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 은하계
마샬 맥루한 지음, 임상원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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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셜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먼저

이른바 구텐베르크 혁명이 가져온 '문자', 그리고 인쇄라는 문화의 대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맥루언은 바로 그 문자에 의해 언어의 시각적 기능이 특별히 확대된 나머지

우리 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어떤 하나의 감각, 즉 시각의 기능은 확장시켜 왔으면서도

정작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이나 기능을 억압해 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후 '전기' 문명의 대두로 우리 인간은 '감각의 거대한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전기 시대가 되어 우리의 기술적 도구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공존의 즉시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 새로운 전환점을 낳았다."(21)

이제 우리 인간의 감각이 단일하고 파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의식'을 되찾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각 간의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전기 혁명, 혹은 전자 혁명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지각 기관이 다르면, 지각되는 대상들도 / 다른 것으로 보일 것이다. / 지각 기관이 닫혀있다면,

그 대상들 또한 / 닫혀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503)

결국 구텐베르크 혁명이 가져온 '문자성'은 인간 감각의 단일화라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닫혀진 체계의 계몽된 개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맥루언은 이를 '밖으로 나타난 외형과 실재 간의 괴리'라는 말로써 비판하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맥루언이 '구텐베르크 은하계' 시대를 싸잡아 비판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문자라는 구형의 지각과 판단 형식에,

전기 혹은 전자 시대의 형식들이 "스며들었다"란 표현을 씁니다.

그 순간 "문자성의 새로운 배열(configuration)"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한 마디로 구텐베르크 시대와 이후 전기 시대 사이에는

명확한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는 흡사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 철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맥루언은 말합니다.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전자적' 은하계가 이미 '구텐베르크 은하계 속으로'

깊이 이동해 들어와 있다."(528)

 3.

 62년에 씌어진 이 책은 이렇듯 이미 벌써 그 당시에 놀라운 시대적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은, 모든 것이 사(개인)적이며 시장에서 팔 수 있는

'상품성'의 가치로 재단되는 오늘날 소위 포스트 모던적 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보았을 때,

맥루언의 주장이 지나친 기술 낙관론으로 치달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죠.

특히나 이미지의 조작과 기만이 여기저기서 횡행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상황에서 보자면

개인적으로 더더욱 그런 심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역시 놀랍게도 대중 문화 시대의 개인적 문화와 자유의 문제를 이미 벌써 예언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문자 중심의 기존 문학 작품들이 신화적이고 집단적인 측면에만 몰두한 나머지

개인과 자유의 문제에 등한시 했다는 지적, (이는 주로 낭만주의 문학작품들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딜레마로부터의 해방이 "심오한 유기적 특성을 지닌 새로운 발명,

즉 전기 기술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두 가지 지적에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보았을 때

적지 않은 적용상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62년이라는,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감안한다면

정말 굉장히 놀라운 예언적 선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 하나, 영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답게 여기저기서 문학적 인용이 빛을 발합니다.

문학 전공자, 특히 영문학 전공자 분들께선 더더욱이나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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