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작품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고 사안이었는데 <경향신문>에 신형철 님이 이런 글을 썼더군요. 잘 읽었고요. 지인들끼리 이곳에서 관련해서 토론을 해볼까 하고요. 발제문을 대신해서 올린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쓴 글도 검색이 되더군요. 일단 이 글부터..

[문화와 세상] 박근혜 혹은 안티고네 신형철 | 문학평론가 2012-09-27 21:11:33ㅣ수정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72111335&code=990100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관련 기자회견을 보면서 느낀 비애가 이 글을 쓰게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말투는 거의 기계적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역사관이라는 것이 바뀔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녀에게 그 기자회견은 고통스러운 자기 부정의 연극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좌파인사들의 전향선언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군부독재 시절의 저 악명 높은 사상전향제도는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 준법서약제도로 대체됐는데, 군부독재의 퍼스트레이디가 이제와 자기 신념을 일부 부정하며 전향을 선언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기자회견을 보고 난 뒤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소위 '오이디푸스 3부작'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이디푸스 3부작'은 <오이디푸스 왕>,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가족사 비극이다. 오이디푸스는 타고난 지혜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되지만,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부친살해와 근친상간 때문에 왕국이 도탄에 빠졌음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찌른 뒤 왕국을 떠난다. 추방된 맹인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최후를 맞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이는 그의 맏딸 안티고네였다.

3부작에서 2부까지의 내용이 이와 같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이야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를 떠올리기 전에 내가 두 부녀의 삶을 세부까지 일일이 대조해본 것은 물론 아니다. 두 아버지 모두 한 나라의 왕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다가 추락했지만, 테바이의 왕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처벌했고 유신체제의 대통령은 부하의 손에 암살됐다. 이것은 큰 차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하건 사랑과 존경을 포기하지 않은 두 딸은 닮았다. 박근혜 후보에게서 눈 먼 아비를 부축한 채 벌판을 떠도는 안티고네를 연상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안티고네>까지 읽은 이라면 이와 같은 비교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를 지적하게 될 것이다. 아비의 저주 탓인지 그의 두 아들은 권력을 놓고 전쟁을 벌이다 모두 죽는다. 두 아들 중 하나는 적국에 투항해 조국을 침공한 터다. 배반자에게까지 장례의 예를 갖춰줘야 할 것인가. 테바이의 왕 크레온은 이를 금지하지만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보다 친족 간의 인륜을 따르겠다며 두 오빠를 모두 매장하려 한다. 그녀는 끝내 처단되지만, 이 와중에 크레온은 부인과 아들을 잃었으니 그녀의 패배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안티고네가 비극적 영웅이라는 점은 대개 부정되지 않는다. 물론 배반자를 용인할 수 없다는 크레온의 단호한 태도는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불가피한 선택이라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안티고네를 죽게 한 그의 처사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가 독재자에 가까운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자면 그는 국회의 동의를 얻지도 않은 채 칙령을 공표했고,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안티고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안티고네가 영웅인 것은 그와 같은 독재에 저항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레온의 두 가지 조처에서 유신체제 하의 악명 높은 긴급조치와 사법살인으로서의 인혁당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단호히 선을 긋지 않고 이를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안티고네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안티고네를 민주투사라 볼 수 있다면 그때의 안티고네는 (말장난이 용서된다면) ‘안티(anti)근혜’라고 해야 옳다. 유신체제가 조국의 배신자라 낙인찍은 당시의 희생자들을 온전히 매장하는 데 헌신한다면 그때 박근혜 후보는 비로소 안티고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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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2012-11-2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선거판 참 웃기지요. 프레임이라고, 아전인수식 프레임을 짜놓고 객관적인듯 몇몇 신문들은 몰아가고 식당에서 그런 무가로 들어왔을 두꺼운 신문들 보면 브라우니! 태워! 하고 싶은 심정..
 

'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이라는 부제를 가진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도서출판 길)에서 한정숙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속 여성들을 논문에 담으면서 메데이아가 놓인 처지를 분석한다('에우리피데스 극 속의 여인들-메데이아, 파이드라, 바코스의 여신도들').

알다시피 그리스 고전 비극 3대 작가 가운데 가장 나중에 태어난 "에우리피데스는 여성 등장인물들에 대한 복합적 묘사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비극의 완성자의 작품답게 두 친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아버지로서의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들들에게 사랑을 받을 아버지의 권리를 앗아가면서까지 복수를 실행에 옮긴 메데이아의 '범행' 동기를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여 살피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정숙의 글에서 메데이아가 이방인 여성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안아야 하는 점을 살핀 점을 흥미롭게 읽었다.

 

 

 

 

 

 

 

 

 

 

 

 

*가운데 비극걸작선에는 세 작가의 작품들이 두 편씩 실려 있는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실려 있다. 소포크레스의 <안티고네>도 실려 있다.

