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손: 얘들아, 너희들은 사악한 어머니를 만났구나!
메데이아: 얘들아, 아버지의 악덕이 너희들을 죽인 것이다!
이아손: 애들을 죽인 것은 분명 내 오른손이 아니었소.
메데이아: 그대의 교만과 새장가가 그랬죠.
이아손:
정녕 그대는 새장가 때문에 애들을 죽이기로 작정했단 말이오?
메데이아:
남편의 새장가가 여자에게 작은 고통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아손: 슬기로운 여자에게는. 하지만 당신은 완전히 타락했소.
메데이아: 애들은 이미 죽고 없어요. 그것이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중 후반부의 일부(1363~1370이다. 천병희 옮김 <<<그리스비극걸작선>> 365면 (숲 펴냄)에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는 설전, 말의 비수를 주고받는 이들 부부의 싸움은 단순한 부부싸움이 결코 아니다. 이 대목은 그야말로 이 비극의 최절정이라고 할만하다. 메데이아는 오로지 남편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배반하고, 이아손의 아르고호에 오르기 전에 오라비까지 죽여야 했다. 오로지 사랑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 너무도 컸다. 예로부터 처갓집과 칫간(화장실)은 멀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아손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메데이아는 돌아갈 친정이 있지만 결코 돌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친정이 있으면서 친정이 없는, 그야말로 배수진을 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가령, 자꾸 리바이블 되는 조선왕조의 궁궐 안팎을 다룬 드라마의 경우도, 왕권을 가진 시댁이 왕비의 집안인 외척을 척결(?)하는 이야기들이 당파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곤 한다. 최근의 MBC 드라마 <동이>에서 희빈 장씨와 남인의 결탁이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나지만 친족으로는 절멸 상태인 '동이'는 그런 점에서 왕권을 가진 이들의 입장에서는 경계심을 누드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돌아갈 친정도 뒷배가 되어줄 친정이 없는 동이가 오히려 희빈 장씨의 그것에 비해 훨씬 심플해보이고, 그점이 오히려 동이라는 인물을 돋보이게 만든다. 후궁을 들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나 중전으로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어! 진행되는 극을 보자면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보다도 권력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쩌면 동이는 한미한 그리고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영조라는 걸출한 왕의 어머니로서 역사에 남았을 수도 있다. 드라마평을 하자는 것이 아니니 이쯤하고.  

위 인용에서 색지정을 한 부분에서 보듯이, 이아손은 겨우 '남편의 새장가 때문에', 새로운 신부를 죽이고, 그 신부가 될 이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직접 낳은 두 아들(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의)까지 죽여야했나고 묻고 있다. 겨우 새장가 때문에? 겨우 남편의 새장가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전장에서 포로로 잡은 적장의 처나 딸을 첩으로 들이는 것이 그렇게 흠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으로서는 질투에 눈이 먼 '슬기로운 여인'이 아닌 아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사태 인식을 미처 하지 못한,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대사 속에는 스며 있다. 이해는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정도로 아니고, 메데이아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이해하지 않겠다, 라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만큼 그녀의 이아손을 향한 사랑은 깊었다! 

우리 민요에 <진주난봉가>라는 것이 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시집살이를 삼년째 하고 있는 아내(조강지처),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을 비운 것으로 예상되는 낭군이 돌아왔다. 그런데 자신을 따듯하게 맞아주기는 커녕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는 술판이 벌어져 있다. 갑갑하고 복장이 터지는 상황이다. 사랑방을 못본듯이 나온 며느리는 아홉가지 약을 먹고 목을 메어 죽는다. 그 때 진주낭군이 하는 말이 하룻(화류)정은 삼년이고 본데(본댁)정은 백년인데.. 라면 한탄하는 내용이다. 진주낭군의 아내가 선택한 길은 자진함으로써, 일종의 복수를 한 것인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분에 못이겨 그리 한 것인가! 어느 한쪽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시대적으로 정확히 어느 즈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생첩에 빠져 하룻점을 나누는 것쯤은 용납이 되던 시대인 모양이다.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당신 저를 사랑하지요, 그런 당신이 어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당신에 대한 복수는 당신이 사랑하는 제가 죽어버리는 것일 거예요. 당신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없이 살아가야 하는 그 아픔이 당신에게 하는 최고의 복수일 거예요. 야속한 사람!' 실제 상황은 이와 다를 수 있지만, 조강지처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은 진주낭군의 말에 따르면 지독한 고통이 뒤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그리고 남편의 사랑이 전부였으리라, 그리고 돌아갈 친정이 있어도 출가외인으로 퇴로가 없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메데이아는 아주 독한 여인이고, 악녀로 기록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진주의 여인과 달리 살아서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이야 말로, 죽지 못하고 살면서 고통을 맛보게 하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진주의 여인보다는 한 수 위의 복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사랑을 저버린 남편에게 복수하는 방법에서 그 정도의 차이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메데이아는 "거짓 맹세를 하고 친구를 속인" 남편에게 "제 자식을 죽인 흉악한 계집"이 되면서까지도 처절한 복수를 했다. "집에 가서 신부나 묻어주세요!", "당신의 비탄은 아직 멀었어요. 늙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메데아의 대사는 서릿발이 서려있다.   

"남자의 질투는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부제를 단 <<질투의 세계사>>(야마우치 마사유키 지음, 김해용/이선이 옮김, 이너북, 2009-05-22)라는 책이 있다.  

세계사 곳곳에서 만나는 지명도 있는 인물들의 품고 살아갔던 질투의 흔적을 꼼꼼히 들춰내는 책이다.  책을 펴낸 컨셉트라고 할 서장에서의 요지는 "질투는 여자의 특권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의 질투와 시기는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과장하면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여자가 남자나 질투는 적당할 때에는 삶의 활력이 되고, 사랑에 불을 당기는 역할을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도 함께 불살라버린다. 가정이 무너지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의 경중을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 <<질투의 세계사>>를 폄하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를 통해 빚어낸 비극의 주인공, 메데이아의 선택은 그 울림이 깊고 오래 가며, 아프다. 남자의 질투를 강조하기 위해 여자의 질투는 이해가 가요, 라고 결코 쉽게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잔인한 말이지만 메데이아는 근래의 드라마에서 더 익숙하게 만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에우리피데스를 3대 작가 중에서 가장 막내이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드라마의 원조랄까, 그런 평가를 내리는데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입장이 바뀌었을 때- 어찌 아내들의 복수만이 매서울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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