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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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없고 무정한 담임선생의 위임으로 대개의 경우 그 같은 규칙 위반의 감찰권과 처벌권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석대는 아이들의고발이 있을 때마다 겉으로는 공정하게 그 권한을 행사했다. 예를들면 입에 혀같이 노는 자기 졸병들도 나하고 같이 걸리면 여럿 앞에서는 일단 똑같은 벌을 주었다. 그러나 그와 상대만이 알게 되어있는 집행에서는 나와 달랐고, 그게 나를 더욱 이갈리게 했다. 다같이 벌로 변소 청소를 하게 되어도 그쪽은 대강 쓸기만 하면 합격판정을 내려 집으로 보냈지만, 나는 물로 바닥의 때까지 깨끗이 씻어내야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때가 바로 그랬다. - P45

처음의 그 맹렬하던 투자는간 곳 없어지고, 무슨 한처럼 나를 지탱시켜 주던 미움도 차차 무디어져 갔다. 그리하여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은근히 내 굴복을표시하기에 마땅한 기회를 기다렸지만 괴로운 것은 그런 기회조차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 P47

샘솟는 내 눈물로 이내 뿌옇게 흐려진 그 얼굴 쪽에서 다시 그런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짐작컨대 그는 내 눈물의 본질을 꿰뚫어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서 이제는 결코 뒤집힐 리 없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나를 그 외롭고 고단한 싸움에서 풀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너그러움이 오직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이튿날 나는 그 감격을 아끼던 샤프펜슬로 그에게 나타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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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힘 중에서 싸움 솜씨에 못지않게 많은 부분이 담임선생님의 신임에서 왔다는 걸 알고있었다. 청소검사, 숙제검사에 심지어는 처벌권까지 석대에게 위임하는 담임선생님의 그 눈먼 신임이 그의 폭력에 합법성을 부여해그를 그토록 강력하게 우리 위에 군림하게 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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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딘가로 숨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 P11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 P21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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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 P23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흔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 P47

어스름이 내리자 새들이 울음을 그쳤어. 낮에 울던 풀벌레들보다 가냘픈 소리를 내는 밤의 풀벌레들이 날개를 떨기 시작했어. 완전히 어두워지자,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에 닿아왔어. 어른어른 서로의 언저리를 어루만지다 우리는흩어졌어. 어쩌면 우린 낮 동안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머무르며비슷한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 같았어. 밤이 되어서야 몸의 자력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나올 힘을 얻은 것 같았어. 그들이 다시 오기 직전까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졌고, 서로를 알고 싶어했고,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 P52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 P69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같은 순간을 외면했다. - P72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도는 것.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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