콜키스 여인인 메데이아가 이국 땅 코린토스의 여인들(코러스장과 코러스들)을 상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말한다. 코러스로 이들 여인들을 설정했다는 극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메데이아는 고국에서 왕녀였으나 지금은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어디에서나 이방인들은 시민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고 소외된 존재이다. 가령, 국내의 경우도 귀농한 가족을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것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뒤농 10년 만에야 청첩장을 받았다는 한 후배의 얘기가 와 닿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소외된 존재이다. 더구나 정권 회복을 기도하다가 이아손도 이방인 신세, 그러나 그는 코린토스 왕의 궁정에서 왕녀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메데이아에게는 두 자녀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 고립무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 말인가!

한정숙 님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한국사회의 다문화가정의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을 때인 듯하다. 비극 <메데이아>를 읽으면서 또한 한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대체로 우리나라의 농촌총각들과 결혼해서 살아가는 외국인여성이 처한 현실을 생각한다. 언어의 소통 문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남성(부권) 중심 사회이기에, 더구나 농촌의 남자들이 좀더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전제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안고 살아가는 어려움에 이주민 여성이라고 안아야 하는 중첩된 문제가 예견되고, 그러한 갈등이 폭발한 사건들이 가끔 뉴스가 되곤 한다.

"여성 일반 중에서도 이방인 여성인 메데이아는 코린토스 여자들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다. 여자들은 비록 지위가 낮더라도 일반적으로 사적 영역에서 친한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위안을 얻곤 하지만 부모 형제를 떠나 오직 남편 한 사람만을 의지한 채 코린토스로 온 메데이아에게는 이러한 가능성마저 없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사고무친, 고립무원한 상황에 있다."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뻔한 살림에 친정마저 멀리 있는 다문화가정 주부들은 이러한 존재 자체가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서 혹은 획득하기 위해 주한 미군과 결혼하였던 우리네 누나 언니들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 상당수가 결국은 버림을 받아 극도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미국 현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한 목사님이 방한하여, 그녀들이 주로 목회 대상이라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눈물겹고 울분이 일게 했으며 놀라웠다.

메데이아의 경우는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씌여, 그놈의 사랑 때문에 조국을 버리고 아버지를 부정하고 오빠마저 살해하여 토막냄으로써 아버지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등 씻을 수 없는 죄과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왕국이라는 친정이 있지만 돌아갈 수가 없다.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울고 또한 사랑 때문에 또 울어야 하는 메데이아. 메데이아에게 (남편을 두고) 코러스 장(여인들 중)에게 하소연하는 다음 대사를 보자.

 

"하지만 그대는 나와 처지가 달라요. 그대에게는/ 여기 고향 도시와 아버지의 집과 인생의 행복과/ 많은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외톨이로/ 고향 도시도 없고 이민족의 나라에서 납치되어 와/ 남편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어요./ 이런 폭풍을 피할 수 있는 항구가 되어줄/ 어머니도 오라비도 피붙이도 없어요. (251~268행)

 

비극 메데이아를 비롯해서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등장하는 신화의 부분들을 촘촘하게 살펴지만 "납치되어 와"는 (격분한 상태에서 하는, 시쳇말로) 좀 오버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아손 자신도 조국에서 추방되어 이방인으로 사는 마당에 동병상련이라는데 아내를 잠싸주지는 커녕 자기는 새장가를 드는데, 그것도 이미 있는 두 아들이 꿀리지 않고 살아가도록 배다른 형제들(왕손)이 필요하다는 얼토당토 않은 핑계까지 대고 있으니 화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비극에서 한 가지 주목할 곳은 그녀의 한탄이 코린토스 여인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지점이다(코린토스 여인들이 코러스들이다). 코린토스 여인들은 자기네 공동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의 땅에서 소외되어 있고, 그러므로 출신지역과 지위는 다름에도 메데이아와 코린토스 여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인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더불어 슬품을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다. 귀농을 한 선배의 부인 곧 형수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을 했는데, 농촌지역 다문화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남자들은 다 그래, 하면서 남편들 흉을 보는 가운데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얘기.. 그러나 생각해보면 비단 한국의 남자들과 살아가는 외국인 여성들만의 심정이겠는가! 무슨 이유에서건 친정이라는 뒷배, 때론 힘이들면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피붙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 아내의 심정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아손은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남자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 메데이아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떠나온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아손의 고향(시댁)에서는 국왕 펠리아스의 딸들을 속여 왕을 죽이게 했다. 해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녀에게는 말 그대로 퇴로(출구)가 없다. 이런 그녀 앞에 나타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비난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메데이아가 자기를 도와준 것은 단지 그녀가 이아손 자기에게 반해서 그런 것일 뿐이고, 자기와 결혼한 덕분에 그녀는 야만의 땅 콜키스에서 문명의 땅인 그리스로 와서 정의와 법을 배웠으며 지식이 많은 현명한 여성이라는 명성까지 얻게 되었으니, 오히려 자기가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베푼 셈이라고 주장한다. 메데이아가 외국 출신 여성이라는 것을 빌미로 이아손은 그리스 중심주의적 문명론을 들먹이며 그녀를 배은망덕한 오랑캐 취급을 하여 모욕한다.

