 전쟁과 그 후를 다루는 21 ~ 45 권이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발간되자마자 화제를 모았으며, 후세에도 마키아벨리를 비롯하여 지식인 계층에게 두루 영향을 미쳤다. 서구 사회에서는 상류층의 교양을 상징하는 라틴어를 배울 때 《리비우스 로마사》를 교재로 삼았다고 한다. 최근 번역된 한국어 판본 《리비우스 로마사 1》은 1권 ~ 5권까지의 분량을 다루고 있다.

 로마를 다룬 역사고전은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꼽는 책이 바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가장 화려했던 로마가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고찰하는 역사서다. 그렇다 보니 글의 대체적인 어조는 건조하며 침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는 신생국 로마가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고찰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책의 초반부인 1 ~ 10권이 이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글의 어조는 굉장히 힘차고 역동적이다. 그래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비교한다면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의 부제는 '로마 공화국 발전사'라고 할 수 있겠다. 

 

 번역된 1권의 내용은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왕정의 폐지와 공화정의 수립, 그리고 갈리아 민족의 침략까지를 다루고 있다. 전설 속의 트로이 전쟁 직후, 아이네이스는 트로이 유민들을 데리고 이탈리아 반도로 피난을 온다. 그곳에서 정착을 했고, 아이네이스의 후손인 로물루스는 로마라는 국가를 세운다. 창업자 로물루스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종교적 권위, 그리고 때로는 권모술수와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을 활용하여 로마의 초석을 쌓는다. 그 뒤 2대 왕인 누마 치세에는 평화와 종교 등의 내치에 집중했고, 툴루스 치세에는 다시 전쟁을, 안쿠스 치세에는 전쟁과 내치를, 타르퀴니우스와 세르비우스 시절에는 제도 정비와 사회 정비를 완료한다. 이때까지 로마 왕정은 세습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 시절부터, 그들의 자손들은 왕가를 세습하여 권력을 독점하려 시도했으며, 그 결과 세르비우스 왕을 몰아내고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이 옥좌를 차지하여 전제 정치를 휘두른다. 이러한 세습 군주정은 로마 귀족과 시민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귀족과 평민은 단결하여 왕정을 폐지했다.

 그 뒤 로마에는 공화정이라는 정부 체제가 들어선다. 공화정이 들어서고 국가는 두 세력으로 나뉘는데 보수층을 대표하는 귀족 세력과 진보층을 대표하는 평민 세력이다. 집권 초기에는 귀족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계속되는 평민의 견제로 인해 평민들에게도 정치적 입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평민들은 투쟁과 집회를 통해 그들의 행정관인 호민관을 선출했으며, 보수층의 행정관인 집정관을 대신할 정무관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한다. 그 외 많은 관직들도 평민들에게 개방됐고,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관 역시 평민들에게 열리기 시작했으며, 귀족과의 통혼도 법적으로 허용이 됐다. 그러나 귀족 보수층은 기득권을 옹호하고 이권을 쉽게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평민들 역시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새로운 권리를 얻어내려 했으며, 그로 인해 공화정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극심한 내부 갈등 속에서도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에는 단합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외부의 부족들도 로마의 정치적 분열을 빌미 삼아 침공한 경우도 많았는데, 빈번히 실패하고 패배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정치적 내분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졌고, 극심한 정쟁으로 인해 10인의 의원회라는 극단적 전제정치가 들어서기도 했으며, 갈리아인들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국난 앞에서 로마는 굴하지 않고 서로 단합하여 문제를 극복했다. 리비우스가 주목하고 강조한 것도 이런 로마의 정신이었다.

 

