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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ㅣ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우리는 죄업을 진 자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야기는 자아내는 자의 죄업이나 다름없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당신의 꿈에 평온 있으라. 우리 자아내는 자가 발들이기를 허락받지 못한 낙원의 땅에, 당신이 쉴 집의 불은 켜지리니.
그 불빛 아래서 그 불길한 생명의 방문을 갈망하지 말라.
그 불빛을 끄고 창가에서 귀를 기울이며 그 불길한 생명의 목소리를 기다리지 말라.
-염원의 노래(황의를 입은 왕의 불길한 노래) 중에서…….
소중한 것이 부서졌다. 자고 일어나면 깰 수 있는 나쁜 꿈이길 바랐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영웅의 서’는 봄날 오후의 따뜻함과 이야기의 진실과 색채가 결여된 사막 같은 풍경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위업의 원천이 되는 이야기인 ‘영웅’ 아름답고 존귀한 이야기가 빛을 발하면 그에 비례해 짙은 그림자도 생기는 법, 힘을 얻어 사악해진 어둠,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회수되는 ‘이름 없는 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믿고 이름 없는 땅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한 소녀가 있다. 영웅에 홀려버린 오빠를 구하기 위해,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열한 살 소녀.
무난하고 두드러지지 않은 학생 유리코에게는 자신을 귀여워해주는 오빠 히로키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히로키가 같은 반 남학생 두 명을 칼로 찌른 뒤 자취를 감추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실감이 나지 않은 현실이었다. 오빠 방에서 책의 정령 아쥬를 발견하면서부터 ‘영웅의 서’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리코는 오빠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작은할아버지이자 은둔자였던 미노치의 서재를 방문해 ‘현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어린 소녀가 그것들을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 된다. 포기다. 유리코는 두 손을 들었다.
“모르겠어요. 머리가 못 따라가요.”
현자는 학교 선생님처럼 유리코를 야단치거나 하지 않았다.
“아직 어쩔 수 없지. 넌 어리다. 지금은 그냥 들어두면 돼. 언젠가 이해될 때가 올 거야. 언젠가는 꼭 이해하겠다고 생각하면 돼.” (영웅의 서 1, p. 121~122)
판타지 성장소설은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대표적인 작품이 해리포터 시리즈) 하지만 이 소설은 신기하고 화려한 마법보다는 동심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성장통의 아픔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리코는 영웅의 그림자(황의를 입은 왕)를 추적하는 올 캐스터 유리가 되어 아쥬, 소라, 애시와 함께 사건의 근원지인 헤이틀랜드로 모험을 떠난다.
창조되어 엮여진 이야기 속 세상 헤이틀랜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소녀는 성장하는 동시에 진실에 다가간다. 오빠를 홀린 영웅의 서, 더 정확하게는 ‘엘름의 서’의 놀라운 내력,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사실 등은 어린 유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브레이브 스토리’와 같은 판타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브레이브 스토리’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면 ‘영웅의 서’는 미국의 공포소설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크툴후 신화’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크툴후 신화는 판타지 문학의 모태가 되는 가상의 신화 체계로 이 책에 등장하는 ‘황의를 입은 왕’도 신화에 등장한다. 미미 여사는 게임 마니아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게임을 원작으로 한 소설(브레이브 스토리, 이코-안개의 성)까지 썼다. 이 소설이 롤플레잉 게임 같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아마도 작가 특유의 취향이 작품 속에서 은연중에 감지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따지고 보면 롤플레잉 게임의 바탕에는 판타지와 모험이 있다.
‘영웅의 서’는 청소년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원래는 마이니치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읽기에도 좋은 작품이다. 판타지소설답지 않게 상당히 심오한 색체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 독자들로부터 ‘감정이입이 힘들고 내용 파악에 시간이 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가벼운 느낌을 주는 책은 아니다. 되새겨볼 만한 말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두어 가지만 적어본다.
“이야기란 뭐지, 유리?” 하고 애시는 반대로 물어왔다.
“‘자아내는 자’가 만드는 것. 거짓말이죠.”
“‘자아내는 자’만이 창작자는 아니야. 인간은 모두 살아감으로써 이야기를 엮어내지.” (영웅의 서 2, p. 331)
"그러면 누가 악을 심판해요? 나쁜 짓을 한 인간을 혼내주면 안 되나요? “
유리의 비명에 가까운 질문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애시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법’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오지 않았니.”
인간의 기나긴 걸음 속에서 수많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희생자를 내고 한탄의 강을 건너면서도-
“‘법’은 인간의 걸음 뒤에 만들어져. 그렇기 때문에 잘못도 있지. 하지만 ‘법’을 잊은 사람이 제멋대로 사람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이야기에 살려고 한다면, 그건 죄야.” (영웅의 서 2, p. 334~335)
이야기라는 거짓말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악을 심판하기 위해 실수를 되풀이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법을 만든 우리들. 그러나 법을 초월한 절대적인 힘을 갖고자 했던 인간(히로키)의 욕망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결국 그 이야기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이야기란 빛과 어둠 사이에서 파생된 양날의 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