 

"메데이와와 이아손 사이의 대화는 이른바 문명-야만 구분에서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결혼한 후 성적 매력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긴장된 관계가 어떤 모습을 띌 수 있는지 보여준 다음, '거래로서의 결혼'의 내부사정을 좀더 세밀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한정숙)"

 

분명 한국의 다문화가정의 문제는 '거래로서의 결혼'에서 깊이 연구되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내국인들끼리의 결혼도 '거래로서의' 측면으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나쁜남자' 이아손을 좀더 지켜보자.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질투에 사로잡힌 나쁜 여자로 비난한 다음, 자기가 새 아내를 맞이하기로 한 것을 열심히 옹호한다. 그것은 자기의 신분상승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와 메데이아 사이에 난 자식들의 앞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 앞서 언급했듯이 . 그는 코린토스 왕녀와 결혼하여 새로운 자녀를 얻으려고 하는 이유를 이렇게 강변한다.

 

"그리고 나는 자식들을 내 가문에 어울리게 양육하고,/ 당신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형제를 붙여주고,/ 그들을 모두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고, 그들을 모두/ 한 씨족으로 묶음으로써 행복해지고 싶었소. 당신에게/ 아이들은 더 필요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태어날 아이들로/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소."(562~567행)

 

메데이아의 머리꼭지가 확 돌아버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아손은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냐고 묻는다. 코린토스 왕은 이미 메데이아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이아손은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아손은 모험하는 시대의 영웅이었으나 약자인 여성의 처지를 헤아리고 대화로 아루만지는 다정함이랄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가지지 못하였다.

 

"당신도 새 신부 때문에 기분이/상해 있지 않다면 '아니오'라고 말하겠지요. 당신들 여자들은/어떤가 하면, 결혼생활만 원만하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생각하고, 결혼 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가장 훌륭하고/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요. "


여성 전체로 일반화하면서 사실은 질투가 아니냐, 왕녀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라면서 적반하장, 그리고 결정적인 대사를 날린다.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식들을 낳고,/여자 같은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으련만!/그러면 인간들에게도 불행이라는 것이 없어질 텐데!"(573~575행)


아이를 낳는 것만 아니라면.. 결혼도 여자도 필요없다는 식인데, 그렇다면 새로운 결혼도 앞서 말했듯이 출산을 위해서라는 얘기인가! 갈수록 태산이다. 어쨌거나 문제제기가 하고 만 것 같은데, <메데이아>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 제기할 발제 형식의 글을 미리 올렸다. 토론 결과로 다시 글을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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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 뒤 페르시아군은 대부분 그리스반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 휘하의 페르시아군 정예부대는 그리스에서 겨울을 나고, 그 이듬해인 기원전 479년 보이오티아 지방의 플라타이아이에서 벌어진 지상전에서 패한 뒤에야 페르시아로 철수했는데, 이 전투에서 파우사니아스는 그리스 군 총사령관이었다.
=파우사니아스를 좀더 익숙하게 소개하려면 다음과 같이 얘기해야 한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테의 왕 레오니다스 테르모퓔라이에서 전우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러한 레오니다스 왕의 아들인 플레이스타르코스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아직  미성년자였다. 그래서 그의 사촌인 파우사니아스가 섭정을 하던 참이었고,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이었다.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페르사이군을 이끈 마르도니오스가 죽고.. 플라타이아이의 아이기나인들 군영에서 람폰이라는 사람이 파우사니아스를 찾아와, 이미 죽은 마르도니오스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 복수를 하라고 제안한다. 마르도니오스와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퓔라이서 전사한 레오니다스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았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단호하게 "그런 짓은 헬라스인들이 아니라 야만인들에게나 어울리며, 야만인들이 그런 짓을 저질러도 우리는 불쾌하다"며 이미 복수는 끝났다고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유치하다는 차별화다. (<<역사>>, 9권 78~79절 정리) 그리고 파우사니아스는 국가노예들에게 명하여 전피품들을 한데 모으게 하고(9권 80장), 신들에게 바치는 것을 떼어내고는 전리품들을 참전한 이들에게 분배한다. "파우사니아스에게는 여인, 말, 돈, 낙타 및 전리품들이 모두 10곱절씩 주어졌다."(81장)
여기서 10곱절이라 함은 참전국들의 최고 장군들의 것들과 비교해서 10배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파우사니아스가 지시한 일화가 자못 흥미롭다.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헬라스에서 도주할 때 자신의 집기들을 마르도니오스에게 남겼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는 마르도니우스의 천막과 금은으로 된 집기와 수놓은 커튼을 보자 마르도니오스의 빵 굽는 하인들과 요리사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마르도니오스에게 올리던 것과 똑같은 식사를 차리게 했다고 한다. 그들이 시킨 대로 하자, 파우사니아스는 화려한 덮개로 덮은 금과 은으로 만든 긴 의자들과 금과 은으로 된 식탁들과 진수성찬을 보고 눈앞에 펼쳐진 좋은 것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장난 삼아 자신의 하인들에게 명하여 라코니케식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고 한다. 식사가 준비되자 파우사니아스는 두 가지 식사가 판이한 것을 보고 웃으며 헬라스 장군들을 불러오게 하더니 그들이 모이자 두 가지 식사를 가르키며 말했다고 한다. "헬라스인들여, 내가 그대들을 이리로 불러 모은 것은 페르시아 왕이 얼마나 어리식은지 그대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오. 그는 이런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의 빈약한 식사를 빼앗으러 왔으니 말이오." 파우사니아스는 헬라스 장군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사 9권 82장 전문>]]