 책은 널리 알려진 고전답게 오늘날에도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첫 번째로 느낀 점은 바로 '소통과 토론의 중요성'이다. 동양의 정치사는 군주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동양 역사서에는 군주에 대한 권위와 복종을 당연하게 서술한다. 동양에서의 민본이라는 것도 결국 아래에서의 외침이 아닌 위로부터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동양에서는 이 당시 신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참여한다고 해도 그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신민은 그저 지배층의 수탈의 대상이었고, 왕의 절대적인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래서 동양의 군주 중심의 역사는 읽다 보면 매우 경직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리비우스 로마사》는 달랐다. 이 당시 평민들은 귀족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힘없고 가난하고 수탈의 대상이었지만, 동양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그 결과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행정관을 선임할 권리를 얻어냈으며, 귀족들이 움켜쥐고 있는 권력을 최대한 나누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모습은 동양의 경직된 역사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비유하자면 매우 역동적이며, 활발했다. 이러한 로마의 역동성은 상하의 소통에서 비롯됐으며 이러한 로마의 소통은 로마의 발전에 주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두 번째로 '상무정신'을 꼽을 수 있겠다. 초기 로마 역사를 읽으며 느꼈던 것은 로마의 성공 요인에는 상무정신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초기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건국 초부터 책의 말미까지 평온한 시대를 보낸 적이 드물었다. 한 해에는 몇 번의 원정이 있었으며, 적국의 침략 역시도 빈번했다. 공화정 로마국은 내부적으로 정쟁을 일삼더라도, 외부적인 침략이 있을 때에는 상하가 합심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물론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전쟁에 대한 로마인의 열정은 시들어갔다. 외부 원정을 둘러싸고 귀족들은 전쟁을 통해 내부 문제를 덮으려 했고, 평민들은 그러한 귀족들의 징집에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건국 초의 상무정신은 어느덧 정쟁에 가려져 사라져가고 희미해졌지만, 그럴 때마다, 귀족이나 평민 측에서는 정쟁보다는 더 큰 대의를 이야기하며 나라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위인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로마인은 그들의 상무정신을 되살리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외세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사실 로마가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군사력이었다. 아무리 공화정이라는 민의를 바탕에 둔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지탱할 수 없는 무력이 없다면, 외세의 침략 아래에서 로마라는 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로마인은 그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으며, 타국을 점령할 수 있는 무력이 있었다. 초기 로마의 발전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약탈품과 전리품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보수와 진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인류사를 관통하는 주요 테마 중에 하나는 바로 기득권과 피지배층의 갈등이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그러한 모습을 가장 역동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서다. 당시 공화정이라는 수준 높은 정치제도 역시도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갈등과 조율 사이에서 구현된 제도였다. 귀족으로 대표하는 보수 세력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평민들과의 차별화를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위기가 올 때마다, 외세의 침입을 침소봉대하여 정치적 위기를 피해 가려고 애썼다. 마치 오늘날 보수가 사골처럼 주장하는 '보수 - 안보 - 국방' 트리오의 원조가 아닐까. 반면 평민으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은 끊임없는 투쟁과 격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토지문제와 세금 문제, 그리고 전리품에 대한 보상 등등을 놓고 귀족과 싸웠으며, 정치적으로 공직의 선출 조건을 두고 원로원과 대립했다. 사실 보수와 진보의 갈등 요인의 핵심은 결국 자원의 분배에서 비롯하는데,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두고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오늘날에도 부동산 문제로 국가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과거에도 비슷했다. 진보 쪽의 문제는 정쟁에 너무 열을 내서 정작 국가의 큰일을 못 보는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외세의 침입 앞에서도 국가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고 정쟁에만 골몰하던 쪽은 대체로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들이었다. 리비우는 간접적으로, 귀족들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평민들의 입장을 내려깎아 서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런 평민들의 수준 높은 정치의식이 로마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활기와 역동성이야말로 제도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마키아벨리를 비롯하여 후대 정치철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네 번째로 '선공후사의 정신'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공화정 로마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했다. 귀족과 평민은 싸움의 싸움을 거듭했다. 각자의 이권을 서로 주장했는데,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선공후사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로마는 이어질 수 있었다. 여러 사례가 나오지만 귀족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2권의 파비우스 가문이다. 파비우스 가문은 원래 귀족 중 극보수 집안이었다. 그래서 평민들에 대한 불만을 한 몸에 받는 가문이었는데, 그들의 후예는 이러한 불신을 씻기 위해서 전쟁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으며, 평민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에 평민들 역시 그들의 진정성에 감동받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 뒤 전쟁을 앞두고 귀족은 군대 징집을 평민은 징집 거부를 내세워 반발했다. 이에 파비우스 가문은 자신들의 가문으로만 병사를 편성하여 전장에 나선다. 이러한 행동은 로마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연상하며, 평민층에게도 귀족층에게도 귀감으로 남았다. 5권에는 전쟁영웅 카밀루스가 평민층 호민관의 정쟁 탄핵을 받고 추방된다. 그 뒤 로마는 갈리아 민족의 침략을 받는데, 정부에서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추방된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한다. 카밀루스는 부당한 탄핵과 추방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위해 싸워서 조국을 구원했다. 그 뒤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은 도시를 베이이로 이주하자고 주장했고, 그런 주장에 카밀루스는 선조의 얼이 살아있는 폐허가 된 로마를 버리지 말 것을 호소하며, 로마의 중요성과 상징성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은 계급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평민 쪽에서도 '선공후사'의 정신은 이어졌다. 귀족층과 극심한 대립 중에서도,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자 로마의 여인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국고를 채웠다. 게다가 귀족과 평민이 군대 징집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자, 국난의 위기에 압박을 받은 일부 평민 계층은 사비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말을 이끌고 자진하여 기마병 군단을 만들어 출격했다. 이에 대다수의 평민들은 자극받아 보병대를 꾸려서 출병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정신은 로마를 지탱해왔던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렇듯 로마의 발전은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던진 소수 귀족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국가의 위기와 대의 앞에서 양보할 줄 아는 평민들의 미덕에서 비롯했다.

