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 열정 이산의 책 29
레이 초우 지음, 정재서 옮김 / 이산 / 2004년 4월
품절


상상을 해보려는 시도는 과거를 재구성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에서는 전형적인 것이지만,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나는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나의 관심을 나의 어머니와 연관지어왔다. 어머니는 20대 중반에 이미 방송 캐스터, 대본작가, 라디오 프로그램 프로듀서로서 일가를 이루셨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를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보다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낯익은 목소리, 예기치 않게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 라디오와영화대본의 이야기꾼, 그리고 대중소설 표지에 실린 이름으로 더 잘 알고 있었다. 미디어에 의해서 매개된 이런 경험과 혈연적인 친밀감이라는 특이한 혼합이 최근 수년간 나를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연구하게 했을까?-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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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열정 이산의 책 29
레이 초우 지음, 정재서 옮김 / 이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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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 문화이론가, 성정치학 연구자, 포스트식민 연구자임과 동시에

 영화전문가이기도 한 홍콩 출신의 레이 초우(Rey Chow).

 그의 '원시적 열정'이란 저서를 읽다 반해버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뉴미디어 문화에서의 글쓰기에 관한 언급을 하던 중이었는데요.

 인간에 내재하는 이분법적 사유의 맹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더군요.

 그는 "근대에 있어서는 창조적 글쓰기가 상품화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전통적 예술범주에 속하는 문학이나 회화 등의 폐쇄적 본질주의와 거리를 두는 것이었죠.

 자신의 주된 전문영역이 '문학'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모더니즘적인 문학이 '혁명적'인 동시에, 

 시각 이미지와 같은 대중문화의 형식들보다 높은 서열에 있다고 보는 유의 

 낭만주의적 시각은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들뢰즈의 기본적 사유의 근간처럼,

 그 역시 '세련된' 형이상학에 관한 나름의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형이상학은 플라톤 유의 '일자'(the one)과는 거리가 멉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내재적 장 위에 존재하는 차이들,

 그 차이들의 무한한 반복이라고 해야겠죠.

 들뢰즈는 이를 두고 '일의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레이 초우의 일의적 근간은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이 대목이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었어요.

 '어머니'.

 여기서 어머니는 결핍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스스로의 사유의 근간이고 자극제이며 하나의 계기적 사건이 됩니다.

 제가 반해 버린 '문장'입니다.

 

 "상상을 해보려는 시도는 과거를 재구성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에서는 전형적인 것이지만,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나는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나의 관심을 나의 어머니와 연관지어왔다.

 어머니는 20대 중반에 이미 방송 캐스터, 대본작가, 라디오 프로그램 프로듀서로서 일가를 이루셨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를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보다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낯익은 목소리,

 예기치 않게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 라디오와 영화대본의 이야기꾼,

 그리고 대중소설 표지에 실린 이름으로 더 잘 알고 있었다."

 

미디어에 의해서 매개된 이런 경험과 혈연적인 친밀감,

우리는 그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적어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벤야민의 (충분히) 혜안은 수정이 아니라, 조금 더 발전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기술복제시대에 이르러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지니고 있던 '의식가치'가 사라짐으로 인해

고도 산업화된 오늘날 우리가 아우라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기술복제시대에도 저 나름의 아우라는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여전히, 기술복제품에게서 아우라를 느낍니다.

푸른 새벽이라는 국내 인디밴드의 음악을 아시나요.  

 그의 복제된 음반 씨디를 새벽에 걸어놓고는 저는 쥐죽은듯이 취하고 맙니다.

 전자화된 그 주파수의 음들에 저는 홀딱 반해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아우라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아우라도 제게는 응당 뼈에 사무치리만치 소중하고 또 소중합니다.

 아우라는. 존재합니다.

