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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문화사 - 작은 발이 걸어간 길을 찾아서
데틀레프 블룸 지음, 두행숙 옮김, 고빈 사진 / 들녘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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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간’의 문제를 다룰 때 그것을 단순히 양적 연장(extension)의 맥락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공간은 결코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간을 실생활에서 체험하므로 그것은 차라리 ‘삶세계’(Lebenswelt)로서의 공간이다. 다시 말해 일종의 ‘생활역학’으로서의 공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개인이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지각’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개입 된다. 데틀레프 블룸의 『고양이 문화사: 작은 발이 걸어간 길을 찾아서』(두행숙 역, 들녘, 2008)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공간-삶세계로서의 공간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양이 문화사』는 고양이들과 30년 넘게 같이 살아온 저자가 “고양이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의 행동과 관련된 모든 관점들은 물론 고양이에 대한 문헌,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온갖 현상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충실한 문헌과 자료를 다루고 있는 책에 걸맞게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 역시 여러 개가 될 수 있겠지만, 하나의 삶세계로서의 공간 안에서 다소 기이한 형태로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두 개체-인간과 고양이의 모습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날 인간과 고양이는 같은 생활공간에서 ‘불편한’ 동거중이다. 인간은 길거리의 주인 없는 고양이들을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친히 ‘도둑고양이’라 이름 붙여 준다. 애완동물로 집안에서 직접 고양이를 키우는 경우는 어떠한가. 심지어 그 경우에도 고양이는 결코 쉽게 주인-인간에게 다가서주지를 않는다. 일반적인 애완동물과는 달리 “오직 고양이의 경우에만 책임 있는 약속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인간은 어쩌면 고양이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고쳐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양이의 앞발톱은 때로는 따가운 가시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고양이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가까워지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고양이의 친밀성을 상징적으로 떠올리게 해 주는 공간이 있다. 벽난로, 부뚜막, 오븐, 화덕과 같은 공간을 말한다. 따뜻한 벽난로 위에 올라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고양이의 정경을 떠올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심지어는 ‘직업’을 가지고 인간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고양이들도 존재한다.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설치류들로부터 우편물을 보호하기 위해 우체국에서 일하는 고양이가 있는가 하면, 전화 케이블을 관 속으로 끼워 넣는 일을 맡고 있는 고양이, 극단이나 서커스와 같이 서비스업과 오락 및 연가 분야에서 인간을 즐겁게 해주는 고양이 등이 존재한다.


인간적 지각의 대상으로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매력적인 소재임에 틀림없다. 그간의 ‘도시’ 담론은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달로 대두된 ‘대도시’(metropolis) 담론으로 그 외연이 확장되고 있는 추세이고, 최근에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줬던 서울시 시청 앞 공간 담론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로 인해 촉발된 광화문 일대의 공간 담론으로 하루가 다르게 첨예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양이 문화사』는 미시-문화사적 맥락에서의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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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반항아 - 출생 순서, 가족 관계, 그리고 창조성 사이언스 클래식 12
프랭크 설로웨이 지음, 정병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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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학문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을 허물자는 취지에서 이뤄졌던 그간의 학제간 연구 바람 자체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배경으로는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치로 내건 문화연구의 발흥이 있었고, 최근의 이른바 ‘실용주의’ 학풍과도 다소 기이하게 맞물리고 있는 추세이다. 윌슨의 『통섭』이 출간된 이후 ‘통합학문’을 지향하는 목소리는 각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담론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최근 출간된 『타고난 반항아』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들이다. 키워드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심리학과 사회과학의 만남


진화심리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타고난 반항아』는 사상사와 정치사적 맥락에서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급진적 혁명들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미지의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지” 이 책은 묻고 있다. 나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경쟁 개념, 재산과 사회적 지위 중 그 어느 것도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설명해줄 수는 없다고 프랭크 설로웨이는 말한다. 대신 저자는 그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 “인간 행동에 대한 단순하지만 놀라운 관찰” 하나를 발견한다. ‘출생 순서’와 ‘가족관계 역학’이 그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상 자신의 족적을 남긴, 무려 6천566명의 방대한 전기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주역들이 ‘첫째’가 아니라 ‘후순위 출생자들’임을 밝혀낸다. 이전 세기에 부모들은 후순위 출생자식보다는 첫째에게 더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그에 따라 가족 내에서 형제들은 ‘가족 내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의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돼 있었다. 이는 문헌학적으로도 성경에서 증명된다. ‘성경 최초의 살인’이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형제 살해 아니었던가.