 다섯 번째로 리비우스의 뛰어난 '문체'를 꼽을 수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역사서지만 문학서 못지않게 표현이 아름다웠다. 책에서 나온, 광장에서 연설하는 정치인들의 연설문은 대부분 리비우스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글들인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으로 가득했다. 책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연설문은 웅장하고 비장했으며, 전투를 묘사한 부분은 여느 전쟁소설에 뒤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논평을 가하는 부분에서는 오늘날의 신문 사설을 연상했다. 흔히 동양 고전에서는 《자치통감》과 《사기》의 문체를 비교하여, 《사기》의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허구가 가득한 문학서라고 비평하기도 하는데, 《리비우스 로마사》 역시 《사기》의 문학적인 필법에 견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리비우스 로마사》와 마키아벨리에 연관성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군주정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라고 오해한다. 이는 그의 주요 저작인 《군주론》 때문에 불거진 오해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를 지지했고,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로마사 논고》라는 저작에 정리했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의 1 ~ 10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로마사 논고》를 작성했다. 즉 《로마사 논고》는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의 주석인 셈이며, 《리비우스 로마사》를 바탕으로 한 공화주의 정치철학서다. 왜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에 집중하여 《로마사 논고》를 탈고한 것일까? 책을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의 주요 내용은 아까도 말했듯 '로마 공화국 발전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즉 신생 국가인 로마가 어떻게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부분을 토대로 자신의 역작 《로마사 논고》를 작성한 것이다.