라코니케(스파르테)식 식사란 스파르테의 입법자 뤼쿠르쿠스가 부에 대한 열망을 근절한 요량으로 입법화하여 실행한 공동식사(제도)를 말한다. 백성이 함께 모여 정해진 음식을 먹게 하는 검소한 상차림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한 까닭에 재물이 많아도 쓸 수도, 즐길 수도, 볼 수도, 보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플루타르코스영웅전>>, <뤼쿠르고스전> 34면) 여기에서는 왕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어서 영웅전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들은 음식 가운데 검은 고깃국을 으뜸가는 진미로 여겼는데, 연장자들은 국에 든 고깃점에는 손도 대지 않고 젊은이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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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text)'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면 '본문'이라고 할 것인데,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소통할 목적으로 생산한 모든 인공물을 이르는 용어이다. 한마디로 텍스트는 활자로 된 매체, 종이책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자매체가 가진 매력은 그것을 읽는 동안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나는 상상력에 있다. 오로지 흰 여백에 검은 글씨로만 끝없는 상상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반면 같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난다고 할 때,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으니까 보다 구체적이고 많은 정보를 얻는 듯하나, 실제로는 한정된 시간 만큼(영화나 다큐 등) 한계가 분명한 어떤 대상이나 작품의 일면과 대면하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트로이>(2004)라는 영화를 보았다고 치자. 거기에서 우리는 아킬레우스를 연기한 브레드피트를 만난다. 그리고 영화로만 만족할 수가 없어,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게 된다면, 그 자체는 다행스런 일이지만 책을 읽는 동안 아킬레우스가 나오면 브레드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비슷한 연상작용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책읽기의 계기가 되었던 영화는 어느덧 책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영상의 시놉시스 자체가 영상만을 위해 창조된 경우라고 모를까, 원전(텍스트나 작품)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는 영상물은 상상력의 무덤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워낙 영상매체에 익숙해져버렸고 책읽기-활자매체로 정보를 접하고 습득하는데-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아 영상매체로 관심을 가지고 이후 원작인 책읽기를 권하는 것일 뿐, 이런 접근 방식과 수순은 권장할만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양고전학자 강대진(49)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이해가 초등학교 3학년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로, 어른들은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로 <<일리아스>>를 이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강대진은 "영화와 만화는 등장인물의 사랑·우정·용기 같은 표피적인 얘기만 담을 뿐,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인간의 대응을 다룬 이 작품의 근원적인 질문을 읽어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상과 텍스트가 적절하게 어울리는 그 협동이 빛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우리에게는 '알렉산더 대왕'으로 알려져 있는 알렉산드로스라는 인물을 탐구한다고 할 때, 영상물과 텍스트가 조화롭게 만나는 그러한 사례를 나름대로 모색해보았는데, 이 페이퍼는 그 과정을 담은 리포트라고 할 수 있으리라. 먼저 텍스트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서 <알렉산드로스 전>을 읽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주요인물 50인을 다룬 '비교열전' 중에서 10명을 선별하여 소개한 책이지만, 옮긴이(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에는 '당연하면서'도 '다행스럽게' <알렉산드로스 전>이 포함되어 있다. 114면(243~357면)으로 다른 영웅들에 비해 분량이 적지 않지만, 책읽기가 고역이라고 느끼는 이들이라도 소화하기란 어렵지 않게 집필되었고 번역되어 있다. 
철학, 정치학, 생물학, 의학... 등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학문의 출발점에는 늘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버지 필립포스 왕은 아들이 고집이 있어 강요하면 반항하지만 이성에 호소하면 고분고분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도 아들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설득하려 했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아들의 성정을 잘 읽고 배려하는 아버지의 안목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철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가장 박식한 아리스토첼레스를 초빙하여(아들이 13세일 때), 후한 보수를 지급하고 아들의 교육을 맡긴다.
여기서 잠시 이 영웅전의 또다른 인물 <테미스토클레스 전>의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어머니에게, 또 간접적으로는 자기에게 대장노릇을 하는 자기 아들이야말로 헬라스에서 가장 힘 있는 세도가라고 농담삼아 말하며, 헬라스인들은 아테나이인들을 호령하고, 아테나이인들은 그가 호령하고, 그는 아들의 어머니가 호령하고, 어머니는 아들이 호령하기 때문이라고 했다."(158-159)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 자식사랑 때문에 자식 앞에서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어쨌거나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립포스의 자식사랑을 훌륭했다고 해야할까? 또한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알렉산드로스는 천성적으로 배우기를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는 <<일리아스>>를 전술의 교본으로 여겼고 또 그렇게 일컬었다. 그는 '작은 상자의 일리아스'라고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열본을 갖고 다니며, (그의 동방원정에 종군했던 역사가에 따르면) 그는 이 책을 단검과 함께 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한다. 농부는 굶어죽는 순간까지도 봄에 파종할 씨앗을 베개에 넣어 보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원정길, 아시아내륙에서 다른 책들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본국에 지시하여 책들을 보내도록 한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들도 그렇게 전장의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학문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숭배했고, 아버지 못지 않게 사랑했노라고 그 자신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 필립포스는 그에게 생명을 주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광활한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무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것이 가능했던 힘은 어쩌면 문무를 겸비한 그의 됨됨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알렉산드레이아'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이름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이귑토스(이집트)를 정복한 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크고 인구가 많은 헬라스의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건축가들의 조언에 따라 부지를 선정하여 측량하고 울타리를 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점잖게 생긴 한 백발 노인이 다가서더니 다음의 시행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귑토스의 맞은편 큰 너울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섬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 섬을 파로스라고 부르지요."
 

