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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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죄업을 진 자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야기는 자아내는 자의 죄업이나 다름없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당신의 꿈에 평온 있으라. 우리 자아내는 자가 발들이기를 허락받지 못한 낙원의 땅에, 당신이 쉴 집의 불은 켜지리니.

그 불빛 아래서 그 불길한 생명의 방문을 갈망하지 말라.

그 불빛을 끄고 창가에서 귀를 기울이며 그 불길한 생명의 목소리를 기다리지 말라.

 

-염원의 노래(황의를 입은 왕의 불길한 노래) 중에서…….

 

소중한 것이 부서졌다. 자고 일어나면 깰 수 있는 나쁜 꿈이길 바랐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영웅의 서’는 봄날 오후의 따뜻함과 이야기의 진실과 색채가 결여된 사막 같은 풍경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위업의 원천이 되는 이야기인 ‘영웅’ 아름답고 존귀한 이야기가 빛을 발하면 그에 비례해 짙은 그림자도 생기는 법, 힘을 얻어 사악해진 어둠,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회수되는 ‘이름 없는 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믿고 이름 없는 땅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한 소녀가 있다. 영웅에 홀려버린 오빠를 구하기 위해,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열한 살 소녀.

 

무난하고 두드러지지 않은 학생 유리코에게는 자신을 귀여워해주는 오빠 히로키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히로키가 같은 반 남학생 두 명을 칼로 찌른 뒤 자취를 감추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실감이 나지 않은 현실이었다. 오빠 방에서 책의 정령 아쥬를 발견하면서부터 ‘영웅의 서’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리코는 오빠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작은할아버지이자 은둔자였던 미노치의 서재를 방문해 ‘현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어린 소녀가 그것들을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 된다. 포기다. 유리코는 두 손을 들었다.

“모르겠어요. 머리가 못 따라가요.”

현자는 학교 선생님처럼 유리코를 야단치거나 하지 않았다.

“아직 어쩔 수 없지. 넌 어리다. 지금은 그냥 들어두면 돼. 언젠가 이해될 때가 올 거야. 언젠가는 꼭 이해하겠다고 생각하면 돼.” (영웅의 서 1, p. 121~122)

 

판타지 성장소설은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대표적인 작품이 해리포터 시리즈) 하지만 이 소설은 신기하고 화려한 마법보다는 동심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성장통의 아픔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리코는 영웅의 그림자(황의를 입은 왕)를 추적하는 올 캐스터 유리가 되어 아쥬, 소라, 애시와 함께 사건의 근원지인 헤이틀랜드로 모험을 떠난다.

 

창조되어 엮여진 이야기 속 세상 헤이틀랜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소녀는 성장하는 동시에 진실에 다가간다. 오빠를 홀린 영웅의 서, 더 정확하게는 ‘엘름의 서’의 놀라운 내력,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사실 등은 어린 유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브레이브 스토리’와 같은 판타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브레이브 스토리’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면 ‘영웅의 서’는 미국의 공포소설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크툴후 신화’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크툴후 신화는 판타지 문학의 모태가 되는 가상의 신화 체계로 이 책에 등장하는 ‘황의를 입은 왕’도 신화에 등장한다. 미미 여사는 게임 마니아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게임을 원작으로 한 소설(브레이브 스토리, 이코-안개의 성)까지 썼다. 이 소설이 롤플레잉 게임 같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아마도 작가 특유의 취향이 작품 속에서 은연중에 감지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따지고 보면 롤플레잉 게임의 바탕에는 판타지와 모험이 있다.

 

‘영웅의 서’는 청소년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원래는 마이니치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읽기에도 좋은 작품이다. 판타지소설답지 않게 상당히 심오한 색체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 독자들로부터 ‘감정이입이 힘들고 내용 파악에 시간이 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가벼운 느낌을 주는 책은 아니다. 되새겨볼 만한 말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두어 가지만 적어본다.

 

“이야기란 뭐지, 유리?” 하고 애시는 반대로 물어왔다.

“‘자아내는 자’가 만드는 것. 거짓말이죠.”

“‘자아내는 자’만이 창작자는 아니야. 인간은 모두 살아감으로써 이야기를 엮어내지.” (영웅의 서 2, p. 331)

 

"그러면 누가 악을 심판해요? 나쁜 짓을 한 인간을 혼내주면 안 되나요? “

유리의 비명에 가까운 질문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애시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법’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오지 않았니.”