프랭크 설로웨이는 사회변화의 동인으로 ‘가정’에 주목한다. 이제 더 이상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경쟁’이 자행되는 곳이 된다. 그런데 역사 변화의 주원인을 찾으려 한 칼 마르크스의 오류는, 그것을 ‘가족들 사이’에서 찾으려 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해당 가족 ‘외부’에서 탐색하려 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생활에서 ‘대인 갈등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성적 충동과 오이디푸스적 갈등에 1차적 중요성’을 둔 결과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강조한 ‘부모-자식 갈등’의 근저에는 “부모의 자원을 놓고 형제들이 벌이는 갈등의 산물”이 존재함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혁명적 성격의 토대’는 결국 ‘출생 순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가정 내에서 부모에게 받는 불공평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동인은 없다. 이는 저자가 보기에 “출생 순서의 심리적 효과로 인한 가정환경에 불가항력적인 역학”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형제간 출생 순서의 차이에 따라 형제간 ‘분화’의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다윈은 “분화형 천재의 으뜸가는 사례”이다. 여섯 자녀 중 다섯째였던 다윈 자신이야말로 형제간 경쟁에서 비롯되는 혁명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본보기’인 동시에, ‘한 인간의 사유 과정에서 발생한 지속적인 혁명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통합론적 시각의 의미와 한계


통합 학문적 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당하다. 다만 한 가지 우려는 ‘문화’로 일컬어지곤 하는 인간 역사와 사유의 결과를 혹여나 단순히 생물학적 지평으로만 재단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현재 실제로 『통섭』의 저자인 윌슨에게 가해지는 일각의 비판이기도 하다. 질리언 비어는 『다윈의 플롯』에서 무엇보다 ‘문화적 기억’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역시 그 책의 한 장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현재 ‘밈’, 즉 ‘문화적’ 유전자가 점점 중요성을 띠게 되는 현상과도 괘를 같이 한다. 이 모든 노력이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받지 못하는 ‘통합’의 함정에 혹여나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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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플롯 - 빛나는 통찰력으로 밝힌 소설과 진화론의 관계
질리언 비어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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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학문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을 허물자는 취지에서 이뤄졌던 그간의 학제간 연구 바람 자체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배경으로는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치로 내건 문화연구의 발흥이 있었고, 최근의 이른바 ‘실용주의’ 학풍과도 다소 기이하게 맞물리고 있는 추세이다. 윌슨의 『통섭』이 출간된 이후 ‘통합학문’을 지향하는 목소리는 각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담론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최근 출간된 『다윈의 플롯』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들이다. 키워드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과 19세기 영문학의 관계


『다윈의 플롯』은 다윈의 진화론과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 두는 미국의 학풍과는 달리 영국의 영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사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방식을 병행한다.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권위자인데, 구체적으로 조지 엘리엇과 토머스 하디의 작품들을 파고든다. 그는 말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 소설을 연구하다 다윈의 진화론이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다윈이 쓰는 언어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사회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질리언 비어는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용어 자체의 흥미로운 모호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 용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형용모순이다. “자연이라면 부자연 또는 인위의 반대말이 아닌가? 또 선택이라면 누가 선택한다는 뜻일까?”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이 용어의 ‘긴장감’에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바로 여기서 과학자 다윈의 ‘문학적’ 혹은 ‘창조적’ 면모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로부터 왜 그토록 지적이고 정서적인 흥분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질리언 비어 스스로 이 책에서 자신의 논증의 중요한 전제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진화론이 소설의 이야기와 구성에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시간이나 변화의 개념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으므로 문학작품 속 이야기의 문제와 과정과도 ‘내재적인 친화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이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경계-자연이냐 선택이냐-의 문제’, 다시 말해 ‘범주화를 향한 열정’은 종국에는 ‘플롯의 불안정함’으로 귀결된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소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예견했듯이 오늘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심지어 모든 字句를 원본과 그대로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같은 책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물 복제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복제양 돌리와 같은 경우도 저자가 보기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이 ‘불안정함’이야말로 “현 시기의 심미적 감수성”이다. 이제 창조적인 작가들은 과학적인 재료를 자신의 ‘상상력’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질리언 비어는 흥미로운 언급을 남긴다. 민담설화학자 “프로프(Propp)가 형태론의 類比를 통해 정립한 불변의 민담 문법이 여전히 통용될까?” 


