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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발레 수업에 갑니다 - 더딘 걸음으로 나를 돌보는 시간
이지영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5월
평점 :
초등학교 5학년 때 '토슈즈'라는 순정만화를 읽었다. 나와 동갑인 주인공은 발레를 배우는 친구를 따라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러 갔다가 발레리나를 꿈꾸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늦어도 열 살 이전에는 발레를 시작해야 프로를 꿈꿀 수 있었지만, 주인공은 늦게 시작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고난 끝에 결국 꿈을 이뤄낸다.
만화를 읽은 나는 곧장 엄마를 졸라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나 역시 또래 수강생들 가운데 가장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나를 주인공과 더욱 닮았다고 믿게 만들었다. 나도 언젠가 발레리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어린 나는 진심으로 믿었다.
주3회 레슨을 받으며, 레슨이 있는 날이 가장 행복했다. 당시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상태였는데 아무리 힘들고 서러운 날도 방과 후 레슨이 있는 것만 생각하면 행복한 날로 바뀌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거리였기에 나는 당연히 계속 같은 학원을 다니거나 근처의 다른 발레학원에 등록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더는 발레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내가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 멀어서라고 하셨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경제적인 문제였다.
발레를 계속했다면 예술고등학교 진학, 개인 레슨, 공연 준비까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비용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지금 그만두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덜 상처일 거라고 엄마는 생각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펑펑 울며 엄마를 원망했다. 그래도 결국 포기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발레리나를 꿈꿀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느 날 동네 문화센터에 성인 취미 발레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뛰었다.
발레리나는 될 수 없어도, 적어도 발레를 배우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에 갔다. 그런데 분명 취미반이었는데도 나를 제외한 수강생들은 모두 전공생 못지않게 날씬하고 곧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나는 하필 그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모두가 내 몸을 힐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저 다시 발레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내 몸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치심과 열등감 속에서 수업을 마친 나는 결국 다시는 그 발레수업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어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담 없는 수강료였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돈으로 당당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나는 왜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을까.
이지영 작가의 『마흔, 발레수업에 갑니다』를 읽는 내내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이 책은 마치 내가 하지 못했던 선택을 대신 해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계속했어도 괜찮았다', '조금 서툴러도 다시 시작했어도 괜찮았다'고, 뒤늦게나마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발레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스스로 단정해 버린 사람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응원처럼 느껴졌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언젠가 다시 발레를 배우고 싶다.
꼭 발레가 아니어도 좋다. 무엇이든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더 충실히 살아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