인간의 기나긴 걸음 속에서 수많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희생자를 내고 한탄의 강을 건너면서도-

“‘법’은 인간의 걸음 뒤에 만들어져. 그렇기 때문에 잘못도 있지. 하지만 ‘법’을 잊은 사람이 제멋대로 사람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이야기에 살려고 한다면, 그건 죄야.” (영웅의 서 2, p. 334~335)

 

이야기라는 거짓말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악을 심판하기 위해 실수를 되풀이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법을 만든 우리들. 그러나 법을 초월한 절대적인 힘을 갖고자 했던 인간(히로키)의 욕망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결국 그 이야기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이야기란 빛과 어둠 사이에서 파생된 양날의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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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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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더미를 파고들던 부랑자 소년(제이크)은 잃어버린 구두를 찾으려고 하는 소녀(로사)와 조우를 하게 된다. 로렌스의 공장주들이 임금 삭감을 결정하자 노동자들은 전원 파업에 돌입한다. 로사의 엄마와 언니 애나도 집회와 시위행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소녀는 파업 그 자체가 싫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겁쟁이인 자기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제이크는 여름 하늘처럼 맑고 파란 눈을 지닌 걸리 플린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파업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야 그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 수 있으니까.

 

캐서린 패더슨의 장편소설 ‘빵과 장미’는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로렌스에서 일어난 파업을 배경으로 이민 노동자 문제, 진정한 삶을 위해 노력한 이들의 모습 등을 그렸다. 패터슨이 우연히 본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이 작품엔 특별한 미장센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소녀와 소년의 일기를 보듯 역사적인 파업을 청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24장으로 나눠진 책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설은 추천사가 흥미롭다.(아니, 추천인이 흥미롭다고 하는 게 더 맞을까.) 그들의 추천사는 이 소설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약 100년 전 미국의 풍경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자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인류를 위한 시간의 시작 지점에 있다. 우리가 문제와 붙잡고 싸우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수만 년이라는 미래의 시간이 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배우고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그 모든 것들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파인만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에게는 (잘못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모든 것들을 후대에 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빵과 장미’는 우리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문제의 해결책도 함께 제시하는 소설인 셈이다. 이 작품을 단순한 청소년문학으로 단정 짓기에는 그 경계가 애매하다.

 

노동자들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픈데다 먹지를 못하고 있었다. 파업 중인 그들은 승리할 때까지 아이들을 뉴욕과 버몬트로 휴가를 보내게 된다. 자료조사에만 삼 년이라는 기간이 걸린 결과물답게 사실과 허구를 혼합하면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빵과 장미’에서 감동의 포인트는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제르바티와 제이크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노인 제르바티, 그리고 죽은 아버지를 내버려두고 버몬트로 가는 기차에 몰래 탄 제이크, 두 사람은 저마다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슬픔과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년과 노인이 한 가족이 되는 장면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1912년 파업에서 등장한 ‘빵과 장미’라는 구호는 노동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로렌스의 파업 노동자들은 생존을 의미하는 빵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로사의 엄마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우리의 가슴과 영혼을 위한 양식도 원해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뭐냐- 푸치니의 음악 같은 거예요.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것들도 어느 정도 필요해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죠.”

엄마는 몸을 숙여 손가락에 잠긴 곱슬머리에 키스했다.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 (p. 114~115)

 

생존권(빵)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인 인권(장미)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민 노동자들은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했다. 그 투쟁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다.

 

21세기인 현재에도 ‘빵과 장미 파업’은 계속되는 실정이다. 쉴 곳이 없어서 화장실에서 밥을 먹는 40만의 청소노동자들, 60만 명이 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그 사람들이 과연 로사의 바람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이 소설은 우리의 삶과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모든 사람은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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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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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을 가진 단편소설집이 세상에 나왔다. 속필로 유명한 소설가 김영하의 신작 소설집인 이 작품은 즉흥적으로, 소위 필이 왔을 때 쓴 작품들이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그가 말한 바람처럼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는 내밀한 유쾌가 문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총 13편의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집을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책의 맨 뒤에 적혀있는 박민규의 추천사이다.

 

도대체 뭘 추천하란 애기지? 살짝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이미 소름이 돋았을 독자들이 널리고 널렸을 테니까. 말하자면 베레타는 참 좋은 총이에요. 당연한 소릴 지껄이고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핀잔을 들어야 하는 그런 기분이다. 김영하가 돌아왔다. 원 샷, 원 킬 사정거리 밖에서의 저격처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우리에게 내밀었지만 이 독서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영하니까!