통합론적 시각의 의미와 한계


통합 학문적 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당하다. 다만 한 가지 우려는 ‘문화’로 일컬어지곤 하는 인간 역사와 사유의 결과를 혹여나 단순히 생물학적 지평으로만 재단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현재 실제로 『통섭』의 저자인 윌슨에게 가해지는 일각의 비판이기도 하다. 질리언 비어는 『다윈의 플롯』에서 무엇보다 ‘문화적 기억’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역시 그 책의 한 장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현재 ‘밈’, 즉 ‘문화적’ 유전자가 점점 중요성을 띠게 되는 현상과도 괘를 같이 한다. 이 모든 노력이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받지 못하는 ‘통합’의 함정에 혹여나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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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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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알튀세의 ‘반인간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전후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오랫동안 서구 지성사의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인문주의(Humanism)의 몰락의 속도는 가팔랐다. 그 여파는 주지하다시피 현재진행중이다. 단적으로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처지만 살펴보더라도 異論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과, 정년 보장은커녕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없이 시간강사나 기껏해야 겸임교수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를 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 앞에서 한숨짓기가 일쑤다. 보스턴대 명예교수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을 다룬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는 전술한 시대적 조류와는 걸맞지 않게 ‘인문주의의 부활’을 역설하고 있다.

 

反인문주의의 역사적 연원은 얕지 않다. 1960~7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대학의 인문학부에 프랑스 이론이 출현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널리 퍼진 반감 등의 영향으로 반인문주의의 기운은 여지없이 미국의 지성계를 강타하기에 이른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사유 전반을 관류하는 ‘인간-저자의 죽음’이라는 핵심적인 테제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전까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온 ‘위대한 문학 텍스트의 중심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서, 베르길리우스, 단테,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망라하는 유서 깊은 인문학 도서목록의 질이 이제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의 진정한 주제가 ‘말 그대로의 인문주의’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전통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받되 그것을 ‘매우 선택적으로만 이용’하겠다고 밝힌다. 그가 강조점을 두는 것은 현재적 맥락의 인문주의이다. “인문주의의 현재성을 재숙고하고 재검토하고 재정식화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사이드는 덧붙인다. ‘변화는 곧 인간의 역사’ 자체인데 이 역사야말로 ‘인문학의 근본 전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변화’란 “인문주의라는 관념을 구성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 결함”으로, 구체적으로는,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고 있는 ‘우리’라는 범주 기준을 전제한 것이다. 미국과 같이 근본적으로 다문화 사회인 곳에서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인 우리”의 개념이야말로 해체되어 마땅한 것이 아니냐고 사이드는 주장한 바 있다.


사이드적 인문주의의 종착점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고 하는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에로 향한다. ‘추방의 장소’라는 표현이 구사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사이드 스스로 그 장소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 생각한 것과 맞닿는다. 그리고는, 필연적으로 ‘실천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의 하워드 진이라면 사이드의 예술론을 틀림없이 명백한 ‘자기기만’ 행위로 비판할 것이다. 일례로 영화 「대부」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영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자객, 암살자, 폭력배조차 결국에는 마치 선한 사람인양 미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에서 드러나는 하워드 진의 인문주의적 태도는 굉장히 간결하고 명쾌하다. 이는 시대의 양심으로 대변되는 그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이 책이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의 대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바사미언과의 현장감 있는 인터뷰 형식의 외피를 띠고 있는 것에 연유한다. 하워드 진의 문화예술론의 핵심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에 접근”해보려는 것에 있다. 방점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에 찍힌다.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주는데, 재미없는 수차례의 강의보다 한 편의 예술작품이 사회의 핵심을 보다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옹호하는 문학작품의 전형이 여론조작과 언어조작 ― ‘이중 언어’와 ‘이중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미래 전체사회를 비판한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류의 작품이 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워드 진의 예술론은 군더더기가 없는 만큼 적지 않은 논쟁의 씨앗을 품고 있다. 자연스레 문학의 가치를 외재적 측면에만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활자화된 글의 가치’만을 중시한 나머지 영상 미디어의 존재론적 가치를 손쉽게 폄하한 태도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오늘날 인문주의의 부활 담론을 살펴볼 때 상당부분 ‘정체성’ 연구에 중점을 둔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 유행” 사조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단어-회전과 태평한 전문성이라는 공장”의 엘리트주의적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심심찮은데,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전언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주의적 지식에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임시적이고, 의문스럽고 논쟁적인 무언가”가 항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이야말로 ‘비극적 결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극’은 다른 한편 “인간의 의지와 행위능력이 이뤄낸 형식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인문주의의 또 하나의 얼굴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문주의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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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 마티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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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의 ‘반인간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전후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오랫동안 서구 지성사의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인문주의(Humanism)의 몰락의 속도는 가팔랐다. 그 여파는 주지하다시피 현재진행중이다. 단적으로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처지만 살펴보더라도 異論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과, 정년 보장은커녕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없이 시간강사나 기껏해야 겸임교수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를 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 앞에서 한숨짓기가 일쑤다. 2003년 타계한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은 전술한 시대적 조류와는 걸맞지 않게 ‘인문주의의 부활’을 역설하고 있다.

