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은 기실 석대가 내게서 빼앗아 갔던 것들이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나는 내 것을 되찾은 것뿐이고, 한껏 석대를 보아 준댔자 꼭 필요하지도 않는 곳에 약간의 이자를 보태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굴절을 겪은 내 의식에는 모든 것이 하나같이 석대의 크나큰 은총으로만 느껴졌다. - P54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으나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 P56
그림 솜씨가 시원찮은 석대를 위해서였는데, 그 바람에 ‘우리들의 솜씨‘ 난에는 종종 내 그림 두 장이 석대의 이름과 내 이름을 달고 나란히 붙어 있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석대가 원해서 그랬는지, 내가 자청해서 그랬는지조차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강요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짐작으로는 그의 왕국에 안주한 한 신민으로서 자발적으로 바치는 조세나 부역에 가까운 것인 성싶다. - P56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선생의 그 같은 태도는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담임선생님이 석대의 편이 아니라는 것, 전번 담임선생처럼 석대를 턱없이 믿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자, 그 전해 내가 그렇게 움직여 보려고 해도 꿈쩍 않던 아이들이 절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감히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해도 조그마한 반항들이 심심찮게 일었고, 무슨일이 일어나도 석대보다는 담임선생님을 먼저 찾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 P66
그런 석대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전의 석대는 키나 몸집이 담임선생님과 비슷하게 보였고, 따로 떼어놓고생각하면 오히려 석대 쪽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 교탁 위에 꿇어앉은 석대는 갑자기 자그마해져 있었다. 어제까지의 크고 건장했던 우리 반 급장은 간곳없고, 우리 또래의 평범한 소년 하나가 볼품없는 벌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비해 담임선생님은 키와 몸집이 갑자기 갑절은 늘어난 듯했다. 그리하여무슨 전능한 거인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이 또한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같은 느낌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어쩌면 담임선생님은 처음부터 그걸 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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