<<오뒷세이아>> 4권 354~355행이다. 즐겨 읽는 책의 한 구절이니 그런 꿈을 꾸는 일도 자연스럽지 않았겠나. 어쨌든 잠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산드로스는 당시에는 하구 조금 북쪽에 있던 파로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의 지형이 빼어난 것을 보고,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서도 찬탄받아 마땅하지만 더없이 훌륭한 건축가라고 말하며, 이 지형에 맞는 도시의 설계도를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나중에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팔각등대가 세워진 곳이 파로스(등대)이며,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원정은 계속되었고 그는 이 도시의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20세에 왕이 되었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 현재 이집트에서 수도인 카이로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큰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를 기념하는 최대의 상징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다음 그의 계승자 가운데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고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기하학의 유클리드도 이 도시 출신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또한 유대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의 중요한 주민으로 유력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번역본인 셉츄아진트본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계의 자유도시로 존재했으나 기원전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때 로마 공화정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였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반기를 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고 아우구스투스 때부터는 로마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다. 초기 기독교의 가장 크고 번성한 교구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교구였고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연구가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유명한 아리우스와 그의 반대자 아타나시우스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다.]] 


나는 가령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들, 대부분은 왕권을 둘러싼 투쟁과 당파싸움이 주요 얘깃거리인 드라마들을 보노라면, 조선의 왕들은 개인적으로 참 불행한 인생을 살았으리라,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적어도 재위기간에 아름다운 제주도를 여행했던 왕은 없지 않았나, 한반도 자체가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님에도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 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왕자나 세자이던 시절에는 나라 안 곳곳을 주유했던 왕이 없지 않았겠지만, 비록 재위기간은 아니었으나 인조반정(광해군 15년, 1623년)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던 광해군은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인조 19년(1641) 67세로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15년)보다 더 긴 19년의 유배생활 끝에 생을 마감한 것.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숱한 유명인물들 가운데서도 광해군이 급수가 가장 높았던 셈이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역사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피란을 가야했던(선조의 경우처럼) 경우나 왕조를 세우던 당시의 경험-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처럼-이 아니고는 재위 기간에 나라 안 곳곳을 맘껏 여행하는 왕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는 어렵다. 불안해서 궁권을 비울 수나 있었겠는가. 그에 비하면 알렉산드로스의 삶은 대단했던 것 같고, 그야말로 8할이 아니라 인생의 9할 이상이 바람 같은 삶이었나고 하겠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의 탁월함은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그것을 충족시키는 학문적인 열정에 있다고 생각되고, 어쩌면 '역마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숱한 원정도 그런 호기심의 발동에서 시작되었고 계속되었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알렉산드리아라는 이상도시를 건설한 일, 그리고 그 도시 안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워져 인류문명사에서 대단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가볍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 도시 안의 도서관은 그야말로 알렉산드로스가 꾸었던 꿈의 꽃 중의 꽃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들을 읽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안내서랄까, 한 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의 원작이름은 ‘BIBLIOTHEKE by APOLLODOROS’로 직역하면 ‘아폴로도로스가 쓴 도서관’이다. 또한 이 책의 원전번역 텍스트인 필사본에는 '아테나이 출신 문법학자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고 한다. 해서 이 책을 알폴로도로스의 <도서관>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알기 쉽게 아폴로도로스가 쓴 '그리스 신화'라고 알고 있지만 책 제목 자체가 '도서관'이라는 점이 흥미롭고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폴로도로스는 BC 2세기 무렵에 지금 얘기하는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서 활동한 아테네 출신의 문법학자인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주와 신들의 탄생에서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영웅들의 귀환까지 세세하고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다나오스의 딸 쉰 명과 아이귑토스의 아들 쉰 명의 이름들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오뒷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아내(페넬로페)에게 구혼한 129명의 명단들도 기록하고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작품들을 총망라하여 신과 영웅들의 역사와 계통을 종으로 횡으로 치밀하게 엮어놓았다. 해서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 아폴로도로스가-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들려주는 그리스 신화이며, 그야말로 그리스의 신화와 비극들을 만나는 입문서로, 또는 책에 대한 책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인류 문명사와 지성, 정신의 역사에서 도서관이 하는 역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책 자체로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33세의 나이에 길 위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던 알렉산드로스의 삶을 닮은 것일까, 그 사라짐으로 하여 그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역설적인 존재증명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고전철학자이자 문헌학자인 루치아노 칸포라는 저서 <<사라진 도서관>>(열린책들 펴냄)에서 326편의 각종 문헌 조사를 통해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기원전 308~246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전 세계의 책을 수집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모아 알렉산드리아를 학문과 지식의 보고로 만들겠다는 의도대로 도시는 학문의 중심지가 됐고 수집된 책은 70만 권에 달했다. 그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장 도서를 비롯하여 여러 그리스 비극 시인의 원고도 포함돼 있었다.
