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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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봉 그는 대단한  천재임이 틀림없다.불씨잡변부터 경제문감,각종병서에 이르기까지,.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유민을 안정시킨다는건 그시대 어느통치자도 생각지 못했다.대개의 통치자가 사욕을 채우거나 국고만을 생각하여 민중에 대한 수탈만을 추구한 것에 비하면 그는 지배층에서도 질적으로 다른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런 그가 왜 역성혁명을 -한마디로 쿠테타를 일으켜 왕조를 건설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먼저 그의 출신을 생각해봐야한다.그의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고려말의 벼슬아치였지만 어머니는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아내도 출신상의 약점으로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이때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과 그에  못지않게 불교가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장생고부터 고리대까지), 백성이 불교에 귀의하여 군역을 기피함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부재로 나타난 국가재정및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찰경제의 확장과 문란이 고려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배척을 주장하였다.

사실 정도전이 아니라도 일찍부터 사원의 팽창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관점은 중국의 남북조시대 주무제때부터 존재했다. 당의 현종도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조치를 여러번 한 적이 있다.불교신자인 정도전이 이를 주장할만큼 고려말의 사원의 폐단은 극심했다.
당연히 여말의 혼란상에서 그는 유배와 파직 ,배척에 시달렸다. 결국 그가 주창한 것은 새왕조의 창립이었다.

 정권을 갈아치우는 혁명에 필수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이념과 힘이다. 먼저 이념은 민생을 구제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어야하고   백성을 끌어들일 수 있는 논리가 더  우월하다. 다음으로 힘은 병력이거나 군사력이다. 대체로 혁명이라면  여기에는 많은 백성의 희생이 수반되었기에  그러므로 정도전도  혁명의 방식 중에서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군사의 동원이 가장 좋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와 결합한 것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성계의 인성을 믿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북면병마사인  그가 가진 병력 때문이었다

1383년, 조선의 건국은  사실상 성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성계의 혁명 성공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인물이 바로 정도전과 이방원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하나가 없었더라면 이성계의 혁명은 실패했을 것이다.
  토지개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개혁은 놀라운 일이다...이는 주나라를 정치모델로 하여  신권정치를 꿈꾸었던 정도전의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 이방원정도전을 제거하게 된다..이방원정도전의 운명을 완벽하게 갈라 놓은 것은 다시 요동 정벌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무렵 명나라도 주원장이 독재를 강화하고 있었다.정도전을 포박하여 압송하라는 명나라의 요구를 묵살하고 강행한  요동정벌및 사병혁파로  다시 운명의 저울은 방원에게 기울었고 이로써 이방원정도전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

 정도전과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할 당시에는 뜻을 함께 했던 동지였으나, 새왕조에 대한 이념이 달라서 적이 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방원을  동지로 여기고 자신을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주인공이라고 여겼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그의 역할은  주군에 대한 신하의 본분에 그쳐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다름 왕인 세자책봉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서 그들은 정면 충돌하고 만다.

  이성계는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 하여 (이는 삼봉의 뜻이기도 했지만,) .장성한 아들들의 분노를 샀고  이러한 결정에 가장 크게 반발한 이가 이방원이었다.  결국 이방원이 정도전, 남은, 방번, 방석을 제거 하고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함으로 조건은 완전히 군주독재의 전혀 다른 왕조로 변질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왕조의 역사를 살펴볼 때, 피보다 더 진한 것은 부모자식간에도 형제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권력이었다.

 결국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살해되고 시신이 저자거리에 효수되는 운명을 겪는다 . 아들들까지 자살 , 살해되고 멸문지화를 입은 그의 가문이  사면되고 복권된 건 먼 훗날의 일이다.
그가 꿈꾸던 주나라왕조 재상중심의 국가가 섰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까...분명한건 고인 물은 썩고 부패한 권력은 무너진다는 것이다..후대에도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의 통치기반은 정도전의 사상위에 입각해 재시도된 많은 일들이 남았다.태종을 비롯한 역대 조선의 군주들은 그를 역신으로 몰아 죽이고도 머리만큼은 이용한 것이다.아쉬운 점이라면 그토록 천재적인 두뇌로 백성을 생각한 정책들이 군주독재의 수단으로 전략한 것이 애석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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