 그럼 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군주론》을 쓴 것일까? 이러한 이유 역시도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와 있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2권 첫 부분에는 리비우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데, 공화주의자인 리비우스도 신생국 로마가 왕정으로 시작했던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한다. 새롭게 건국된 나라에서 바로 공화정을 시행했더라면, 공화정 특유의 불안정성 때문에, 국가가 기틀을 못 잡고 전복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공화정이라는 수준 높은 정치 제도는 나름의 근본 바탕 위에서 구현되야 하는데, 신생국 입장에서 시행하기에는 너무나도 시행착오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건국된 나라의 기틀을 잡을 때에는 군주제가 필요악으로 필요했다며 군주정을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즉 난세에는 군주정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지고, 치세로 이어나갈 때에는 공화정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리비우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마키아벨리 역시도 이런 리비우스의 생각을 계승한 것이 아닐까? 마키아벨리 당시의 이탈리아 대륙은 사분오열 합종연횡으로 찢겨 있었다. 여러 유럽의 강대국들은 각기 대륙을 통일하고 제국으로 나아갔는데,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하지 못 하고, 도시국가 체제로 찢겨서 열강에 이용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난세의 시국에서, 강력한 군주가 일어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통일 제국을 건설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군주론》 26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나라가 제국을 이루고 기틀을 이룬 뒤에는 로마의 선례를 본받아 정치제도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온 리비우스의 생각과 로마인의 역사적 성공 사례를 귀감으로 삼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이라는 군사 저작을 발간했는데 이 역시 《리비우스 로마사》와 관계가 깊다. 앞서 밝혔듯 로마의 성공 요인에는 '상무정신'과 더불어 자강을 꼽을 수 있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 도시국들은 용병을 사용하는 관례가 보편화됐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런 용병의 고용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리비우스 로마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로마인이 성공할 수 있던 까닭은 정치적 분열 속에서도 자강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힘은 바로 '강한 자국의 군사력'에서 비롯했다.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다 보면 군사력을 잃은 부족들이 어떻게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술론》의 핵심 주제는 바로 자국 군대의 정예화인데, 이러한 부분도 직간접적으로 리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번역은 영문판 중역본인데, 번역은 굉장히 매끄럽게 잘 읽혔다. 리비우스 특유의 수사적인 필법을 자연스럽게 번역했는데 역자의 노련미가 돋보였던 번역이다. 고전 애호가인 나는 개인적으로 원전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원전 번역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독성이다. 간혹 어떤 원전 번역본들은 너무 직역만을 고집하여서 읽기가 힘든 경우도 있었다. 이런 책보다는 중역이더라도 잘 읽히고 어색하지 않게 읽히는 책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전을 가장 온전하게 읽으려면 고전이 기록된 언어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고전을 읽자고 라틴어나 헬라어를 배우는 것 역시도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독자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가독성과 원전 번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번역이 좋겠지만, 만약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가독성을 선택할 것이다. 매끄럽게 잘 읽혀야 이해할 수 있다. 역자는 고전과 사회학, 문화학 서적을 여럿 번역했고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이번 번역도 매끄럽게 잘 마무리한 것 같다. 이 책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할 수준이 아니지만, 적어도 책을 통해 리비우스의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문체를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오랜 소원 중 하나가 바로 《리비우스 로마사》의 완역이었다. 한국어 번역본은 총 4권으로 현전하는 《리비우스 로마사》의 모든 내용을 완역한다고 한다. 매우 반길만한 소식이다. 특히나 고대 로마에 대한 고전은 국내에 없었는데, 가장 권위 있고 가장 중요한 《리비우스 로마사》가 번역되고 있으니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실각한 뒤, 시골로 내려가 점심에는 선술집에서 시민들과 어울려 놀고, 저녁때에는 관복을 갈아입고 고전으로 가득한 자신의 서재에서 고전 공부를 했다고 스스로 편지에서 밝혔다. 나 역시 이 책을 그런 기분으로 읽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는 정갈하게 샤워를 하며 사회에서 묻은 때를 벗어내고, 깔끔한 옷을 갈아입고, 양서가 가득한 나만의 서재에 들어가 스탠드 불을 켜서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었다. 자유와 평등이 살아있는 공화주의의 정신을 읽을 때마다 내 감정은 고무됐고, 로마인들의 뛰어난 인품은 귀감으로 삼을 만 했다. 책을 읽는 순간 자체가 나에게는 힐링이었다. 어서 빨리 다음 권이 나와서 지적 유희가 하루빨리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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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4-1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비우스 로마사』는 다른 책에서 구경만 했는데 마침내 국내에 번역판이 나왔군요. 번역도 가독성이 좋다고 하니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몽테뉴의 <수상록>,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등에서도 리비우스의 문장들을 부분적으로 접했었지만, <리비우스 로마사>에서 직접 리비우스를 대한다면 또 얼마나 흥분될까 무척 기대가 됩니다.^^

저는 최근에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의외로 리비우스를 인용한 문장들은 거의 없고(아직까지 1권만 읽어서 그럴까요?), 타키투스를 굉장히 자주 인용하고 있어서 좀 놀랐습니다.^^

리군 2019-04-17 17:10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고전입니다. 리비우스는 기원 전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필력이 뛰어난데, 이는 <사기>에서 보여준 사마천의 필법과 비슷합니다. 두 거성 모두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글에 녹여서 역동적인 역사 서술을 보여주는데, 리비우스는 자신이 자신있는 수사학을 <리비우스 로마사>에 절묘하게 녹여서 탁월한 비유와 은유 등등의 수사법을 아름답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봤던 역사서 중 가장 문학성이 탁월한 저서라고 생각하네요 ^^ 책의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중요성을 떠나 너무 재미있게 서술된 고전이라 관심이 있으시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해봅니다 ^^

그리고 기번이 다루는 <쇠망사>는 공화정 로마 체제가 아닌 제정의 로마의 몰락을 다루는 저서라서, 아무래도 초기 로마를 고찰한 <리비우스 로마사>보다는 왕정을 다룬 타키투스의 저서를 더 많이 인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기번이 다루는 왕정 체제의 로마와 타키투스의 저서는 시대적으로 가까우며 왕정이라는 주제 의식으로 볼 때에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점도 많을 테니까요.
 