책을 번역한 김효정 씨는 저자의 주장을 정리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꼽고 있다.
1)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두루마리가 카이사르와 이집트 아킬라스 장군의 전쟁 중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고, 2)서기 389년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에게 이교도들의 사원을 파괴하라고 명하면서 세라피스 신전에 있던 도서관이 파괴됐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3)이슬람 군대의 대장인 암르가 술탄의 명령으로 도서관의 책들을 4천여 목욕탕의 원료로 6개월 간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위 두 번째 원인과 관련해서는 영화 <아고라>(Agora, 2009)를 떠올리게 된다. 진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학문적 진리 탐구를 위해 종교와 타협하지 않는 여성 과학자이자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고집스런 삶을 다루고 있다. 관점에 따라 종교영화 또는 페미니즘 영화 등으로 다양하게 말할 수 있는 영화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도와 로마 다신교들간의 폭동이 일어나는데 히파티아가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도 종교의 광풍에 휩싸이고, 그녀의 제자들도 종교에 따라 나뉘어 폭동에 가담하고, 압도적 우세인 기독교도들에 의해 이교도들의 상징이자 신에 대한 불복종의 상징과 같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파괴되고 만다. 이 영화야말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지는 즈음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어떤 위대한 역할을 해왔나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게 하며, 그래서 좋은 영화이다. 한 포털사이트의 '아고라'를 생각해보아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영화이며,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깊은 성찰(?)까지 하게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알렉산드라아 도서관이 장서를 수집하는 과정이다. 당시 이집트 일대와 알렉산드리아는 다행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이성적이며 철학자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통치를 받게 되고, 그는 자신의 고문이었던 데메트리오스(Demetrius Phalereus)에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을 명령한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약 70만 부의 파피루스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 외에도 박물관, 신전, 동물원, 식물원 등 모든 분야의 과학연구가 가능한 연구단지도 있어 지중해, 중동, 인디아 일대의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체류하며 학술교류 활동을 펼쳐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언어나 분야에 상관없이 책을 한 권씩 들고 와야 입성을 허락했다. 그리고 이 책들을 복사(필사)해 새 책을 만들어 도서관에 소장케 하고 원본은 돌려주는 지식 공유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그렇게 인류 최대의 지식보고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미궁 같은 도서관의 원형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추리하면서 '꿈의 도서관'이라 부르기도 했다. <<에코의 서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원제 The Library of Alexandria, 2002)(시공사, 2004)에서는 르네상스에 비견할 만한 학문과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 낸 고대의 도서관은,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의 위대한 지성들의 서재 역할을 해 왔으며 또한 학문의 모태이자 지식의 원천이 되어 온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할과 가치를 살필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의 상징이었던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부활시키자는 논의는 1974년부터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990년 아스완(Aswan)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도서관 건립을 위한 기금이 조성되었다. 1995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총 비용은 2억 2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16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동쪽 해안의 샤트비(El Shatby) 거리에는 전 세계의 찬사 속에서 초현대식 건물의 도서관은 개관했다. 건물은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태양이 인간 세계와 문화 활동을 비춰준다는 고대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우리의 세종대왕은 광화문광장에 동상으로, 또한 만원권 지폐 속의 인물로 저마다의 지갑 속에 민감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세종대왕은 우리가 쓰는 말 속에서 살아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영웅전에도 살아있고,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와 그 도시의 도서관의 이름으로도 살아있지만 정복자로서 넓은 땅을 지배하였던 것 못지 않게 학문과 예술을 깊이 사랑했던 한 사람의 인문학자로서 인류사에 영원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교외인 그라네이온에서 계속 여가를 즐길 뿐 좀처럼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디오게네스를 알렉산드로스는 몸소 찾아간다. 가서 보니는 그는 햇볕을 쬐며 누워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에게 인사하면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예, 햇볕이 가리지 않게 조금만 비켜서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자신을 그렇게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의 도도함과 당당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떠나면서 디오니게네스를 비웃고 조롱하던 자신의 부하들에게 "정말이지, 내가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소."라고 말했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62면)
 