 

흔히들 사이드 하면 본능적으로 ‘오리엔탈리즘’ 담론만을 떠올리기 일쑤이고,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오직 ‘오리엔탈리즘’에만 쏠리는 결과를 낳았다.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은 대중의 그 같은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는지를 그의 폭넓은 ‘인문주의자적’ 면모를 통해 증명한다. 이 책은 생전에 백혈병 말기의 사이드가 “화학치료와 수혈을 강도 높게 받던 시기”에 펴낸 마지막 책으로, 2002년과 2003년에 걸쳐 각각 컬럼비아대와 영국의 캠브리지대에서 했던 강의들을 묶은 것이다.

 

反인문주의의 역사적 연원은 얕지 않다. 1960~7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대학의 인문학부에 프랑스 이론이 출현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널리 퍼진 반감 등의 영향으로 반인문주의의 기운은 여지없이 미국의 지성계를 강타하기에 이른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사유 전반을 관류하는 ‘인간-저자의 죽음’이라는 핵심적인 테제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전까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온 ‘위대한 문학 텍스트의 중심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서, 베르길리우스, 단테,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망라하는 유서 깊은 인문학 도서목록의 질이 이제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의 진정한 주제가 ‘말 그대로의 인문주의’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전통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받되 그것을 ‘매우 선택적으로만 이용’하겠다고 밝힌다. 그가 강조점을 두는 것은 현재적 맥락의 인문주의이다. “인문주의의 현재성을 재숙고하고 재검토하고 재정식화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사이드는 덧붙인다. ‘변화는 곧 인간의 역사’ 자체인데 이 역사야말로 ‘인문학의 근본 전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변화’란 “인문주의라는 관념을 구성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 결함”으로, 구체적으로는,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고 있는 ‘우리’라는 범주 기준을 전제한 것이다. 미국과 같이 근본적으로 다문화 사회인 곳에서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인 우리”의 개념이야말로 해체되어 마땅한 것이 아니냐고 사이드는 주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혹은 아이러니한 것은, 사이드와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구조주의적 반인본주의자들이나 리오타르 등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정작 이를 두고 인문주의의 파괴 혹은 해체의 근거로 삼는다. 이에 대한 사이드의 반론은 곱씹어볼만하다. 인문주의는 다만 그저 ‘잘못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주의는 ‘악용’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인문주의의 종언 담론은 사이드가 보기에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울한 사건을 소란스러울 정도로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사이드적 인문주의의 종착점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고 하는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에로 향한다. ‘추방의 장소’라는 표현이 구사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사이드 스스로 그 장소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 생각한 것과 맞닿는다. 그리고는, 필연적으로 ‘실천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의 하워드 진이라면 사이드의 예술론을 틀림없이 명백한 ‘자기기만’ 행위로 비판할 것이다. 일례로 영화 「대부」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영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자객, 암살자, 폭력배조차 결국에는 마치 선한 사람인양 미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주의의 부활 담론을 살펴볼 때 상당부분 ‘정체성’ 연구에 중점을 둔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 유행” 사조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단어-회전과 태평한 전문성이라는 공장”의 엘리트주의적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심심찮은데,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전언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주의적 지식에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임시적이고, 의문스럽고 논쟁적인 무언가”가 항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이야말로 ‘비극적 결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극’은 다른 한편 “인간의 의지와 행위능력이 이뤄낸 형식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인문주의의 또 하나의 얼굴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문주의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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