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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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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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린 흙을 밟을 때, 반쯤 얼어 있는 땅의 감촉이 운동화 바닥을 통과해 발바닥에 느껴지는 순간을 그녀는 좋아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태양의 빛은 조금 더 창백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홀러나온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며 차츰 가벼워진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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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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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없고 무정한 담임선생의 위임으로 대개의 경우 그 같은 규칙 위반의 감찰권과 처벌권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석대는 아이들의고발이 있을 때마다 겉으로는 공정하게 그 권한을 행사했다. 예를들면 입에 혀같이 노는 자기 졸병들도 나하고 같이 걸리면 여럿 앞에서는 일단 똑같은 벌을 주었다. 그러나 그와 상대만이 알게 되어있는 집행에서는 나와 달랐고, 그게 나를 더욱 이갈리게 했다. 다같이 벌로 변소 청소를 하게 되어도 그쪽은 대강 쓸기만 하면 합격판정을 내려 집으로 보냈지만, 나는 물로 바닥의 때까지 깨끗이 씻어내야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때가 바로 그랬다. - P45

처음의 그 맹렬하던 투자는간 곳 없어지고, 무슨 한처럼 나를 지탱시켜 주던 미움도 차차 무디어져 갔다. 그리하여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은근히 내 굴복을표시하기에 마땅한 기회를 기다렸지만 괴로운 것은 그런 기회조차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 P47

샘솟는 내 눈물로 이내 뿌옇게 흐려진 그 얼굴 쪽에서 다시 그런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짐작컨대 그는 내 눈물의 본질을 꿰뚫어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서 이제는 결코 뒤집힐 리 없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나를 그 외롭고 고단한 싸움에서 풀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너그러움이 오직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이튿날 나는 그 감격을 아끼던 샤프펜슬로 그에게 나타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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