 

김영하는 박민규 등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손꼽힌다. 이는 그의 감각이 신선하고 실험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모든 사람(세대)들이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불안요소도 공존한다. 독자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서 가장 관심이 간 단편은 로봇, 악어, 밀회였다. ‘로봇’을 읽으면서는 90년대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한 영화가 떠올랐고 ‘악어’에서 노래하는 한 남자를 보며 학창시절 노래를 부르던 내 모습을 추억했다. 이 작품의 테마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밀회’는 짧은 영화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은 바로 ‘밀회’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1995년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하여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로움을 추구해온 김영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고 특이하다고……. 이 기사를 보며 ‘작가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박민규가 추천사에서 한 말처럼 원 샷, 원 킬 저격수와 같은 날카로움을 갖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이론바 ‘김영하표 소설’의 출발점이 그의 특이성은 아니었을까.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다. (현실의 우리들이 그러하듯이) 신비로운 목소리로 유명한 가수였으나 갑자기 목소리를 상실한 한 남자(악어), 카푸그라증후군이라는 뇌질환을 앓게 된 남편(밀회), 아름다운 피부를 잃고 자살한 여자(명예살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사건에 휩싸인다. 이런 모습들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하에게 소설은 어떤 것일까. 그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라는 존재는 어지러이 둔갑을 거듭하는 허깨비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일 것이다. 그 책들이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 같은 내 영혼을 저 수면 아래에서 단단히 붙들어주는 것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조각배를 붙들어주는 밧줄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점에서 이번 소설집은 완성품이 아닌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고 나름대로 정의해 볼 수 있겠다.) 13편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애피타이저처럼 즐기는 것, 저자가 독자들에게 바라는 궁극적인 희망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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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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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공포는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감정이다.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작가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는 “희망과 공포는 분리될 수 없다. 공포 없는 희망이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가 없다.”고 말했다.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청춘들의 일기와도 같은 소설이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지는, 그런 시대를 살았던 젊음들에게 주어졌던 것은 슬픔과 아픔이다.

 

‘나’는 트렁크에서 룸메이트 롤라의 공책을 발견한다. 남쪽의 빈곤한 지방에서 온 롤라는 손톱이 깨끗하고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던 중이었다. 뭔가 되어가는 것 같았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내 허리띠로 목을 매 자살을 하고 나는 공책의 마지막 장을 통해 이 죽음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체육 강사가 저녁에 나를 체육관으로 불러 안에서 문을 잠갔다, 라고 롤라는 썼다. 두꺼운 가족 공들만이 우리를 지켜보았다…….중략……. 그가 교수회의에서 나를 신고했다. 나는 메마름을 떼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신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아이는 발이 붉은 양 떼를 몰지 않으리라. (p.36)

 

헤르타 뮐러의 작품 ‘마음짐승’의 테마는 ‘전체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상은 독재자들이 권력 강화를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작가 본인이 그런 시대를 살았고 생생한 경험과 참상들이 자신의 글들에 녹아들어 있다. 과연 이 소설에서는 어떤 경험을 이야기하고 얼마나 더 비극적인 참상을 보여주게 될 것인가. 뮐러는 ‘낱말상자’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고 있고 그 시스템을 바탕으로 새로운 말들을 탄생시킨다. ‘마음짐승’이라는 단어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단어는 불안의 공포의 삶 속에서 절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또한 시적 언어들의 사용으로 인해 여타 소설가들의 작품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최신작인 ‘숨그네’와 이 작품을 비교, 대조하며 읽어본다면 작가의 문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마음짐승’은 1994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통치했던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이 감도는 와중에도 뮐러는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의 명예를 잃지 않는다.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이런 독특함이 악에 관한 한 편의 잔혹동화와 같은 소설을 탄생시켰다. 온유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내는 칼날처럼 날카롭다.

 

소설에 등장하는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 그리고 주인공이 친구가 되어 모임을 갖고 책을 접하는 것처럼 실제로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악티온스구루페’라는 젊은 지식인들의 집단을 결성해 금서들을 읽으며 활동했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뮐러는 그 당시 모든 걸 제대로 이해하고픈 욕구가 강했으며 불행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작가의 생각은 ‘마음짐승’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완치되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 뮐러의 이야기들은 난해하고 고통스럽다. (우리에게도 그런 상처는 남아 있다. 아직도......)

 

‘마음짐승’은 독재치하에서 죽은 두 친구 롤프 보세르트와 롤란트 키르시를 위해 썼다고 한다. ‘숨그네’가 동료였던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미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본다면 이 두 소설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독일의 철학자 폴 티리히는 “죽게 된다는 깊은 슬픔은 곧 영원히 잊혀진다는 두려움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뮐러의 세 친구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잊혀지는 두려움은 맛보지 않을 것이다.)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나와 친구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고 죽음의 피리소리에 힘겹게 대항한다. 나는 결국 루마니아를 떠나 독일로 망명하지만 죽음의 공포는 끊임없이 엄습해온다. 인내만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유일한 희망조차 완전한 동아줄은 아니었다.

 

그들은 불행한 현실에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했고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죽지 못해 살았다. 각자 자살을 통해 어떤 식으로 친구들을 버릴 수 있을까 상상하면서. (어떤 이에게 있어 하루하루가 사랑일지 몰라도 또 다른 이에겐 그 하루가 지옥이다.)