대단히 유명한 일화다. 디오게네스의 당당함도 돋보이지만 그를 알아보는 알렉산드로스이 안목과 아량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방법이 달랐을 뿐 알렉산드로스는 디오네게스처럼 알렉산드로스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보기 드물게 미국사회의 정치와 역사, 특히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난 올리버 스톤. 그는 <플래툰 Platoon>, <닉슨 Nixon> 등 대표작이 말해주듯 베트남전, 케네디 암살, 워터게이트 등 60년대 미국 현대사의 격랑을 재조명하며 끊임없이 역사적 진실을 파헤친다. 책으로 <알렉산드로스 전>을 읽은 독자라면 이제 올리버 스톤이 감독한 영화 <알렉산더>(개봉 2004.12.30)를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톰 크루즈의 상대역으로 얼굴을 알린 콜린 파렐(알렉산더 역)과 안젤리나 졸리(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륌피아스 역)가 출연한 영화다. 왕위에 오른 후 재임 기간 내내 원정을 나서 길 위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던 알렉산드로스, 그동안 고향에서는 그의 어머니 올륌피아스와 누이 클레오파트라마저 안티파트로스에게 반기를 들고 이미 왕국을 나눠가졌는데, 올륌피아스는 에페이로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다며, 마케도니아인들은 여인의 지배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앞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45면). 포스가 느껴지는 안젤리나 졸리가 알렉산더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데서도 느낌이 오지만, 아들을 앞세운 어머니 올륌피아스의 권력욕 그리고 필립포스 왕의 작은 부인들과 그 시앗들에 대한 질투심도 대단했다. 오죽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올림퓌아스의 과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방원정에 나선 것은 아니겠느냐는 질문(네이버 지식in)이 올라오겠는가. 어쨌거나 영웅전의 알렉산드로스와 영화 속 알렉산드로스의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일은 흥미롭다. 영화 먼저 보고 책을 읽는 이의 느낌은 어떨런지.. 앞서 언급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라는 책보다 관련 영화를 보는 경우-영화가 텍스트 읽기에 걸림돌이 되는-보다는 덜하리가 짐작된다.
어쨌거나 알렉산드로스가 남긴 위대한 유산은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일 것이며, 덧붙여 거기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BC 332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북부 지중해 앞바다를 마주 보는 곳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웠고, 대학교와 도서관을 건립된다. 3000년 동안 건재했던 파라오의 이집트 문명에 그리스 왕조를 세웠던 것. 비록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알렉산드로스의 사주에는 '역마살'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무려 10년이라는 길고 먼 귀향길에 올랐던 오뒷세우스 못지 않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 삶이었다. 그가 길 위에서 즐겨 읽었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생각하면 그는 자신의 삶 자체가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의 삶 자체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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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0-08-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렉산더라는 영화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신화가 당시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나를 읽을 수 있는 가득하죠. 잘 읽었슴다

라라 2010-08-24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입니다. 책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하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그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어 좋습니다.
 

이아손: 얘들아, 너희들은 사악한 어머니를 만났구나!
메데이아: 얘들아, 아버지의 악덕이 너희들을 죽인 것이다!
이아손: 애들을 죽인 것은 분명 내 오른손이 아니었소.
메데이아: 그대의 교만과 새장가가 그랬죠.
이아손:
정녕 그대는 새장가 때문에 애들을 죽이기로 작정했단 말이오?
메데이아:
남편의 새장가가 여자에게 작은 고통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아손: 슬기로운 여자에게는. 하지만 당신은 완전히 타락했소.
메데이아: 애들은 이미 죽고 없어요. 그것이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중 후반부의 일부(1363~1370이다. 천병희 옮김 <<<그리스비극걸작선>> 365면 (숲 펴냄)에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는 설전, 말의 비수를 주고받는 이들 부부의 싸움은 단순한 부부싸움이 결코 아니다. 이 대목은 그야말로 이 비극의 최절정이라고 할만하다. 메데이아는 오로지 남편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배반하고, 이아손의 아르고호에 오르기 전에 오라비까지 죽여야 했다. 오로지 사랑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 너무도 컸다. 예로부터 처갓집과 칫간(화장실)은 멀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아손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메데이아는 돌아갈 친정이 있지만 결코 돌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친정이 있으면서 친정이 없는, 그야말로 배수진을 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가령, 자꾸 리바이블 되는 조선왕조의 궁궐 안팎을 다룬 드라마의 경우도, 왕권을 가진 시댁이 왕비의 집안인 외척을 척결(?)하는 이야기들이 당파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곤 한다. 최근의 MBC 드라마 <동이>에서 희빈 장씨와 남인의 결탁이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나지만 친족으로는 절멸 상태인 '동이'는 그런 점에서 왕권을 가진 이들의 입장에서는 경계심을 누드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돌아갈 친정도 뒷배가 되어줄 친정이 없는 동이가 오히려 희빈 장씨의 그것에 비해 훨씬 심플해보이고, 그점이 오히려 동이라는 인물을 돋보이게 만든다. 후궁을 들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나 중전으로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어! 진행되는 극을 보자면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보다도 권력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쩌면 동이는 한미한 그리고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영조라는 걸출한 왕의 어머니로서 역사에 남았을 수도 있다. 드라마평을 하자는 것이 아니니 이쯤하고.  