 레이 초우의 '문장' 또한 저의 굳어있던 감각의 어느 부분을 깨워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그러고보면, 나를 우리를 위로/위안 해주는 것들이 퍽 많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달콤 쌉싸름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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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은하계
마샬 맥루한 지음, 임상원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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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셜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먼저

이른바 구텐베르크 혁명이 가져온 '문자', 그리고 인쇄라는 문화의 대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맥루언은 바로 그 문자에 의해 언어의 시각적 기능이 특별히 확대된 나머지

우리 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어떤 하나의 감각, 즉 시각의 기능은 확장시켜 왔으면서도

정작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이나 기능을 억압해 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후 '전기' 문명의 대두로 우리 인간은 '감각의 거대한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전기 시대가 되어 우리의 기술적 도구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공존의 즉시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 새로운 전환점을 낳았다."(21)

이제 우리 인간의 감각이 단일하고 파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의식'을 되찾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각 간의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전기 혁명, 혹은 전자 혁명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지각 기관이 다르면, 지각되는 대상들도 / 다른 것으로 보일 것이다. / 지각 기관이 닫혀있다면,

그 대상들 또한 / 닫혀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503)

결국 구텐베르크 혁명이 가져온 '문자성'은 인간 감각의 단일화라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닫혀진 체계의 계몽된 개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맥루언은 이를 '밖으로 나타난 외형과 실재 간의 괴리'라는 말로써 비판하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맥루언이 '구텐베르크 은하계' 시대를 싸잡아 비판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문자라는 구형의 지각과 판단 형식에,

전기 혹은 전자 시대의 형식들이 "스며들었다"란 표현을 씁니다.

그 순간 "문자성의 새로운 배열(configuration)"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한 마디로 구텐베르크 시대와 이후 전기 시대 사이에는

명확한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는 흡사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 철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맥루언은 말합니다.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전자적' 은하계가 이미 '구텐베르크 은하계 속으로'

깊이 이동해 들어와 있다."(528)

 3.

 62년에 씌어진 이 책은 이렇듯 이미 벌써 그 당시에 놀라운 시대적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은, 모든 것이 사(개인)적이며 시장에서 팔 수 있는

'상품성'의 가치로 재단되는 오늘날 소위 포스트 모던적 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보았을 때,

맥루언의 주장이 지나친 기술 낙관론으로 치달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죠.

특히나 이미지의 조작과 기만이 여기저기서 횡행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상황에서 보자면

개인적으로 더더욱 그런 심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역시 놀랍게도 대중 문화 시대의 개인적 문화와 자유의 문제를 이미 벌써 예언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문자 중심의 기존 문학 작품들이 신화적이고 집단적인 측면에만 몰두한 나머지

개인과 자유의 문제에 등한시 했다는 지적, (이는 주로 낭만주의 문학작품들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딜레마로부터의 해방이 "심오한 유기적 특성을 지닌 새로운 발명,

즉 전기 기술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두 가지 지적에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보았을 때

적지 않은 적용상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62년이라는,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감안한다면

정말 굉장히 놀라운 예언적 선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 하나, 영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답게 여기저기서 문학적 인용이 빛을 발합니다.

문학 전공자, 특히 영문학 전공자 분들께선 더더욱이나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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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은하계
마샬 맥루한 지음, 임상원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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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기 시대가 되어 우리의 기술적 도구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공존의 즉시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 새로운 전환점을 낳았다. (...) 하나의 경험적 장 (...) 집합적인 의식 (...) 감각간의 상호작용 (...) 기술이 바퀴나 알파벳 또는 화폐처럼 속도가 느린 것인 한 그들이 분리된 것이고 폐쇄적인 체계라는 사실은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수용될 만하다. 이 시대는 필수적으로 인간의 확장된 감각이 집합적으로 상호작용한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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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은하계
마샬 맥루한 지음, 임상원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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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시대에 우리는 인간의 상호의존이나 표현에 있어서 새로운 형상과 구조와 대면하고 있다. 이들 새로운 형상과 구조는 "구어적"이다. (...) 인지 형식의 변화는 항상 낡은 인지 형식의 고집 때문에 지연되곤 한다. 우리의 눈에는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이 중세의 사람들로 보인다. 중세인은 그들 스스로를 고전적인 사람으로 생각했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현대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후손에게 문자 그대로 지난 150년 동안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놓은 중요하고 새로운 요소들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르네상스인으로 보일 것이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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