 

지옥 같은 삶을 영위해갈 여력이 없었는지 게오르크와 쿠르트는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육 층 건물에서 떨어져 즉사하고 집에서 목을 매 시체로 발견된 친구들, 나와 에드가는 루마니아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짐승은 너무나 지쳤고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소설이 독자인 우리들에게 남기는 질문과 의문점은 적지 않다. 당신의 ‘마음짐승’은 어떤 모습인가. 물론 우리가 독재치하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불안과 공포가 담겨져 있다. 현실의 불안정한 다리 위에 선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소설은 슬픔과 아픔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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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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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그리운 따스함이 깃든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 3권’(7월 25일 출간)은 첫사랑의 애틋함과 안타까운 엇갈림과 상처와 비밀, 그리고 달의 로맨틱함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드는 소설이라고 정의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한 예로 이 장면을 들 수 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먼 곳에서, 어딘가 머나먼 시간에서 찾아온 것 같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굽이굽이 구부러진 모퉁이를 돌아온 탓에 그것은 본래의 음색이나 특성을 상실했다. 남겨진 것은 의미가 떨어져나간 텅 빈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울림 속에서 아오마메는 그리운 따스함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는 아무래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아오마메는 손가락에 넣었던 힘을 빼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가 발하는 언어를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들은 것은, 혹은 들었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이름뿐이었다. 나머지는 빈 동굴을 빠져나가는 바람의 웅웅거림뿐이었다. 이윽고 목소리는 멀어지고, 다시금 의미를 상실하고, 무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p. 43)

 

아오마메에 의해 리더가 살해되자 ‘선구’는 우시카와를 앞세워 그녀를 찾는다. 뛰어난 직감을 가진 우시카와는 사건의 키워드를 탐색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의식의 저 먼 가장자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덴고, 아오마메에 이어 우시카와가 제3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서 (예전부터 이미 등장은 했었지만) 1Q84는 좀 더 복잡해지고 새로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2권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과거가 공개된다.

 

이 작품은 2001년 9.11 테러와 1995년에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지하철 사린 사건의 주범 옴진리교를 연상시키는 종교단체 ’선구‘나 작품 전체적으로는 어두운 분위기가 감도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면으로 ’1Q84' 3권은 사랑의 판타지를 더 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오마메는 리더를 살해한 후 은신처에 잠적한다. 제아무리 숨을 죽이고 있어도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낼 것이라는 불안감은 늘 공존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덴고를 생각한다. 눈을 감은 채.

 

덴고, 너는 어디 있어? 빨리 나를 찾아줘. 다른 누군가가 나를 찾기 전에. (p. 121)

 

덴고에게 있어서도 그녀를 찾는 것은 시급한 일이었고 재회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세계의 룰이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져서 모든 것이 상실되기 전에 아오마메를 찾아야 했다. 그는 요양소에 입원해있는 (침묵의 늪에 빠져있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있는 것 그대로.

 

“아버지는 지난여름에는 아직 의식이 있었어요. 상당히 혼미한 상태이긴 했지만 의식은 아직 의식으로서 기능하고 있었죠. 그때 이 방에서 나는 한 여자애와 재회했어요. 아버지가 검사실에 실려 간 뒤 그녀가 여기에 찾아왔어요. 그건 아마 그녀의 분신 같은 것이었을 거예요. 내가 이번에 이 마을에 와서 오래 머물렀던 건,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진짜 이유예요.” (p. 284~285)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서랍들이 있다. 내 서랍에는 수많은 소재들이 있다. 필요한 기억과 이미지들을 서랍으로부터 끄집어낸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 서랍들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고독, 오컴의 면도날, 엄지의 욱신거림, 솔리드한 증거, 고양이 마을, 로맨틱, 콩깍지 안에 든 콩 등……. 수많은 기억과 이미지들이 그 서랍에서 나왔고 이번 1Q84 3권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고 강한 중독성을 지닌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하루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와 그의 소설을 ‘난해하다.’라거나 ‘사기꾼’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하나 모든 걸 떠나서 확실한 것은 그가 대단한 면이 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를 섞어 놓아 복잡하긴 해도 이런 대작을 완성…….시켰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1Q84 3권’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두 남녀 주인공의 재회 장면이다.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공원 미끄럼틀 위에서 손을 마주잡고 말없이 달을 보는 덴고와 아오마메.

 

“덴고.” 아오마메가 귓가에 속삭였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목소리, 그에게 무언가를 약속하는 목소리다. “눈을 떠.”

덴고는 눈을 뜬다. 세계에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달이 보여.” 아오마메가 말했다. (p. 677)

 

다시 만난 그들은 고양이 마을을, 혹은 1Q84년을 떠날 수 있을까. 그리고 외톨이지만 고독하지는 않았던 두 사람은 어떻게 하나가 되었을까. 진정한 사랑은 모든 걸 진짜가 되게 만들고 그것은 우리들 삶의 마지막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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