치우, 오래된 역사병 - 역사과잉시대 한중의 고대사 만들기
김인희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치우는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02년 월드컵 때 치우는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였으며, 국민 대부분은 치우의 레드 데빌스 티셔츠를 입고 국가대표팀을 응원했다. 외신들도 이런 붉은 물결을 흥미롭게 주목했으며,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열정이라고 칭찬했다. 치우에 대해서 국민들은 친밀함을 느끼며, 우리와 연관이 깊은 신화적 인물로 생각한다. 치우를 상징하는 붉은색도 월드컵 때문인지 매우 친근하다. 정리해보면 치우라는 캐릭터는 한때 국가를 대표했던 마스코트였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친숙한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국민들은 이런 친숙한 치우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붙잡고 단군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의 조상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만, 치우에 대해서는 떨떠름하게 반응한다. 물론 역사학에 관심이 있고, 역사에 대해 조금 배운 바가 있는 사람이라면, '치우는 동이족'이며 우리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치우는 누구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인 것일까?

 책은 도발적인 명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역사의 과잉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라는 니체의 주장을 빌어,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의 '치우병'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치우라는 인물은 중국의 사서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선사시대 이래로 모든 문명국의 역사는 비현실적인 신화로 시작하며, 그로부터 먼 시간이 흐른 뒤에야 현실적인 시간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 문화도, 나일강의 이집트 문화도, 인도의 인더스 문화도, 그리고 중국의 황화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역사도, 로마 역사도 모두 시작은 신화로부터 비롯한다. 일본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단군이라는 인물도, 신화적 색채가 강하지 않는가? 치우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의 신화에서 선의 축이 '황제'였다면, 악의 축이 바로 '치우'라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했다. 검증하기 힘든 신화적 인물을 역사의 무대에 끌어올리려 하다 보니, 온갖 억측이 만연했고, 이것이 한국과 중국을 강타하고 있는 치우병의 원인이었다.

 그럼 역사에 기록된 신화적인 요소는 비현실적 요소가 다분하기에, 그저 무시해야만 하는 기록일까? 그렇지 않다. 신화는 현실을 매개로 하여 탄생한 비현실적 기록이다. 즉 당대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서 기록한 것이 신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적으로 덮어둘 수만은 없다. 앞에서 고찰했듯 인류의 대부분의 고대사는 신화적 요소가 강한데, 이를 좀 더 사실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허구의 속에 내포된 진실을 잘 가려내야만 한다. 허구를 매개로 한 당대의 진실은 무엇인지, 허구는 왜 이렇게 부풀려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역사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요소를 모두 동원해서 조심스럽게 검증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이 있기에, 신화적 요소가 잔재한 고대사 부분은 여전히 사학에서 어려운 영역으로 여겨진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고대사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책을 통해 치우라는 인물이 어떻게 형성됐고, 치우라는 인물이 왜 태어났으며, 치우 신화를 모태로 한 사건이 무엇인지를, 정밀하게 고증한다. 책 초반부에 고증하지만 치우의 신화는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주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에서 비롯했다. 황제를 통칭하는 세력은 주나라 황실을 뜻하며, 초나라의 반골 세력은 치우를 상징한다. 치우를 이야기할 때 전쟁과 관련한 이미지, 그리고 구리를 제조하는 능력을 가져서 병기를 제작했다는 것 역시도, 당시의 초나라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밝혔다. 주나라 황실과 초나라 제후국의 싸움의 원인은 바로 청동기 광맥 때문이었다. 당시 초나라 일대는 천연 청동기가 많이 매장된 곳으로, 매해 황실인 주나라에 청동기를 조공으로 바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초나라는 자신의 노다지를 주나라 황실에 바치기 싫었고, 이를 무기화해 자신이 패자가 되려고 했었다. 이에 주나라는 온갖 도덕적인 명분을 내세워 초나라를 정복하는데, 이 사실이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라는 신화적 스토리텔링의 모태가 됐다.

