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품절


작자는 칼의 노래로 유명해진 김훈작자이다.이번에는 륀순감옥을 답사하고 글을 썼다고한다.그의 작품이 진중하고 서사적이지만 이번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다.
칼의 노래보다 작품구성은 작자의 말대로 미진한 느낌이 있다.하지만 뤼순을 향하는 여정중에 압록강을 넘으며 안중근이 느꼈을 통한이 느껴졌다 .
한국의 이웃중에 어찌보면 일본보다 더 비난받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일제식민지시대는 19세기 후반에 조선이 세계제국주의와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가된 경우지만 조선왕조 몰락의 초반은 한마디로 못난 군주들과 유교의 경직성때문에 일본에 KO패당한거다. 문제는 식민지국권침탈의 발단과 진행에 있다. 고종은 바보가 아닌가?준비된 근대화된 일본과 맞서서 승산이 없다는 걸 몰랐었나? 의병도일본의 국권침탈을 굴복못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을텐데 굳이 항전을 택한 이유가 뭘까? 자신의 치부와 권력에만 집착하며 근대화를 위해 한일이 없다.
지금같으면 강대국에 빌붙어 로비라도 하면서 최악의 결과는 피하려고 하는게 이성적인 행동이였다.
고종본인은 사대부의 정점에 선 군주가 지배자로 피지배층의 고통을 모르지않았나 여긴다.의병으로 막을 일도 아니었고 냉정히말해 웃기지말라고해라.승산이 없는데도 뭘 믿고 싸운다고 하는지 나원 참 한심하다.한일합방후 일제의 호의에 의존하며 대한제국 황실이 보인 행태는 이왕한명을 제외하고는 추태와 매국에 가깝다.
반면 이토는 영국유학후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그는 일본 근대화를 주도한 지식인이었고 제국헌법을 기초한 선각자였다.그도 처음부터 조선의 병합을 원하지않았다.일본군부가 입김이 강해져 제국주의가 군국주의가 된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다.그는 다만 러시아를 견제하기위한 영국의 요구대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길 원했다.제국주의의 명분이 강대국이 약소국을 보호한다는 핑계였는데 내면은 자국의 실리대로 이용하자는 것이다.이토는 영국에서 배운대로 제국주의의 룰대로 철저히 자국의 실리를 챙겼다.
안중근도 동학운동토벌전까지 보수적인 유생에 가까왔다.토벌후 조정의 처사에 분노한 그가 느꼈을 배신감은 그의 인생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왕은 깊숙한 궁에서 전황이나 보고받으면 되지만 깊은 궁중에서 호의호식만 하고 지내는 이가 전장의 병졸들과 아사지경의 민초들의 고통을 알 리없었다. 구한말 초근목피하는 이들의 굶주림과 고생을 알았을까?
위정자들의 근대화를 거부한 무지로 희생된 것은 백성들이었다.국토가 일제에 유린당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도록 방치한 건 어리석은 조정과 군주 유교명분에 집착한 사대부대신들이었다.자존심이 그리 중요한가? 조정대신들이란 자들이 하는 소리를 보면 고관대작이란 자들은 명분좋아하고 허례에 얽매여 실속이라고는 없는 ,유교가 씌운 망령같다.때론 조선이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가 된 것도 이런 골수성리학자들의 유교관때문인 것같다.실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명분내세우기 좋아하는 자들로 찬 조정에서 탁상공론만 하다 나라꼴이 어찌되었는가? 황국협회따위나 만들어 독립협회를 탄압하며 헛소리만 지껄였다.
안중근도 하얼빈망명후 근대화에 뒤처진 조선의 한심함을 절감한 듯싶다.군주와 사대부들이 피지배층을 이용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이토는 영리하고 유능했다.일본이 국제무대에 나서 근대국가로 인정받고 열강에 끼여 국력을 키워갈때 이토는 그 중심이었다.영악한 정치인이었던 이토는 강국들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일본을 국제무대에 아시아의 강호로 데뷔시킨 뒤 실익을 챙겨나갔다.일본인들에게는 이토가 메이지유신이후 근대화의 중심이었다지만 어쩌면 몰락 사무라이무리의 중심이었던만큼 그가 이끄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흘러갈 요인은 다분했던듯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애초부터 조선을 병합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혹자는 안중근의 이토의 사살이 조선의 병합을 촉발했다고 비판하기도한다.
두인물 모두 양국에 중요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동양평화와 조선의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는 서로 양립할수가 없었다.안중근도 천주교신자였으니 고민한게보인다.카톨릭신부는 그에게 살인을 자제하라 충고했으나 그가 한 거사는 한민족이 살아있다는 외침이였다.안중근본인뿐아니라 사형수의 가족으로 몰린 어머니와 아내의 의연함이 놀랍다.모친의 편지를보면 카톨릭신자였으니 아들이 이토의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는데도 충격보다 대의를위해 결연히 받아들이는 비장함이 엿보인다.
법정에서 안중근이 주장한 이토암살의 근거는 동양평화를 위협한 것이었다.현재 일본이 자위대확장을 통해 보통국가화하고 있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나 세계의 정의는 약소국에 있지않았다.그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고해성사를 해준 신부까지도 신부직이 박탈되는 결과가 이어졌다.베델신부는 교황청에 법적조치를 통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안중근은 조선이 해방때까지 그렇지 못했다. 죽고나서도 35년뒤에나 명예를 회복한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어찌 이리 현대 한국정치는 백년전과 닮았을까?아니 정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지금의 대한민국국회도 수백년전 국권침탈의 과정과 많이 닮았다.현대는 실리의 시대는 이렇게 직접적인 식민지화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도자를 잘 세워야 국가가 잘 경영된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안중근과 이토..안중근의사는 억울하고 살인죄의 사형수로 매도된게 약소국국민의 비애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백여년전 일본의 이토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지 몹시 씁쓸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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