위 인용에서 색지정을 한 부분에서 보듯이, 이아손은 겨우 '남편의 새장가 때문에', 새로운 신부를 죽이고, 그 신부가 될 이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직접 낳은 두 아들(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의)까지 죽여야했나고 묻고 있다. 겨우 새장가 때문에? 겨우 남편의 새장가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전장에서 포로로 잡은 적장의 처나 딸을 첩으로 들이는 것이 그렇게 흠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으로서는 질투에 눈이 먼 '슬기로운 여인'이 아닌 아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사태 인식을 미처 하지 못한,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대사 속에는 스며 있다. 이해는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정도로 아니고, 메데이아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이해하지 않겠다, 라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만큼 그녀의 이아손을 향한 사랑은 깊었다! 

우리 민요에 <진주난봉가>라는 것이 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시집살이를 삼년째 하고 있는 아내(조강지처),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을 비운 것으로 예상되는 낭군이 돌아왔다. 그런데 자신을 따듯하게 맞아주기는 커녕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는 술판이 벌어져 있다. 갑갑하고 복장이 터지는 상황이다. 사랑방을 못본듯이 나온 며느리는 아홉가지 약을 먹고 목을 메어 죽는다. 그 때 진주낭군이 하는 말이 하룻(화류)정은 삼년이고 본데(본댁)정은 백년인데.. 라면 한탄하는 내용이다. 진주낭군의 아내가 선택한 길은 자진함으로써, 일종의 복수를 한 것인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분에 못이겨 그리 한 것인가! 어느 한쪽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시대적으로 정확히 어느 즈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생첩에 빠져 하룻점을 나누는 것쯤은 용납이 되던 시대인 모양이다.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당신 저를 사랑하지요, 그런 당신이 어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당신에 대한 복수는 당신이 사랑하는 제가 죽어버리는 것일 거예요. 당신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없이 살아가야 하는 그 아픔이 당신에게 하는 최고의 복수일 거예요. 야속한 사람!' 실제 상황은 이와 다를 수 있지만, 조강지처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은 진주낭군의 말에 따르면 지독한 고통이 뒤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그리고 남편의 사랑이 전부였으리라, 그리고 돌아갈 친정이 있어도 출가외인으로 퇴로가 없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메데이아는 아주 독한 여인이고, 악녀로 기록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진주의 여인과 달리 살아서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이야 말로, 죽지 못하고 살면서 고통을 맛보게 하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진주의 여인보다는 한 수 위의 복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사랑을 저버린 남편에게 복수하는 방법에서 그 정도의 차이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메데이아는 "거짓 맹세를 하고 친구를 속인" 남편에게 "제 자식을 죽인 흉악한 계집"이 되면서까지도 처절한 복수를 했다. "집에 가서 신부나 묻어주세요!", "당신의 비탄은 아직 멀었어요. 늙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메데아의 대사는 서릿발이 서려있다.   

"남자의 질투는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부제를 단 <<질투의 세계사>>(야마우치 마사유키 지음, 김해용/이선이 옮김, 이너북, 2009-05-22)라는 책이 있다.  

세계사 곳곳에서 만나는 지명도 있는 인물들의 품고 살아갔던 질투의 흔적을 꼼꼼히 들춰내는 책이다.  책을 펴낸 컨셉트라고 할 서장에서의 요지는 "질투는 여자의 특권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의 질투와 시기는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과장하면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여자가 남자나 질투는 적당할 때에는 삶의 활력이 되고, 사랑에 불을 당기는 역할을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도 함께 불살라버린다. 가정이 무너지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의 경중을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 <<질투의 세계사>>를 폄하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를 통해 빚어낸 비극의 주인공, 메데이아의 선택은 그 울림이 깊고 오래 가며, 아프다. 남자의 질투를 강조하기 위해 여자의 질투는 이해가 가요, 라고 결코 쉽게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잔인한 말이지만 메데이아는 근래의 드라마에서 더 익숙하게 만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에우리피데스를 3대 작가 중에서 가장 막내이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드라마의 원조랄까, 그런 평가를 내리는데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입장이 바뀌었을 때- 어찌 아내들의 복수만이 매서울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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