 이후 시대가 거듭할수록, 중원에서는 황제와 치우 신화를 더욱 부풀리기 시작했는데,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 당대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를 신화 속에 첨가하여 더욱더 과장을 부풀렸다는 점이다. 황제와 치우가 크게 싸웠다는 기주대첩과 탁록대전, 그리고 소금 못에서 치우와 관우가 싸웠다는 설화 등등이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역대 이래로 중원의 정부는 역대 이래로 만들어지고 부풀려진 신화를 '사실로의 역사'로 끌어내려,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역대의 중원 정부에서 늘 자행했던 일이며, 특히 최근 근대 이래로 중국의 과잉 민족주의 정책에서 노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신화적인 요소를 역사적으로 검증하는 데에는 아까 살펴봤듯 신화 속의 허구적 요소가 다분하기에, 매우 정밀한 태도로 검증해야만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를 자국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해석하고, 자료 해석 역시도 취사적인 선택으로 살펴봐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으로 이끌어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 마음대로 치우라는 인물을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치우라는 설화적 인물은 양국의 입장, 양국의 주관에 따라 서로 다른 과잉적 의미로 치닫게 된 게 오늘날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학 학계에서는 치우를 둘러싸고, 주류 사학에서는 신화적 요소라고 하며 역사적으로 검증할 사안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있고, 재야 사학에서는 그를 동이족의 조상으로, 한때 중국을 호령했던 위대한 인물로 격상해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결국 치우는 우리나라 민족의 모태이며, 중국에 대해 보이지 않게 종속적으로, 문화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의 불편한 마음을 해소한 고대의 영웅이다. 반면 중국은 오늘날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황제 그리고 염제와 더불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래 중국은 염제와 황제만을 중국 민족의 원류로 인정하고 숭배하며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내려 했는데, 치우라는 인물을 포함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이질적이었던 이민족들을 포용하려 하였다. 이렇듯 치우라는 인물은 현재 중국의 시조로도, 그리고 한국의 시조로도, 중국의 소수민족의 시조(마야족)로 받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허구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을 둘러싸고 각국의 주관적인 해석이 불러온 '역사 과잉'의 모습이다.

 책은 매우 흥미롭지만 사실 교양 차원으로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었다. 온갖 전문적인 용어와, 학술적으로 치우친 설명이 가득했기에 일반인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나름 역사책과 중국 고전을 읽는 나조차도 이렇게 느껴지는데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있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주장이 과연 정답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치밀하며 구체적인 해석과 사료, 그리고 문헌 고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매우 신뢰가 갔다. 더불어 책 말미에는 치우에 대한 고전의 문헌들을 대부분 번역해놓고 있어서, 치우라는 인물이 어떻게 기록됐는지를 시대별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교양 차원에서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지만,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주장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논증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신화적인 인물인 치우라는 인물을 이토록 구체화하여 풀어낸 점도 흥미로웠다. 책을 통해 중국이라는 나라가 역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화하여 이용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본문의 전문적인 내용들은 주석으로 처리해서 책 말미나 챕터 말미에 배치했으면 어떨까 싶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평이한 서술과 주장을 읽다가 뒤이어 나오는 너무 전문적인 논거를 접하면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문가, 그리고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주제의식이나 내용으로 봤을 때 일반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편집의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

얼핏 봐서는 '역사의 과잉'은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물론 역사는 중요하고,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과대평가 역시 위험하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를 불러오는데 역사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뒤틀린 역사 과잉 의식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역사에 있어 민족주의 의식은 민족 내에서 소속감과 유대감을 고양하는 효과가 있지만 이것이 과잉된다면, 이는 근거 없는 우월의식으로 빠지게 된다. 게다가 역사에 과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왜곡과 날조가 가미된다면 이러한 사태 역시도 커다란 문제로 이어진다. 치우의 역사병이 전형적으로 이에 속한다. 중국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중화주의적 역사관도 위험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도 이에 대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온 국민들이 근거 없이 친근하게 느끼는 치우. 그가 누구인지 우리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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